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9호 김금영⁄ 2013.03.25 14:24:09
쉼터. 뜨거운 햇볕이 내리쬘 때 쉬어갈 수 있는 그늘, 또는 다리가 아플 때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의자처럼 지친 사람들이 몸과 마음을 쉬어갈 수 있는 바로 그런 곳. 세브란스병원 호스피스에도 이와 같은 쉼터가 있다. 사별가족들이 모여서 서로 이야기도 나누고 지지하고자 하는 취지로 세브란스병원이 2006년 만든 ‘쉼터’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모임이다. 처음엔 북아현동이 쉼터의 보금자리였고, 지금은 쉼터 회원이었던 목사가 장소를 제공해 불광동에서 매주 화요일 쉼터 모임이 열리고 있다. 호스피스실 관리 아래 시작된 모임이지만 2년 동안의 관리 시간이 지난 후부터는 사별가족 스스로의 자조모임으로 운영되고 있다. 2월 5일 이 쉼터에서 인터뷰의 주인공 박양순 씨를 만날 수 있었다. 박 씨는 사람들과 함께 한바탕 신나게 웃고 있었다. 무엇을 하고 있냐고 물으니 바로 크게 웃으며 마음을 치유하는 ‘웃음치료’란다. “김미정 선생님이 아주 복덩어리를 보내줬어요. 박양순 씨가 다양한 프로그램을 매주 스스로 짜 와서 우리에게 알려줘요. 같이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거나 제기를 차거나 오늘처럼 신나게 웃는다거나 하죠. 덕분에 우리도 쉼터에 오는 날을 매주 기다리게 돼요(웃음).” 쉼터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박 씨와 김미정 세브란스병원 호스피스실 사별가족 담당자를 칭찬하고 있었다. 이 말에 박 씨는 “정작 치유 받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박 씨가 현재 이렇게 밝게 웃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2012년 4월 박 씨는 남편을 먼저 떠나보냈다. 대장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1년도 못 견딜 줄 알았는데 그래도 3년을 잘 견뎌준 남편이었다. 27살 때 만난 남편은 처음 봤던 순간부터 한없이 다정다감했다. 집문서와 월급봉투를 들고 나와 “이것 가지고 살 수 있겠습니까?” 하며 프러포즈하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남편의 프러포즈에 ‘50점은 됩니다’ 하고 답했어요. 그러자 남편은 ‘고맙습니다’ 하면서 ‘결혼 날짜를 정하시죠’ 하고 말했었죠. 남편은 천상 멋쟁이였어요. 양복도 명동에서 맞춰 입었고, 결혼식도 명동에서 했어요. 남편과 살면서 정말 행복했어요. 주위에서도 닭살 부부라고 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죠. 아이들이 남편에게 다음 생애에서 엄마 또 만날 거냐고 물어보면 남편은 ‘네 엄마가 다시 나를 선택해준다면 다음 생애에서도 꼭 다시 만나서 더 잘 살 거다’ 하고 얘기하곤 했어요.” 자신의 손을 놓으면 걱정이라던 남편은 마트를 갈 때도 등산을 할 때도 항상 손을 꼭 잡았다. 90살까지 그 손을 놓지 않고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줄 알았건만, 원망스럽게도 결국 하늘은 남편을 데려가 버렸다. “남편이 먼저 가고 나서 남편은 이제 이 세상에 없는데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대로 흘러가는 게 못 견디게 화가 났어요. 무언가에 홀린 듯 남편과 같이 운동했던 곳을 수도 없이 걸었어요. 제가 걷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면 제가 한강을 걷고 있었죠. 사람을 만나는 것도 겁이 나고 힘들었어요. 공황장애가 오고 대인기피증까지 와서 방에서 우두커니 혼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다정다감했던 남편 먼저 보내고 방에서 웅크려 지내던 나날들” 남편과 항상 매월 넷째 일요일은 여행을 갔었기에 어디를 가도 남편의 흔적이 보였다. 남편이 없는데도 혼자서 남편에게 이야기하고, 배가 고픈데 밥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바깥에 나가면 다 자신을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주위에서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다” “먼저 간 사람은 잊고 힘내야 한다” “기운 내라” 등 격려와 위로를 해줬지만 진짜 자신의 심정을 이해해서 하는 말이 아닌, 그저 가식적인 말들 같아서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이 왜 위로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 처한 건지 화가 나고, 눈물도 많이 났다. 스트레스 때문에 혈관이 굳는 척추뇌관동맥증후군으로 응급실에 실려 가는 위험천만한 상황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박 씨에게 한결 같이 오는 편지가 있었다. 바로 세브란스병원 호스피스실 사별가족 담당자인 김미정 선생님이 사별가족을 위해 보낸 편지였다. 남편의 마지막 1주일을 임현주 호스피스실 간호사가 함께 하면서 호스피스와 만남을 가졌고, 자연스럽게 김 선생님과도 안면을 튼 바 있었다. 그 편지에는 “지금이 가장 힘들 시기이다” “그런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이다”며 시기별로 박 씨가 느끼는 심정에 대한 이야기들과 조언이 적혀 있었다. 객관적이고도 공감이 가는 그 내용에 박 씨는 조금씩 마음의 위로를 받았다. 하지만 우울증을 완전히 극복할 수는 없었다. 그러다 남편과 사별한 지 100일이 지난 어느 날, 김 선생님에게 쉼터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됐다. 김 선생님은 다른 사별가족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라며, 쉼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많이 힘이 될 것이라고 모임에 나가보라고 권했다.
“같은 아픔 지닌 사별가족들 만나 눈물과 응어리 풀어내” “김미정 선생님이 처음 쉼터에 대해 말해줬을 땐 ‘과연 내가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두려웠어요. 다른 사별가족들이 어떻게 어려운 상황들을 극복했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기도 했지만 용기가 없었죠. 그런데 막상 자리에 나가니 울음이 터져 나왔어요. 저와 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함께 공감할 수 있었고, 저도 마음속 깊이 잠겨 있던 차마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털어놨어요. 정말 위로하는 시늉이 아니라 모두 진심으로 저를 대해줘 큰 힘이 됐어요.” 쉼터의 사람들은 조용히 앉아 그저 박 씨가 하고 싶은 말들을 모두 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줬다. 그리고 손을 잡고 “잘 왔다”고 얘기해줬다. 그 사람들에게서 자신과 똑같은 아픔이 느껴졌고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었다. 쉼터에서의 첫 날, 그렇게 박 씨는 참았던 눈물과 마음속 응어리를 드디어 바깥으로 토해냈다. 쉼터에 다니면서 닫혀 있던 마음을 조금씩 열고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한 박 씨는 그동안 너무 힘들어 차마 돌아보지 못했던 딸들과도 이야기를 했다. 딸들은 “엄마가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도와주는 거야”라고 이야기했다. ‘내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 아이들은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한없이 미안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엄마로서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박 씨는 “아마도 그 순간이 내 삶의 또 다른 터닝 포인트가 된 것 같다”고 회상했다. 매일 집에서 웅크리고 지냈던 박 씨는 스스로 세상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어둡게만 느껴졌던 세상에는 환하게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그 햇살을 받으며 박 씨가 찾아간 곳은 여성발전센터였다. 박 씨는 여기서 실버 레크리에이션을 배우기 시작했고 그 여정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쉼터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인터넷을 찾아보다가 실버 레크리에이션을 발견했어요. 프로그램을 보니 목 근육 운동이나 웃음치료, 댄스, 전래노래 등 다양한 항목들이 있었는데 이 모든 것들을 쉼터 사람들과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배우기 시작했죠. 지금 배운지 한 5개월 정도 됐어요. 그런데 10개 배우고 나면 2~3개밖에 생각이 나지 않아서 큰일이에요(웃음). 그래서 배운 내용을 항상 노트에 정리하고, 쉼터 모임에서는 어떤 것을 하면 좋을까 생각해서 15가지 정도 미리 뽑아놓아요. 처음엔 제가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됐는데 지금은 너무 즐거워요.” 박 씨는 레크리에이션 수첩을 꺼내서 보여줬다. 거기엔 안마하는 방법, 노래 가사, 스트레스를 날리는 유머 등 다양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박 씨는 레크리에이션에서 배운 내용뿐 아니라 자신이 들은 아름다운 글귀 등도 꼭 적어온다. 쉼터 사람들과 그 감동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이다. “쉼터에서 받았던 위로, 다른 사별가족들에게도 전할 것” 이날 웃음치료와 함께 또 박 씨가 준비한 것은 풍선이었다. 같이 풍선을 불면서 폐를 단련시키고자 마련했다. 풍선을 불며 얼굴이 빨개지는 모습에 서로 웃기도 했다. 쉼터 사람들은 음료와 귤, 떡 등 먹을 것을 서로 준비해왔다. 의무적인 모임이 아니라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서 서로 지지하고 격려하는 자리, 쉼터는 그런 곳이다. 인터뷰가 진행된 날 눈이 많이 와서 길이 꽁꽁 얼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2004년부터 계속해서 쉼터 모임에 나오는 사람도 있고,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도 자리를 지킨다. 이들은 서로의 아픔을 공감하고 위로하면서 끈끈해지고 용기와 힘을 얻었다. 사정이 있어서 모임이 열리지 않을 때는 서로 보고 싶어 하고 다음 모임이 열리는 날을 기다린다. “집에만 있을 땐 식구들만 알고 살았었어요. 그런데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참 많다는 걸 느꼈어요. 저를 도와주고 격려해준 분들이 많아요. 처음엔 제가 사람들을 만나서 치유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저 치유 받는 게 아니라 저도 도움을 주고 싶어요. 예전엔 ‘그대 없이 못살아’라는 노래를 들을 때 제 상황 같아 눈물만 흘렸는데, 이젠 이 노래가 쉼터 사람들 얘기 같아요. 이 사람들이 없으면 못 살 정도로 정말 정이 많이 들었어요. 정말 감사한 마음뿐이에요.” 박 씨는 손수 만들어온 브로치를 김 선생님에게 건넸다. 자신을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올 수 있게 격려와 도움을 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브로치를 받은 김 선생님은 감격해하면서 바로 옷에 달았다. 그 모습이 꼭 훈훈한 가족 같다. 김 선생님은 “박양순 씨가 처음엔 말씀도 굉장히 잘 하고 밝은 것처럼 보였지만 속으로는 많이 힘들어했던 분”이라며 “쉼터에 있는 분들도 박양순 씨의 이야기를 듣더니 마음을 보듬어 주고 싶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돈독한 관계가 만들어져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박 씨는 앞으로도 쉼터와 함께 할 생각이다. 가슴이 너무 아파 마치 죽을 것만 같았던 자신을 이끌어준 쉼터 사람들처럼 박 씨도 다른 사별가족에게 힘을 전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저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많이 힘들어하는 분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있을 거예요. 그분들이 쉼터에 나오면 제가 빨리 회복될 수 있도록 도와드리고 싶어요. 전에는 이런 생각을 하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자신감이 생겨요. 제가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하는 일이라고 믿고요. 한 분이라도 더 웃게 해드리고 싶어요. 쉼터에 오면서 제가 가장 좋아하게 된 말이 있어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는 황금, 소금 그리고 지금’이라는 말이에요. 지금이 모여서 오늘이 되고, 또 지금이 모여서 우리 인생이 된다는 것을 느꼈어요. 지금 이 순간에 다 같이 웃으며 박수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쉼터에서의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기자 또한 함께 신나게 웃고 박수를 치면서 ‘지금’을 즐기고 있었다. 정말 사람들의 몸과 마음이 쉬고 갈 수 있는 진정한 쉼터, 그곳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 김금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