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1990년에 프랑스인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는 ① 뱀 ② 현기증 ③ 거미 ④ 쉬 ⑤ 말미잘 ⑥ 지하주차장 ⑦ 불 ⑧ 피 ⑨ 어둠 ⑩ 군중이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면 어떻게 될까? 그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죽음의 공포로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죽음은 지금부터 7억 년 전에 출현했다고 한다. 그때까지의 생명은 단세포에 한정돼 있었고 단세포로 이뤄진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한다. 똑같은 형태로 무한히 재생이 가능하기 때문이란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산호초에서 죽지 않는 단세포의 흔적을 볼 수가 있다. 나는 직업이 의사인 만큼 많은 사람들의 임종을 봤다. 불치병 진단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이 생을 마감하리라는 사실을 알고서 슬퍼하거나 좌절하는 모습도 많이 봤다. 그리고 죽을 것이라는 판정을 받았다가 그 판정이 잘못됐음을 알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너무도 기뻐하는 모습들도 많이 봤다. 불치병 진단에 절망했다가 오진이라는 것을 알고 새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던 사람도 6개월만 지나면 옛날로 돌아오는 게 사람의 마음 우리 병원의 한 교수는 간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좌절했다가 수술이라도 해보자는 외과 의사의 권유를 따랐다. 그러나 간에 있던 덩어리가 악성 암이 아니고 생명에 지장이 없는 혈관 종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그는 새 삶을 산다고, 남을 위해, 환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런 생각이 한 6개월밖에 안 가더라고 얘기했다. 또한 나의 선배, 선생님은 폐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가족들에게 유언까지 끝냈었다. 그러나 얼마 후 암이 아니었다는 확진에 하나님께 감사했으나 1년 후 재검에서 아주 작은 폐암이라는 진단 끝에 수술을 받았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병원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다고 한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다짐했겠지만, 인간은 그 순간이 지나면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처럼 다 잊고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 정상인 듯하다.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라는 사람은 많은 환자들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환자들이 불치병 진단을 받아서 죽음을 맞기까지 대개 5가지 단계 즉 ① 거부 ② 분노 ③ 흥정 ④ 의기소침 ⑤ 수용의 5가지 단계를 밟는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는 보편적인 경우이고 이 범주를 벗어나는 사람도 많다.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행태도 다양하다. 어린 아이들은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저 아픈 것이 문제고, 엄마가 옆에 없는 것만 서러워하기도 한다. 10여 년 전 내 친구의 형은 재벌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뇌암 진단을 받고 우리 병원에 입원했는데 어느 날 내 손을 잡고 “내 재산 전부를 사회에 환원하겠으니 한 5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요즈음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삶을 애원하는 사람도 있다.(흥정) 오래된 이야기지만 우리 병원의 교수 한 분이 암 진단을 받았지만 이를 믿으려 하지를 않았다. 그래서 병실 머리맡에 암에 먹는 약을 병째 놓아두었지만 그래도 딴소리를 하더란다.(거부) 그리고 얼마가 지나가 이 교수 분은 내가 어째서 암에 걸렸느냐, 진단이 잘못된 것은 아니냐, 왜 내가 죽어야 하느냐고 소리를 쳤다고 한다.(분노)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불치병의 진단을 받고 몸부림을 치다가 지치게 되고 우울 증세까지 겹치면서 곧 다가올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다.(의기소침) 나의 외할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내가 중학교 때 돌아가셨는데 임종 전 나의 아버님, 어머님에게 “둘 다 교회에 나가 하나님을 만나라”고 하시면서 아주 편안하게 눈을 감으셨던 기억이 난다.(수용)
10여 년 전 나의 고등학교 친구는 혀에 이상이 있는 것을 느껴 개인병원을 방문했는데 혀에 암이 있으며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으니 종합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으라는 의견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종합병원에는 가보지도 않고 좌절해 매일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고혈압으로 쓰러져서야 병원에 입원해 검사를 받았는데 혀는 암이 아니었다. 그러나 고혈압 관리를 하지 않아 뇌혈관이 터져 상태가 심각했다. 한 1개월 정도 의식불명으로 중환자실에 있다가 사망했다. 병을 확인 안 해보고 자신의 몸을 마구 굴린 본인도 문제지만, 확실하지도 않은 사실을 전해준 의사의 문제도 크다고 본다. 사람은 항상 최악을 생각하기 쉽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의사는 환자에게 진단을 내릴 때 신중해야 하며, 확실한 경우만 얘기해줘야 한다고 본다.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이 불쌍하다는 말도 있지만, 망자를 보내는 사람들의 태도도 다양.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뿐 아닐까. 큰 병을 앓지 않다가 갑자기 사망하는 사람을 보고 사람들은 그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못하고 떠났다는 의미일 것이다. 골프장에서 운동을 하다가, 또는 회사에서 회의를 하다가 사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젊은 사람이라면 “아, 그 친구 정말 안 됐다”라고 하지만 충분한(?) 기간을 살다간 사람이라면(요사이는 최소한 80세 이상) “행복하게 간 사람”이라고 부르는 듯하다. 옛말에 죽은 사람은 그렇다 치고 산 사람들이 더 불쌍한 경우가 많다고 했다. 어떤 경우든 세상을 떠나는 사람의 주위에는 한동안 애도의 눈물바다가 펼쳐진다. 그 사람이 죽기를 바랐던 사람까지도…. 병원 장례식장에서 보면 죽음 앞에 비통하게 서 있던 가족들 중에 조문객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나오면 떠들고 웃는 광경을 많이 본다. 나의 죽음이 아니라면 돌아서면 바로 잊는 것일까. 아프리카에서는 갓난아이의 죽음보다 노인의 죽음을 더 슬퍼하는데 이는 노인이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어서 부족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갓난아이는 죽음조차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면 유럽에서는 갓난아이의 죽음을 더 슬퍼한다. 어쨌든 노인은 살만큼 살았고 아이는 피워보지도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 애틋했던 부부들 정도가 망자와 진실로 슬픔을 함께 하는 것은 아닐까? - 설준희 세브란스심혈관병원 심장웰네스센터장 / 운동치료클리닉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