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0호 박현준⁄ 2012.11.12 11:18:11
지난 8월 말로 거의 40년간 몸담았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정년퇴임하게 됐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볼 때 후회 없는 인생이었다고 선뜻 대답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크게 아쉬웠다거나 부족한 인생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많은 사람들이 축하를 해주며 감회를 묻지만 별다른 느낌이 없다. 다만 그 날에 맞춰서 나온 ‘신체 리모델링’ 책이 대견스러울 뿐이다. 며칠 집에서 쉬다가 볼일이 있어서 학교를 다시 찾았는데 마치 아직도 계속 다니는 곳에 당연히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음대를 지나 예과 때 수업을 하던 장소로 나오니 옛일이 어제 일처럼 스쳐간다. 처음 의과대학에 입학을 하고 처음 학교에 왔던 날이….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아니, 고등학교 졸업할 시기까지도 나를 비롯해서 아무도 내가 의대교수가 될 수 있으리라고는 꿈도 못 꿨었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농구를 시작했고 고등학교에서도 1학년 말까지 농구를 했다. 이 당시 연세대학교 체육부장이셨고 우리나라 농구계의 대부셨던 고 이성구 선생님이 농구보다 공부를 하는 것이 나의 미래를 위해서 좋겠다고 조언을 해주셨다. 뒤에서 10등 하던 내가 고3 때 전교 5등 하자 선생님은 “커닝하는 놈”이라며 감시까지 했지만… 내 생각에도 나의 능력상 농구로 성공을 할 수 없다고 생각을 해서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고 아버님께 말씀을 드렸는데 이때 아버님은 “네가 지금 공부를 시작해서 제대로 된 대학에 들어가기는 어렵다. 그럴 바에야 고교를 졸업하고 바로 장사를 해보면 어떠냐? 한 두 차례는 자금을 대주겠다”고 하셨다. 나는 내게 자극을 주려고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 때부터 중학교 과정을 공부하고 고2 말 당시 명문 고교에 입학시험을 봤으나 낙방했다. 그리고 몇 달 후 처음 모의고사를 봤는데 운동부 친구들이 와서 내가 10등을 했다고 말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성적을 확인을 해보니 뒤에서부터 10등…. 앞이 캄캄해졌다. 고3 10월에 모의고사를 봤는데 담임선생님이 부르시고는 “너 커닝해서 성적이 좋아진다고 무슨 이득이 되냐”고 호되게 나무라셨다. 그리고 다음 시험 때는 내 곁에서 감시까지 하셨는데 전교 5등! 나도 믿기지 않는 결과였다. 전교 5등을 했다고 그 때부터 공부를 소홀히 했으니 연세의대에 낙방했다. 당시 제일 좋다는 양녕학원에 입학시험을 봤는데 경쟁률이 자그마치 151:1이었다. 떨어지고 나서 미등록 학생이 생겨서 가까스로 입학을 했다. 그리고 다음해 연세의대에 입학할 수 있었고 힘들게 예과를 지나 본과에 올라왔다. 하지만 영어 기초가 없던 나는 영어원서 교과서로 학업을 따라가는 데 힘겨운 4년을 보냈다. 소화도 안 되고 스트레스가 쌓여 체중이 67kg(키 180cm) 이하로 떨어졌다. 군대를 다녀와 소아과 전공의가 됐는데 선배나 친구들은 내가 소아과를 하니 앞으로 소아 사망률이 증가할 것이라고 농담도 했었다. 그리고 소아심장 교수직에 올랐다. 심장 초음파기와 제대로 된 심도자기 하나도 없던 시절을 지나면서 우리나라 최초로 심장혈관센터가 생겨서 소아심장과가 소아과의 또 다른 한 임상과로 자리 잡는 개화기까지…. 소아심장 환자의 진단과 치료를 주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연세대학교 농구부 부장. 당시 최희암 감독이 나를 보고 감독, 코치보다도 더 열심히 체육관을 지킨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로 농구에 심취했고 ‘농구 슈팅학’이라는 책도 발간했다. 2000년에는 당시 의료원장의 제안으로 스포츠 의학과장을 맞게 되면서 6년에 걸쳐 생소한 스포츠 의학을 배웠다. 보스턴 대학, UCLA, USC, NYU, 스탠포드 그리고 LA 레이커스 운동 치료 담당부 등에서 신체의 기본을 중시하면서 그 위에 강도 높은 훈련을 권장하고 있었다. 당시 스포츠 의학을 전공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신체자세의 형태, 움직임의 역학 등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미국에서도 이에 대한 연구를 실험하는 시기여서 저널이나 서적들이 앞서 나가고 있었고, 병원에서의 실행은 시험단계 정도였다. 미국에서 제일 어려웠던 일은 영어를 공부하는 것이었다. 워낙 실력이 부족했던 나는 우선 옛날 미국 연속극의 DVD로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컴뱃(전투)’ ‘맥가이버’ ‘달라스’ ‘형사 콜롬보’ 등을 먼저 영어 자막과 함께 본 다음에 자막 없이 보기를 반복했다. ‘컴뱃’을 계속해서 보면 조금 들리는데 드라마를 바꿔 ‘맥가이버’를 보면 또 달랐다. ‘달라스’는 남부 억양이 많아 다른 영어를 배우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조그마한 우리나라도 제주도말이 확연히 다른데 하물며 그 큰 나라야…. 이렇게 해서 내가 본 DVD가 거의 5000장에 이르렀다. 지금 내 방의 서재와 서랍을 다 채우고도 모자라서 구석구석 쌓여 있다. 몇 년 전 운동치료 클리닉을 세브란스 병원에서 시작하려 했지만 반대에 부딪혀 중단했었다. 그리고 2년 전에야 비로소 시작했지만 병원 내의 인식 부족으로 아직 활성화되지 못한 상태다. 하지만 점차 운동치료로 효과를 보는 사람이 늘면서 운동능력검진이 도움이 된다는 인식이 살아나고 있다. 허리 디스크가 심해 걷지도 못하고 우울증에 걸린 사람, 허리 수술을 받고도 지팡이에 의지하던 사람들이 건강과 웃음을 되찾는 것을 보면서 운동치료의 미래가 밝고, 새로운 의학 장르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8월 말로 정년을 맞고 자원 봉사로 세브란스에서 운동치료 클리닉 일을 계속 하면서 장차 건강검진에 운동능력검진을 추가해 명실상부한 건강진단 체계를 갖추는 데 일조하려고 한다. 소아과 의사에서 연세대 농구부장 그리고 운동치료 클리닉…. 어떻게 보면 3모작 인생을 살아온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정년퇴임식 맞춰 나온 ‘신체 리모델링’ 대견스러워. 질병검진에 ‘운동능력검진’ 포함돼야 진정한 검진 내가 정년을 맞기 직전 소아 심장학회에서 고별 강연을 할 기회를 주어져 선천성 심장질환 환자에서의 운동치료(재활)를 강의했다. 강의 직후 많은 후배들이 “그간 교수님은 심장학에 소홀했다고 오해했는데 새로운 장르, 심장학이 미래에 해결해야 할 방향을 공부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며 감사와 축하의 말을 전해줬다. 이제 CNB저널에 1년 반 동안 연재해 오던 이 시리즈(설준희 교수의 메디컬 40년 에세이)가 마무리 돼가고 있다. 운동치료 클리닉의 활성화 그리고 운동능력검진을 질병검진과 함께 해 진정한 건강검진을 실현하는 일을 시작하는 것과 함께 새 시리즈로 ‘여성 신체의 리모델링’을 연재할 예정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삶에 대해 감사하면서 운동 치료를 통해서 환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 - 설준희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