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에서 만난 초등학교 5학년 학생 A는 학교에서 멍하게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A는 친구들과의 놀이에도 관심이 없어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도 혼자서 엎드려 있는 일이 많았고, 하교 후에도 가야하는 학원에는 가지 않고 집주변을 배회하다가 귀가하는 일이 잦았다. 결국 학교생활에 흥미를 잃어 성적도 최하위권이 됐다. 심지어 일단 등교했다가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이 출근하면 몰래 집에 들어와 컴퓨터만 하는 일도 생기곤 했다. A가 원래부터 이런 아이는 아니었다고 한다. 7, 8세 때에는 영재교육을 받을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었고, 전국규모의 학습대회에서 수상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공부 잘하다 갑자기 수업 태도가 불량해져 학습에 관한 과도한 개입은 아이에게 부담 부모님은 A의 학습에 매우 관심이 많은 분들로 A가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여러 가지 학습프로그램이나 개인과외 등에 스케줄을 짜야할 정도로 관리했다고 한다. 학습량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닌지 걱정이 돼 학습량을 줄여보기도 했지만 하루 종일 놀기만 하려하는 A의 모습에 대한 걱정과 다른 아이들에 뒤쳐질 것 같은 불안감에 다시 학습량을 늘이곤 했다고 한다. A 역시 그런 부모의 뜻에 큰 투정 없이 비교적 잘 따라주는 것으로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4학년 무렵부터 A는 부모님이 지도하지 않을 때에는 전혀 학습준비를 하지 않아 과외시간이나 학교수업에서 지적받는 일이 잦아졌다. A에게는 학습 및 학교에 대한 흥미소실이 문제의 시작으로 보였는데, 이러한 흥미소실은 이제 학습권태기를 넘어 우울증의 범주에 해당될 정도로 심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됐다.
아이들이 일명 ‘학습권태기’ 즉, 학습에 대한 흥미를 잃고 싫증을 내는 원인으로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우울증, 정서장애, 불안장애, 정신지체 등 여러 가지 소아정신과적 질환의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그러나 원인이 될 만한 질환이 없는 경우라면 학습방법이나 태도, 감당하기 어려운 학습량, 너무 어려운 학습내용, 부모의 태도나 성격 등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학습에 대한 지나친 방임도 문제가 되겠지만, 학습에 대한 부모의 과도한 개입은 아이에게 자칫 ‘학습이란 부모 혹은 선생님이 알아서 해주는 것’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또한 학습에 대한 호기심이나 동기, 창의적 생각의 싹을 잘라 장기적으로 정작 본인스스로의 학습이 필요한 시기가 왔을 때 방황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A에게는 일차적으로 우울증에 대한 치료와 함께 가족치료 및 교육이 병행됐다. 매우 어려운 결정이긴 했으나, 현 상황에서 과외나 학원에 다니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으므로, 일단은 최소한의 학습만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아이의 작은 변화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로 했다. A도 처음에는 갑자기 달라진 부모의 태도에 어느 것이 진심인지 헷갈려하는 듯이 보였고, 때론 ‘학교숙제도 안 하겠다’, ‘유학을 보내달라’는 등의 과도한 요구를 하기도 했지만, 차차 일상생활과 학교생활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고, 학습에도 흥미를 느끼는지 공부에 대한 욕심을 표현하기도 했다. 내 아이가 나보다 더 훌륭하게 자라기를 바라고,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최선의 뒷바라지를 하려는 마음은 모든 부모에게 같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혹시 부모자신의 욕심이거나 보상심리의 표출은 아닌지 항상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아이가 힘겨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항상 관심을 가져야할 것이다. - 정종현 가톨릭대학교 성빈센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