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색으로 청량감을 뽐내던 잎사귀가 빨갛게, 노랗게 색을 달리하며 가을맞이에 한창 바쁜 요즘, 한 전시장엔 분홍색,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 등 형형색색의 장미가 한가득 꽃봉오리를 맺어 눈길을 끈다.
갤러리 그림손이 장미 작가 심명보의 개인전을 마련했다. 장미를 꾸준히 그려온 심 작가는 일명 ‘장미 작가’로 통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장미를 그린 건 아니다. 실험적 추상 그룹에 속해 활동을 하다가 전업 작가로 돌아서면서, 국적과 나이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사랑하는 대상인 꽃에 흥미를 가졌다. 수많은 꽃 중 바이올렛, 캘리포니아 퍼피, 장미를 그리고 싶었고, 첫 대상으로 택한 장미에 푹 빠져 현재까지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장미는 남녀노소 전 인류가 가장 사랑하는 꽃 중 하나입니다. 저는 예술이 인간 문화에 깊숙하게 개입해 환경을 밝게, 아름답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름다움과 동시에 행복감을 전해주는 장미가 제 생각을 잘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익숙하고 친숙한 소재는 다가가기 쉽다는 장점이 있지만, 반대로 특색 없이 너무 평범해질 수 있는 단점도 있다. 그래서 장미가 가진 행복감과 아름다움, 생명력은 살리되 평범한 방식을 피한다. 처음엔 수채화로 그리다가 장미를 커다랗게 그리기 시작했고,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신작 ‘히든 로즈(Hidden Rose)’에서는 추상적인 느낌을 더했다.
일단 장미를 크게 그리기 시작한 이유는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이다. 어머니가 쌀을 주고는 튀겨 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분명 쌀을 조금 가져갔는데 튀기자 한 자루가 됐다. 그 양에도 놀랐지만, 손톱보다도 작은 쌀이 튀겨지자 마치 하얀 꽃과 같이 부풀어 오른 모습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또 어릴 땐 그 모습이 마법 같기도 했다. 심 작가는 “작은 것이 커지는 데서 오는 감동이 있더라. 그 경험이 떠올라 장미를 뻥튀기 해보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또 눈길을 끄는 ‘히든 로즈’는 반대로 장미를 크게 드러내기보다 숨겼다. 장미를 뒤에 숨기고, 캔버스 전면에 흰색을 채웠다. 그 흰색 틈 사이로 장미의 화려한 색이 언뜻언뜻 보여 호기심을 자극한다. 심 작가는 “올해 처음으로 선보인 ‘히든 로즈’는 현재 이어가는 장미 작업, 그리고 이전에 추상 그룹에서 했던 추상 작업의 결합”이라며 “항상 정체돼 있지 않는 것이 예술의 묘미”라고 짚었다.
“95년엔 꼭 액자 안에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굴곡진 액자 틀에까지 장미를 그렸습니다. 여건이 된다면 이 액자 틀도 벗어나 벽까지 이어지는 대형 작업을 시도해 보고 싶어요. 전시장 벽 그리고 기둥, 천장까지 장미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더 나아가서는 전시장도 벗어나 하늘 위에서도 내려다보이는 장미를 구현하고 싶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아름다운 장미를 보고 행복을 느꼈으면 하는 게 저의 가장 큰 바람입니다.”
전시장 한 벽면에선 작품으로 이뤄진 그의 회고록도 만날 수 있다. 캔버스 속 얼굴이 장미로 된 인물은 장미를 사랑하는 작가의 자화상이고, 조리 도구와 삽에 그려진 장미는 그동안 작업을 이어오며 그가 해왔던 도전들을 상징한다. 약간 캔버스가 불에 그을린 작품도 있는데 작가로서 살아오며 겪은 역경과 고난을 말하고, 햇빛을 받으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장미는 그런 역경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장미를 사랑하는 작가의 마음을 드러낸다.
“장미 이외 다른 꽃을 그려볼 생각은 없냐고들 많이 묻는데, 전 장미와 결혼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래는 장담할 수 없지만, 지금은 주제를 바꿀 생각이 없어요. 제가 포착하지 못한 장미의 아름다움과 행복감도 아직 무궁무진하게 많다고 생각하고요.”
‘장미가 언제 잘 그려지냐’고 묻자 심 작가는 “늘 마음에 품고 있다”고 답했다. 그의 말처럼 장미는 이제 그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느껴졌다. 아직 끝나지 않은, 더 보여주고 싶은 것이 많은 작가의 바람 속 아름답게 피어오를 장미의 향기가 벌써부터 느껴지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