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사할린3세 돕고, 日은 유해 찾고 임금 돌려줘야”
신윤순 사할린 강제동원 억류희생자 한국유족회장
▲사할린 강제동원 억류희생자 한국유족회 신윤순 회장. 사진 = CNB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최정숙 기자) 신윤순(70) 회장을 처음 만난 곳은 3월2일 새누리당 이명수 의원실이었다. 이 의원과 인터뷰를 끝내고 나오자 신 회장이 앉아 있었다. 그는 지난달 의원회관에서 열린 광복 70주년 기념 ‘사할린 강제동원 자료 전시회 - 화태에서 온 편지’를 주관한 사할린 강제동원 억류희생자 한국유족회장이다.
수수한 차림의 신 회장 옆에 손수레가 놓여 있었다. 전시회 관련 자료를 다른 의원실에 돌리고 온 모양이었다. 신 회장과 CNB의 인터뷰는 ‘준비 안 된 즉석 인터뷰’였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포기않는 그의 얘기가 듣고 싶었다.
“다른 분들은 사할린 쪽에 큰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어요. 이명수 의원께서 일제 때 강제 동원 피해자의 아픔을 공감해주셨죠. 이번 전시회에 국내 최초 입수 자료들이 있습니다. 문서를 입수하고 이를 국민들에게 알리고 싶었어요. 일본이 어떤 나라인지 후손에게 교육시켜 다시는 쓰라린 고통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의원께 부탁했습니다. 원래는 안전행정위원회가 할 일입니다. 소속 상임위도 다른 이 의원이 유족의 아픔을 공감해줘 사진 전시회를 열게 됐습니다.”
“일본은 사할린을 40년 동안 점령했어요. 한국은 36년 동안 식민지로 지배했고요. 사할린 땅을 파면 석탄, 가스 등 천연자원이 많이 나와요.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기 위한 노동자가 필요했고요. 조선인들을 강제 징용했습니다. 그 숫자가 3만 명이라고 합니다. 3만 명의 배우자 내지 자녀들이 아버지를 찾아 사할린에서 함께 살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이로 인해 4만 3000여 명이 억류됐다는 것이 학계의 통계입니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은 사할린에서 철수한 반면 한국인은 철수하지 못했습니다. 모두 나가면 일할 사람이 없으니까 소련이 못 나가게 했습니다.”
신 회장의 부친은 1943년에 강제징용 됐다.
“제 아버지는 1943년 10월 30일 전북 임실군에서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 당했어요. 연해주와 달리 사할린은 이주하지 않았습니다. 강제 동원만 했죠. 일본이 점령했으니 이주를 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해방과 동시에 사할린에 있던 사람들을 한국으로 보냈으면 슬픈 역사가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노동력이 부족한 소련(현 러시아)이 강제 징용자를 잡아놨어요. 강제 징용자의 아내와 12살 아래 아이들만 출국을 허락했죠. 부인과 아이들은 나온 사람이 좀 있어요.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남편이 붙잡혀 있는데 나올 가족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러다 지금까지 온 겁니다.”
일제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통해 일왕에 충성을 강요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사할린 동포들의 일본 국적을 박탈하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힘없는 한국은 이들을 데려오지 못했다.
“일본인에 의해 끌려가 강제노역을 당하고 임금도 못 받았습니다. 끌고 갈 때는 황국신민이라고 했습니다. 당시는 다 일본 사람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일제가 조선 사람들 다 끌어가고 해방과 동시에 철수할 때는 황국신민이 아니라며 모른 척 했습니다. 1943년에 끌려간 저희 아버지는 45년 해방 이후에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1950년 6ㆍ25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아버지와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이후 연락이 끊겼어요.”
신 회장의 부친은 처음엔 징용을 가지 않기 위해 도망갔다고 한다. 하지만 이내 붙잡혔다.
“26살 아버지, 결혼 열달만에 17세 어머니와 생이별”
“저희 아버지는 처음 징용장이 나왔을 때 도망갔어요. 그래서 아버지의 아버지, 즉 우리 할아버지가 엄청 매를 맞았어요. 일본인들이 마구 때렸죠. 두 번째 징용장이 나왔을 때는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저희 아버지 나이가 26살, 어머니가 17살이었어요. 결혼한 지 10개월 만에 생이별한 거죠.”
신윤순 회장의 부친은 신완철, 모친은 박봉례 씨다. 신 회장은 부친이 강제 징용된 다음해인 44년에 태어났다.
“제가 17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할아버지가 숨을 거두시기 전 아버지의 사할린 주소가 적힌 편지봉투 한 장을 주셨어요. 그때 할아버지가 ‘나는 나이가 많아서 아들을 못 만나고 간다. 하지만 딸인 너는 아직 나이가 어리니까 좋은 세상 만나거든 이 편지 갖고 아버지를 반드시 찾아라’라고 말씀하셨어요. 할아버지의 유언이죠.”
할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신 회장은 22살 때 편지봉투를 들고 외교부를 찾아갔다. 1974년에는 사할린 한인들의 가족 재회와 영구 귀국을 도운 대구 중소이산가족회에 회원으로 등록했다.
“가서 아버지를 찾아달라고 했어요. 외교부 담당자가 편지봉투는 가져가고 거기 적힌 주소를 적어줬어요. 그 뒤로 23살에 결혼하고 아버지 찾는 일을 잊어버리듯 했죠. 1974년도 8월 한 일간지에서 사할린에 있는 아버지 기록을 봤어요. 중소이산가족회에 등록 하고 아버지 찾는 일을 했죠. 아버지를 찾기 위해 편지봉투를 들고 안 가본 곳이 없어요. 고향에 있는 사람한테도 연락해보고, 사할린 현지 신문에 광고도 해보고, 안 해본 것이 없습니다. 아직도 생사는 몰라요. 하지만 포기는 하지 않습니다. 유해만이라도 모셔오겠다는 것이 제 소원이니까요.”
신 회장은 사할린 현지인에게 위임해 2013년 아버지 흔적을 확인했다. 1950년 아버지와 함께 회사를 다닌 사람을 찾았다. 우여곡절 끝에 노동증명이라는 문서를 통해 아버지 관련 기록을 찾았다. 그 문서를 갖고 당시 예결위원장이었던 새누리당 이군현 의원을 찾아갔다. 사정 얘기를 했고 문서 입수 예산을 배정 받았다. 그렇게 처음 문서들을 전시하게 됐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일본에 간 줄 알았어요. 사할린에 간 줄 모르고. 2009년에 피해자 판정을 받았는데 위로금 지급이 안 되더라고요. 1945년 이전에 사망한 사람들은 위로금을 주는데 광복 이후 사람들은 안 준다고 해요. 그때부터 입법 개정운동을 했어요.”
신 회장이 진정 바라는 것은 뭘까. 그는 “강제 징용자의 유해를 봉환해 일제 희생자 묘역을 조성한 뒤 모셔달라”고 말했다. 현재 사할린 공동묘지의 전수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1차에서 3차까지 한 상태다.
“올해 예산은 있지만 러시아 정부의 반대로 못 가고 있습니다. 전수조사를 하면 강제 동원 피해자 숫자가 나올 겁니다. 이 유해를 발굴해 유전자 검사를 하고 한국에 보내 유족을 찾아달라는 것이 저희가 바라는 것입니다. 현재 영구 귀국자들은 정부가 지원해줍니다. 국내 희생자 유족들도 영주 귀국자와 동일하게 지원해줬으면 합니다. 현재 사할린 희생자의 배우자들이 200명 정도 살아 있습니다. 나이는 90~95세입니다. 더 늦기 전에 정부에서 이 분들에게 최소한의 의료지원을 해줬으면 합니다.”
사할린 1세는 생존자가 거의 없다. 2세를 거쳐 3세들은 언어소통이 안 된다. 겉모습은 한국 사람이지만 문화와 언어적 사고는 러시아 사람이다. 이 사람들에게 부모님 나라를 잊지 않도록 교육을 시켜야 한다.
“사할린 3세는 소중한 한국의 자산”“이 사람들도 정말 중요한 국가 자산입니다. 조국을 잊지 않도록 돌봐줘야 합니다. 대한민국이 1세들은 지켜주지 못했지만 3세들은 조국을 잊지 않도록 해줘야 합니다. 한국에 살 수 있도록 해줄 수 없다면 교육이라도 시켜서 한국 사람을 만들어야 합니다.”
신 회장이 강제 징용을 자행한 일본 정부에게 바라는 것은 뭘까.
“일본 정부에 요구하고 싶은 것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찾아 유령비를 세워달라는 것입니다. 미지급 우편저금도 반환하길 바랍니다. 아버지가 43년에 끌려가서 45년까지 일했습니다. 총각으로 끌려간 사람은 통장을 구경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라도 돌려주길 바랍니다.”
일제는 조선인에게 강제 저금을 시켰다. 그러나 아직까지 예금을 돌려주지 않고 있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조선인들에게 돌려주지 않은 우편저금은 59만 계좌로, 잔고는 1억 8700만 엔이라고 한다(1997년 3월 기준).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살아 있는 분들이 거의 없습니다. 이 분들이 돌아가시면 사할린 역사도 묻혀버릴지 모릅니다. 아직도 저희 어머니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버지 기록 찾기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사할린강제동원피해 문제 해결사로 나선 신윤순 회장. 그는 인터뷰가 끝나자 남은 자료를 돌리기 위해 손수레를 끌고 다른 의원실로 향했다. 의원회관을 순회하는 그의 뒷모습에서 애잔함이 느껴졌다. 그의 노력이 광복 70주년에는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
최정숙 기자 most_silent@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