의과대학 4학년은 임상실습과목이 없다. 각 과를 돌면서 직접 임상 공부를 한다. 과에 따라서 다르지만 대개 4~8명이 한 조가 된다. 초여름 우리 조는 정신과에서 임상 실습을 하게 됐다. 그 시절(70년대)에는 정신과 병동은 격리 병동으로 돼 있어서 병동 전체의 앞에 들어가는 문이 있고 그 안에 각 방이 있으며 가운데는 휴게실, 탁구대 등이 있었다. 처음으로 중증 정신과 환자들을 대하는 우리는 다소 긴장돼 있었다. 대개의 환자들은 책도 읽고 탁구도 하며 별다른 이상 행동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그 중 20대의 한 여성이 우리들 중 한 명을 자주 멍하기 바라봐서 나는 그 친구에게 농담으로 “네가 좋은 모양”이라고 놀리곤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가족 면회가 있었다. 어느 날인가 면회 시간이었는데 그 여성이 과일이 든 상자를 들고 우리 앞으로 와서 내 친구에게 과일을 내밀었다. 그러자 내 친구는 “됐습니다. 가져다 드세요”라고 사양했으나 그녀는 다시 한 번 상자를 앞으로 말없이 내밀었다. 친구가 “됐다니까요. 가져다 드세요”라고 말하자 그녀는 상자를 옆에다 놓더니 갑자기 친구의 따귀를 때리면서 “내 속을 그렇게 몰라” 하면서 뛰어나가는 것이었다. 좋다는 표시를 했는데 거부한 것이 내 친구의 죄였다고 우리는 그 얘기를 두고두고 했다. 그 여성은 항상 공부만 하는 대학생인데, 한 번 보면 외우는 천재인 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지난 모든 일을 마치 오늘 일어난 것처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지난 일을 잊고 살아간다. 수치스럽던 일도, 자랑스러웠던 일도, 그리고 공부한 내용도 나 같은 경우는 곧 잊어버린다. 그런데 그녀는 모든 것이 뇌 속에 남아 있어서 괴로웠던 것이다. 그래서 친구도, 사회생활 경험도 없었는데 병원에 입원했다가 마음에 드는 남자를 봤고 생전 처음 표시를 했다가 거절당하자 폭발했던 것이다. 머리가 너무 좋아서, 즉 어려서부터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고 정신과 신세를 지는 일을 우리는 가끔 본다. 입원 중인 두 대학생이 서로 언쟁을 하고 있었는데 한 학생은 영문과를 다녔고, 다른 학생은 경영학과였다. 영어 단어를 누가 더 많이 외우냐를 놓고 다투는데 경영학과 학생이 “영어 사전 5장을 내가 2분 동안 볼 테니 네가 물어봐라. 내가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를” 하는 것이었다. 경영학도는 영문학도가 무작위로 내준 영어 사전 5장을 2분 동안 다 보더니 영문학도에게 돌려주면서 “물어보라”고 했다. 영문과 학생이 한 단어를 말하자 그 단어부터 아래로 10개의 단어를 순서대로 대며 그 뜻까지 줄줄 맞히는 것이 아닌가? 1970년대 초로 기억되는데 어느 신동이 서너 살에 한글과 한문을 다 익혔고 일곱 살 때 영어를 고등학생 수준으로 했으며 중학교 때 대학교에 입학을 했다는 얘기를 들은 일이 있다. 그리고 약 10년 후 우연히 본 잡지에서 그가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 너무 많은 것이 머릿속에 있어서 스트레스도 많았겠지만 중학생 나이에 대학에 가서 적응이 잘 안됐을 것이다. 사람들의 IQ는 모두 다르다. 분명히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있다. 내가 의과대학을 다닐 때 나는 하루 종일 읽어도 암기가 안 되는 내용을 한 두 시간에 끝내는 친구도 있었다. 이 정도는 개인 차이이며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너무 뛰어나면 문제가 되기도 한다. 평범함이 특별함보다 낫다는 말이 실감난다. 사람은 누구나 특별한 대접을 받기를 원한다. 국회의원 심지어는 시의원, 구의원까지도 배지를 달고 다니며 법규를 어기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관공서에서 행패를 부렸다는 보도도 종종 접한다. 환자들도 아는 사람이 없으면 치료를 잘 받을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인지 특별대우를 바란다. 아마 재벌들이 병원을 직접 세운 데는 자신들이 병원에 가는 순간부터 황제 대우를 받고 싶은 욕망도 일부 작용했으리라고 본다. 한 10년 전 일인데 재벌 병원의 행정을 담당하는 사람이 자신의 집무실로 의사를 불러 진찰을 받곤 했는데 그 중 한 의사가 “더러워서 못하겠다”고 병원을 그만둔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된 일이 있다. 최근 병원에서 VIP를 내세우면서 건강검진 등을 하는 경우도 많이 눈에 띈다. 또한 특별한 공헌이나 기부를 한 사람들에게 특별대우를 해주는 프로그램도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그러나 의사들 간에 통용되는 VIP 증후군은 그런 경우가 아니라, 의사나 의사 가족 등 잘 아는 사람들이 질환으로 병원을 찾은 경우를 말한다. 15년 전이라고 기억된다. 모 중소 병원의 원장이 소화가 안 돼서 병원을 찾았다. 우리 병원에서 그 분을 모르는 의사가 없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계신 분이었다. 입원해서 검사를 했는데 일반 검사 결과 정상이고, 진찰 소견에서도 이상이 없었다. 그리고 며칠 있는 동안에 소화상태도 정상을 보였으므로 환자 자신도 그만 퇴원하기를 원했다. 담당 의사들도 스트레스에 의한 대장 이상으로 잠정 진단을 했다. 모두들 워낙 혼자서 큰 병원을 운영하다보니까 스트레스가 쌓인 것이라며 좀 쉬라고 권유하면서 퇴원시켰다. “그 사람은 그럴 거야”라는 선입관이 암초 그리고 한 5년쯤 지났을 때인데 그분이 다시 입원했단다. 대변에서 피가 나오고 배가 아픈 경우도 많아져서 다시 입원을 한 것이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의사들이 자신의 건강을 잘 돌보지 않을 때였다. 병원을 운영하면서 소화에 이상이 자주 있었는데도 지난번 입원 당시에 들은 ‘스트레스 때문’으로 생각하고 그냥 지나다가 증세가 심해지자 우리 병원을 다시 찾은 것이었다. 결과는 대장암 말기. 처음에 입원했을 때 자세한 검사만 했어도…. 후회해도 소용없다. 잘 아는 분이라고 해서 끝까지 검사를 안 하고 보냈다가 나중에 중한 병으로 발전되는 것을 ‘VIP 증후군’이라고 한다. 지금은 거의 이런 일이 없지만 과거에는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아까운 나이에 치료도 못해보고 간 의사들도 종종 있었다. - 설준희 세브란스심혈관병원 심장웰네스센터장 / 운동치료클리닉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