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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의 ‘나홀로’ 세계여행 ⑫] 중국 단둥-다롄 여행]휘황찬란 中 단둥, 적막한 신의주…참혹한 국경, 지구상에 또 있을까?

열강 격돌의 현장에서 안중근 의거와 남북 분단의 아픔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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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04호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2014.11.13 09:16:00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인천 - 다롄 경유 단둥(1박) - 다롄(1박) - 인천』

1일차 (서울 → 다롄 경유 → 단둥)

단둥 가는 길

중국남방항공(CZ)편으로 낮 12시 15분 인천공항을 출발한지 한 시간 남짓 만에 랴오닝성(遼寧省) 랴오둥 반도(遼東半島) 남쪽 꼭짓점에 위치한 다롄(大連)에 도착했다. 다롄공항은 시내에서 매우 가까이 있다. 시내로 나와 간단히 점심식사 후 곧장 단둥(丹東)으로 향한다. 단둥은 다롄에서 300km 거리다. 버스는 오후 2시경 단둥-다롄간 고속도로(丹大高速)에 진입한다. 고속도로에는 차량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중국은 이곳 변방 중의 변방에도 훌륭한 도로 인프라를 구축해 놓았다. 언젠가는 이 길도 자동차로 메워질 것이다.

단둥 풍경

후덥지근한 여름 날씨와 드넓은 평야에 높게 자라는 옥수수까지 단둥 가는 길 풍경은 비슷한 위도에 위치한 미국 중서부(Midwest)와 흡사하다. 버스는 다롄에서 단둥 방향 2/3 지점쯤에 위치한 다구샨(大孤山)휴게소에서 잠시 쉬더니 곧 고속도로를 벗어나 단둥의 서쪽 외곽으로 진입한다. 그동안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등 중국의 대도시를 주로 방문하다가 오랜만에 변방의 지방도시 모습을 보니 오히려 새롭다. 자전거, 오토바이, 자동차, 우마차와 보행자가 마구 뒤섞인 모습은 10년 전 지린성(吉林省)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 옌지(延吉)에서 봤던 바로 그 모습, ‘무질서의 질서’다.

단둥은 인구 50만이다. 도시 외곽 단둥시 관할지역까지 포함하면 270만이 거주한다. 단둥은 중국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 잡은 항구이자 중국에서 가장 큰 국경 도시이다. 장백산맥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단둥은 중국 국가지정 풍치지구로서 기후 또한 연중 온화해 많은 관광객이 유입되는 곳이다. 버스는 허름한 도시 외곽을 가로질러 도시 중심에 나를 내려놓는다. 도시 중심에는 진쟝(錦江)공원과 항미원조(抗美援朝) 기념탑이 있고 단둥역 앞에는 거대한 모택동 동상이 서있다.

▲압록강과 단동 신시가지


단둥 vs 신의주

내가 묵을 가일양광(假日陽光) 호텔은 시설이 매우 훌륭하다. 변방의 호텔이라고 믿을 수 없는 초현대식 시설이다. 게다가 내가 사용할 방은 침실 두 개, 화장실 두 개짜리 로열 스위트룸 아닌가?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과분하게 좋은 객실이 배정돼 중국 변방에서 호사를 누리게 되니 어리벙벙하다. 호텔에 여장을 풀고 저녁식사를 하러 압록강변 북한 식당 평양옥류관으로 향한다. 압록강변의 철교와 단교(斷橋)를 보면서 건너편 신의주를 조망하니 묘한 감회가 교차한다.

관광객들로 들떠있는 단둥과는 달리 건너편 신의주는 쥐죽은 듯 조용하다. 과거 압록강 이쪽 단둥이나 저쪽 신의주는 비슷했다고 한다. 그러나 단둥이 국경경제협력지역(Border Economic Cooperation Zone)으로 지정돼 개발에 개발을 거듭한 후에 이제는 양안 격차가 현저히 벌어져 두 개의 전혀 다른 세계가 되고 말았다. 어두운 내 마음을 헤아리는 듯 곧 바다를 만날 압록강물 또한 탁하기만 하다.

▲다롄 성해광장 풍경


서글픈 국경

식당에서 나오니 밖은 이미 해가 저물었다. 강 건너 신의주 쪽에서 간혹 비추는 방공 서치라이트만이 그곳의 존재를 알려 준다. 단둥의 거리는 갖은 색의 네온사인이 화려함을 뽐내지만 건너편 신의주는 완전히 적막에 잠겨 있다. 다행이 중국 측에서 압록강 철교 조명을 북한쪽까지 밝혀 놨다. 건너편 신의주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국경의 밤은 가슴 시리도록 서글프다. 이렇게 참혹한 국경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국경을 놓고 양쪽이 이렇게 대비되는 곳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허전한 마음을 안고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방에는 광둥성(廣東省)부터 티베트 시짱(西藏)자치구까지 중국 전역의 TV 방송이 위성을 타고 모두 들어온다. 한국의 KBS뉴스는 남부지방 소식을 알려 주니 북한 바로 옆에 와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없다. 호텔 창 너머로는 단둥역을 오가는 열차가 가끔 지나간다. 단둥은 예전에 탈북자가 많았으나 중국 정부의 강력한 단속 이후 거의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중조(中朝)국경은 길지만 그중에서 탈북자가 택할 수 있는 루트는 단둥과 지린성 산허(三合) 지역 등 몇 군데에 불과하다고 한다. 탈북 후 은신하고 보호할 조선족이 있는 곳이라야 성공적으로 제3국을 통해 남한 안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보과, 작은 개울 건너편이 북한 땅


2일차 (단둥 → 다롄)

한국전은 항미원조 전쟁?

호텔 조식 후 다시 압록강변으로 향했다. 단교(斷橋), 즉 ‘끊어진 다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원래 압록강 철교였던 이 다리는 1911년 일본이 건설했으나 1951년 한국전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교각과 중국 측 4개의 아치만 남기고 파괴된 상태 그대로 둔 것이다. 중국은 이 다리를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의 상징으로 남겨 놓은 것이다. 항미원조 전쟁이라고는 하지만 당시 건국한지 1년밖에 안 된 신생 국가 중화인민공화국이 국운을 걸고 도왔던 이웃 북한의 오늘날 초라한 모습을 보면서 중국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중국에게도 회한은 있을 것이다. 남한을 도왔던 연합군 참전국들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세계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한국을 뿌듯하게 보고 있지 않은가?

단교 vs 중조우의교

‘항미’라는 표현이 섬뜩하다. 중국에게 미국은 숙적(宿敵)임을 느끼게 한다. 중국이 아무 탈 없이 이대로 가면 2017년쯤에는 미국을 누르고 세계 최대 경제대국이 된다는 예측마저 나오고 있는 실정에 두 나라 틈바구니에서 한국이 취해야 할 입장은 무엇일까? 심각한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다. 단교 바로 옆에는 1958년 건설한 항미원조 기념관이 있어 중국의 애국교육현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단교와 나란히 달리는 또 다른 철교(1943년 개통) 또한 한국전 중 파괴됐으나 전후 복귀돼 온전한 모습으로 중국과 북한을 잇고 있다. 중국은 이 압록강 철교를 ‘중조우의교(中朝友誼橋)’라고 부른다. 마침 압록강 철교위로 4량짜리 단둥-신의주 국경 열차가 지나간다. 참고로, 현재 철교의 8km 하류 지점에 중국 측의 투자로 건설 중인 왕복 4차선 신 압록강 대교가 개통을 앞두고 있다.

▲단교


할 말 잊게 하는 압록강

압록강 선착장에서 유람선에 오른다. 유람선은 철교 밑을 지나 북쪽으로 위화도까지 올라갔다가 회항해 남쪽으로 압록강 어귀를 돌아온다. 위화도는 여의도 면적의 약 1.3배 되는 섬으로서 북한 땅이다. 강 양안(兩岸)이 극명하게 대비된다. 북한쪽은 움직이는 것이 없다. 높은 굴뚝 두 개를 가진 제지 공장이 그나마 신의주에서는 큰 산업이라고 한다. 북한쪽 조선소에는 낡은 트럭 한두 대가 간혹 움직이다. 남쪽 강변에는 새로 접안시설을 짓느라 기중기 두 대가 움직이다.

유람선 갑판에서 북한쪽을 주시하는 관광객 중 절반은 한국인, 특히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들 또한 모두 넋을 잃고 말을 잊는다.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할 수 없다. 망연자실 신의주만 바라본다. 그러는 사이 배는 국경경제협력지역으로 지정돼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는 중국 단둥의 초현대식 고층 건물들을 옆으로 보며 선착장으로 북상한다.

역사 왜곡의 현장 호산장성

선착장을 벗어난 버스는 압록강 제방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간다. 오른 쪽에 북한 땅 위화도가 보이더니 크고 작은 섬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어떤 것은 중국 땅이고 어떤 것은 북한 땅이다. 얕은 개울만 건너면 북한인 곳도 많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 위화도에는 중국 개발회사들이 짓다만 별장 가옥들이 버려져 있다. 그러는 사이 버스는 호산장성(虎山長城)에 도착했다. 중국은 이곳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 출발점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고구려 장성이다. 그동안 알려진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허베이성(河北省) 산하이관(山海關)에서 동북쪽으로 2000km나 연장한 지점이다. 시멘트로 발라 조악하게 새로 쌓은 성벽 구조물과 성루가 이곳이 역사 날조, 역사 왜곡의 현장임을 증명해 준다.

▲호산장성 관문


중조변경 일보과

호산장성에서 몇 발짝 움직이니 가장 근접한 중조변경(中朝邊境) 일보과(一步跨)다. 이름 그대로 작은 개울 건너 한 발짝 건너면 북한 땅이다. 철조망 너머에 북한 경비병이 어슬렁거리고 그 너머에는 북한 마을이 있다. 관광객들로 붐비는 이쪽과는 달리 건너편은 인기척이 없다. 모든 것이 멈춘 여기가 지구의 끝이 아닌가 싶다. 서글픔이 또 한 번 몰아친다.

멋진 항구도시 다롄

단둥 시내에서 한국식으로 점심식사 후 다롄으로 버스를 재촉한다. 약 4시간 걸려 오후 5시 다롄 시내 성해광장(星海廣場)에 도착했다. 선선한 여름 날씨를 자랑하는 다롄은 완벽한 피서지이다. 마침 휴일을 맞아 바닷바람을 쐬러 나온 인파로 북적인다. 얼굴이 희고 다리가 곧은 늘씬한 북방 미인들과 우람한 체격의 남성들이 눈에 많이 띤다. 멀리 내다보이는 발해만(보하이만, 渤海灣), 광장을 둘러싼 높고 낮은 산, 해변을 따라 올라간 높은 건물과 신축 아파트, 구불구불한 언덕길, 러시아풍 혹은 일본풍 건축물, 박공지붕을 얹은 건물 등 다롄은 부산, 샌프란시스코, 블라디보스톡과 홍콩을 조금씩 닮은 모습이다.

성해광장을 나와서 바닷가 산악도로를 끼고 도니 노호탄(老虎滩) 공원을 지나 시내로 이어진다. 해안도로에는 근사한 별장 주택과 고급 주택들이 즐비하다. 해산물과 청도맥주, 장성(長城)포도주로 포식하고 중산광장(中山廣場)과 민주광장 사이 천진가(天津街)에 위치한 홀리데이인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다롄의 간단치 않은 역사를 말해 주듯 러시아인과 일본인 관광객들이 눈에 많이 띤다.

러시아 거리의 감회

호텔에서 나와 다롄의 밤거리를 걷는다. 호텔에서 5분쯤 다롄항 방향으로 걷다 보니 러시아 거리가 나온다. 러시아식 건물이 늘어선 거리에는 이제 식당 몇 곳과 기념품 상점만 남아 있다. 거리가 끝나는 지점에 있는 작은 분수 광장과 낡은 호텔이 한때 여기 북적였을 러시아 커뮤니티의 존재를 짐작케 한다. 거리 뒤편으로는 한 세기전 러시아인들이 거주했던 러시아식 가옥들이 이제는 낡은 채로 버려져 빈민가로 전락해 있다. 그나마 도시 재개발로 헐리고 있으니 이제 러시아의 흔적은 상징적 건물 몇 개를 제외하면 모두 사라질 것이다.

지금은 초라하게 쇠락했지만 여기는 한때 러시아 극동함대 주둔 지역이었던 뤼순다롄(旅順大連), 일명 뤼다(旅大) 아닌가? 그러나 어디에서도 노제국의 옛 영광을 찾아볼 수 없다. 삼국간섭 이후 10년 가까이 조차해 왔던 뤼순다롄을 러일전쟁 패배로 일본에 내주고 짐을 싸야 했던 대국의 기분은 어땠을까? 다롄의 거리를 걸을수록 당시 비감했던 러시아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비가 부슬거리니 여행자의 감회가 더욱 솟구친다.

▲다롄 러시아거리


삼국간섭

삼국간섭(1895)은 청일전쟁(1894-1895) 결과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일본이 청나라에서 할양받은 랴오둥 반도(遼東半島)를 러시아, 프랑스, 독일 3국이 개입해 청나라에 되돌려 주도록 압박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프랑스는 러시아의 동맹국이었고, 러시아의 관심을 아시아에 묶어 두려는 독일의 의도가 합치한 결과이다.

삼국 간섭으로 일본은 뤼순다롄에서 후퇴한 반면 삼국은 청나라로부터 새로운 이권을 얻었다. 특히 러시아는 1898년 뤼순다롄을 강제 조차해 뤼순항에 극동함대를 주둔시켰고, 조선에서는 친러세력이 힘을 얻었다. 그러나 복수를 결심한 일본은 러일전쟁(1904-1905)에서 승리해 1905년부터 1945년 8월 24일까지 뤼순다롄을 경영하게 됐다. 이후 러시아는 1945년 8월 24일 패망한 일본을 몰아내는 해방군으로 뤼순다롄에 다시 입성해 1955년까지 주둔했다. 결국 뤼순다롄에는 일본과 러시아가 각각 두 번 씩 들어왔던 셈이다.

광장 많은 다롄

러시아 거리를 나와 10분 남짓 걸으니 다롄역이 자리 잡은 승리광장이다. 러시아가 도시를 설계한 다롄에는 성해광장, 중산광장, 우의광장, 승리광장 등 광장이 유달리 많다. 다롄역에서는 가깝게는 뤼순과 단둥, 지린성(吉林省) 옌지(延吉), 투멘(圖們), 헤이룽장 성(黑龍江省) 하얼빈(哈爾濱), 자무쓰(佳木斯), 치치하얼(齐齐哈尔), 네이멍구 자치구(內蒙古自治區) 만저우리(滿州里) 등으로 여객 열차가 드나들어 여기가 중국 둥베이(東北)의 교통 요충임을 말해 준다. 열차역 바로 옆 항구에서는 산둥반도(山東半島) 옌타이(烟台)와 웨이하이(威海)로 가는 여객선이 하루 여러 차례 입출항한다. 승리광장을 벗어나 다시 10분 남짓 걸으니 중산광장이다. 길게 이어진 먹자골목과 노점상 골목을 지나니 호텔이다. 


3일차 (다롄 → 서울)

일본과 러시아의 경쟁

호텔을 나와 중산(中山)광장에 닿으니 일본식 건축물들이 광장을 에워싼다. 중산광장에서 이어지는 중산로(中山路)를 남행하니 일본식, 러시아식의 웅장하고 기품 있는 건물들이 번갈아 등장한다. 아직도 공공건물로 멀쩡히 활용되고 있다. 일본과 러시아 두 나라가 경쟁적으로 다롄에 공을 들인 흔적이다. 간단치 않은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자취가 다롄에 고스란히 집적돼 있다.

계속 버스를 달려 다롄 시내에서 40km 떨어진 뤼순(旅順)에 도착했다. 우리나라 경상남도 진해를 닮은 고즈넉한 도시지만 열강이 각축했던 치열한 현장이다. 지금은 중국 해군 함대가 사용하고 있는 뤼순항 또한 러시아- 일본으로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안중근과 뤼순 감옥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1910. 3. 26) 뤼순 감옥을 방문했다. 약 8000평 부지를 가진 거대한 감옥이다. 한국 뿐 아니라 중국의 수많은 항일 애국지사들이 순국한 뤼순감옥은 중국의 애국교육현장이기도 하다. 감옥 부지 내 외진 귀퉁이에는 교수형장이 있다. 교수형당한 시신들을 나무 바구니에 넣어 아무렇게나 내버려 묻어버린 뒷동산에는 얄궂게도 신축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도 흔적 없이 그곳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이다.

뤼순 감옥에서 잠시 이동하니 관동(關東)지방법원이 나온다. 뤼순 일본관동법원 혹은 관동도독부(都督府) 고등법원 건물이다. 건물이 낡아서 다롄시 정부가 철거하려 했으나 한국의 안중근 기념사업회가 지켜냈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가 사형 언도를 받은 법정이 복원돼 있다. 당시 안중근 재판은 세계 언론이 주목했다. 중국에 발을 들여놓고 있던 영국(당시 홍콩 통치), 독일(칭다오 조차), 프랑스(상하이 조차) 등은 안중근 의거가 자신들과 관련성이 높은 사건으로 보고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뤼순 법원 한켠에는 일본이 사용했던 고문 도구가 전시돼 있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봤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참혹한 도구들이다. 일본이 유독 중국에서는 더욱더 잔혹했음을 말해 준다.

▲뤼순 감옥 터


러일전쟁 격전지

이어서 러일전쟁 격전지 203고지를 방문했다. 특히 뤼순다롄은 러일전쟁에서 가장 참혹한 육전(陸戰)이 벌어졌던 곳으로서 203고지에서만 1년 동안 일본군 1만 명, 러시아군 5000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안내판은 중국어, 러시아어, 일본어, 한국어로 표기돼 있어 동아시아 근현대사에서 이 전쟁이 차지하는 의미를 말해 준다.

육지뿐만 아니라 바다에서도 처절한 전투가 이어졌다. 제물포 앞바다 해전에서는 일본이 러시아 극동함대를, 쓰시마 해전에서는 90일 동안 지구 반바퀴 2만9000km를 돌아 지친 발트 함대를 격침하면서 일본에 최종 승리를 안겨다 줬다. 1년 가까이 계속된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8만 명(추산), 러시아는 4만 명(추산)의 전사자를 냈다. 두 배의 희생자를 내고도 오히려 일본이 이긴 이상한 전쟁이기는 하지만 이로써 동아시아의 판도는 일본을 중심으로 완전히 재편됐다.

오랫동안 뇌리에 맴도는 여행

다롄 시내로 나와 늦은 점심 식사 후, 공항에 나가 인천행 항공기를 기다린다. 당초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2박 3일의 각박한 일정으로 계획했던 것이 후회될 정도로 다롄단둥 여행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볼거리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줬다. 백여 년 전 동북아시아 근현대사의 거대한 흐름 한 복판을 관통하고 온 느낌이다. 영웅호걸과 수많은 시민들, 군인들의 운명이 이곳에서 바뀌었듯 우리 민족의 운명 또한 비극을 향해 한 걸음 더 빠져드는 계기가 만들어진 곳이다. 서울에서 항공기로 불과 한 시간 거리에서 열강이 격돌했던 만큼, 구한말 조선은 역사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북 분단의 아픈 현실을 확인한 것도 이 여행이 두고두고 뇌리에 남아 있는 또 다른 이유일 것이다.

(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정리 = 이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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