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애규 ‘푸른그림자’전 vs 인자오양 ‘한산(寒山)’전
▲한애규, ‘푸른그림자’. 설치 전경, 세라믹, 2014. 사진 = 아트사이드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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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저널 = 김금영 기자) 여기 대자연을 마주한 두 인간이 있다. 한애규 작가는 넓고 푸른 바다, 인자오양 작가는 높고 거친 산 앞에 섰다. 둘은 이곳에서 자아를 발견했다. 대자연 속 인간의 자아와 그 존재에 질문을 던지는 두 작가의 닮은 듯 다른 전시가 흥미롭다. 알 수 없는 이끌림에 현장을 방문해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봤다.
바다 그림자에서 자아발견
한애규 작가의 ‘푸른그림자’전
‘푸른그림자’전이 펼쳐지는 전시장은 1층과 지하가 사뭇 다른 느낌이다. 1층에서 잔잔한 물결에 발을 살짝 담근 느낌이라면, 지하는 아주 깊은 심해 속을 헤엄치는 기분이다. 아마 지하에 크게 자리 잡은 청량한 푸른빛의 ‘푸른그림자’ 설치물 때문인 듯하다.
한애규는 테라코타(terra cotta: 점토를 구운 것)로 만들어진 여인상 작업으로 잘 알려졌다. 작가 자신도 한 여성으로서, 만물을 생성케 하는 땅과 같은 풍만한 모습의 어머니, 주체적인 여성의 삶을 주로 표현해 왔다.
그런데 이번 전시는 그 연장선상에 있지만 조금 다른 느낌이다. 이전 테라코타 작업에서 불그스름한 빛깔이 강인한 모습을 띄었다면, 이번 전시의 중심 테마는 푸른 빛깔로 침착한 느낌을 살렸다. 기존 작업의 일환인 여인의 반신상도 등장하지만, 붉고 강한 느낌에서 하얗고 다소 쓸쓸해 보이는 이미지로 탈바꿈했다. 푸른 빛깔과 조화를 이루고자 한 작가의 의도다. 그리고 이 모든 바탕엔 작가가 마주한 바다가 있다.
이번 전시의 첫 시작은 작가가 바다에서 발견한 그림자로부터 이뤄졌다.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바닷가를 거닐다가 우연히 물속에 드리워진 자신의 그림자를 봤다. 출렁이는 물결에 흔들리는 그림자는 땅 위에서의 검은색이 아닌, 물에 투영된 푸른빛으로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정처 없이 마구 흔들리면서도 작가를 놓치지 않고 따라왔다. 작가는 이를 ‘푸른그림자’라는 글에서 “어떠한 미물도 실존하는 것은 그림자가 있다. 우리가 실존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때, 우리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서의 그림자가 있다”고 설명한다.
말인즉슨, 세상을 살아가며 이런저런 많은 일에 흔들리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존재하고, 그 증거로서 그림자가 자리한다는 것이다. 이 그림자의 존재를 작가는 돌조각으로 옮겼다. 아래는 하얗고, 위는 푸른 물결 형태인 조각상은 위의 표면이 계단처럼 층지어져 있어, 조각이지만 물결이 출렁이는 듯 생동감이 있다. 옆에서 보면 바다의 흙과 물을 삽으로 퍼낸 듯한 이미지다.
이혜미 아트사이드 갤러리 매니저는 “작가의 작품은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이뤄진 자기 고백적이고 문학적인 특징을 지녔다. 오랫동안 독서와 여행을 통해 얻은 경험과 생각들을 바탕으로 표현한 일기와도 같은 성격을 보여준다”며 “이번 전시에서도 최근 여행의 경험을 담았으며, 그 서술적인 특징은 특히 부조 작품들에서 두드러진다”고 말했다.
▲흐르는 세월 속에서 느끼는 고독과 외로움을 표현한 ‘세월’ 옆에 한애규 작가가 자리했다. 사진 = 김금영 기자
이어 “작가는 그림자에서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했고, 이 그림자의 정체성을 보여주고자 전시명을 ‘푸른 그림자’가 아닌 고유 명사로서의 ‘푸른그림자’로 정했다. 푸른그림자는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자, 작품을 보는 이의 자화상이 될 수도 있다”며 “자신의 정체성과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들을 작품을 통해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전시는 아트사이드 갤러리에서 12월 29일까지.
한애규 “물결 위 그림자처럼 흔들리는 인생”
한애규 작가는 일찌감치 전시장에 도착해 자신의 작품을 둘러보고 있었다. 작품 옆에 서 있는 작가의 모습을 보고, 그 차분하고 청량한 느낌이 작품과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들려주는 작업 이야기는 마치 넓고 푸르른 바다로 여행을 떠난 듯한 느낌을 들게 했다.
- 이번 전시는 푸른빛이 특히 감도네요. 작업에 변화를 준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75년부터 흙을 만져 어언 40년 동안 작업을 이어왔어요. 그 반복되는 과정이 저도 지루했고, 보는 이들도 지루할 수 있겠다 싶어 새로운 변화를 주고 싶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대형 작업을 하는 데 부담도 느꼈고요. 무언가 색다른 것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모색했어요. 그 결과 이번에 주목한 게 물결 위 그림자입니다.
이전부터 물을 소재로 한 작업은 있었어요. 1993년부터 생명을 잉태하는 물의 이미지를 주제로 다뤘죠. 그림자 이야기는 베이징 페어에서도 다뤘습니다. 길을 걸어가다가 발견한 제 그림자 등 허망한 모습을 주로 표현했죠. 그런데 이번엔 제 이야기를 더 많이 털어놓고 싶었어요.”
- 그 중에서도 왜 푸른색이었나요?
“어렸을 때부터 분홍색과 파란색 중 어떤 색이 더 좋냐고 물으면 바로 파란색을 골랐어요. 푸른빛만이 가진 그 외로운 느낌이 좋았거든요. 영어로도 ‘블루(blue)’는 파란색뿐 아니라 우울하고 쓸쓸한 의미를 함께 내포하고 있죠.
이렇게 원체 푸른색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여행하며 마주한 바다에서 느낀 영감이 특히 컸어요. 넓고 광활하게 펼쳐진 푸른 빛깔 속 제 그림자가 유독 눈에 들어왔거든요. 푸른빛의 테마에 맞추기 위해 여인상도 하얀 색으로 작업하는 등 신경을 썼습니다. 푸른빛에 본래 테라코타 작업에서의 붉은색을 함께 들여 놓으면 너무 강한 느낌이 돼 부자연스러울 것 같았거든요.”
- ‘푸른그림자’ 작업을 할 때 특히 영감을 준 바다가 있나요?
“베네치아에 갔을 때 특별한 느낌을 받았어요. 과거 매우 영화로운 곳이었지만, 지금은 그 영광을 과거로 간직한, 그 변해가는 정체성의 쓸쓸한 모습이 푸른빛만의 외로운 느낌과도 잘 맞닿는다고 느꼈죠.
하지만 바다가 이번 제 작업에 중요한 모티브가 됐지만, 절대적으로 어디인지가 중요한 건 아니에요. 보는 이에 따라 제주도의 바다가 될 수도, 오지의 바다가 될 수도 있죠. 그곳에서 느낀 자신의 존재, 그것이 제가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오징어 조각상도 보이는데, 특별한 의도가 있나요?
“저건 저도 예상 못한 작업이에요(웃음). 하면서 굉장히 재미있기는 했는데, 전시장에 들여놓고 저도 고개를 갸우뚱 했어요. 그런데 마침 바다의 느낌을 가진 ‘푸른그림자’ 설치와 어울리더군요. 재미있다는 반응이 대체적이에요.”
- ‘푸른그림자’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저는 제 작품을 이렇게 보고 느끼라고 강요하는 타입이 아니에요. 감상자가 보는 대로 느끼는 게 중요하죠. 다만 저는 바다에서 발견한 그림자에서 느낀 저의 존재 그리고 삶에 대한 이야기를 작업에 담았어요. 그런데 이건 감상자의 존재이자 삶이 될 수 있습니다.
‘푸른그림’ 조각상은 의자처럼 위에 자유롭게 앉아볼 수 있도록 설치했습니다. 본래는 제 그림자였지만, 다른 사람이 그 조각상 위에 앉음으로써, 그 그림자는 그 사람의 그림자가 되기도 하는 거죠. 이렇게 변하기도 하고, 거센 물결에 흔들리기도 하는 게 바로 우리네 그림자이자 인생사 아니겠어요?”
거친 산 숨결에서 자아발현
인자오양의 ‘한산(寒山, Cold Mountain)’전
거친 산의 숨결이 전시장에 펼쳐졌다. 중국 현대 미술 작가 인자오양의 개인전 ‘한산(寒山)’ 현장이다. 전시명처럼 차갑지만, 거침없이 솔직한 모습을 드러낸 산의 모습이 적나라하다.
하지만 2011년 같은 전시장에서 그는 산이 아닌 인물을 보여줬다. 인물화를 그린 뒤 이를 뭉개듯이 다시 그린 ‘매니악(Maniac)’ 시리즈로 주목 받았다. 1996년 베이징 중앙미술대학 판화과를 졸업한 작가는 현실주의적 기법과 비극적이고 영웅주의적 색채로 알려진 중국 당대 미술의 작가 중 한 명으로서 활동해왔다. 20세기 말 중국이 처한 폐쇄적 사회 구조 현실에 대한 불만과 자유에 대한 갈망들을 작품으로 보여줬다.
▲인자오양 작가의 ‘한산(寒山)’ 전시장 설치 전경. 사진 = 더 페이지 갤러리
하지만 2015년 현재, 작가는 중국 전통 미술의 ‘산수(山水)’라는 새로운 주제 아래 산의 다양한 모습을 전시장에 풀어놓았다. 직접 산을 보고 경험하며, 이 과정에서 느낀 솔직한 감정과 더불어 자신의 자아를 그림에 담았다는 설명이다.
보통 산이라고 하면 푸른 잎을 간직한 울창한 숲의 이미지를 연상할 때가 많다. 그런데 그의 산수엔 가파르게 깎여진 절벽, 고독한 듯 자태를 뽐내는 나무들이 그려져 있다. 휑하고 무언가 불길한 느낌까지도 들게 한다. 하지만 포장되지 않은, 그래서 가식과 거짓 없이 깨끗한 그 이미지가 오히려 더 강렬한 인상을 준다.
작가는 직접 산 속으로 들어가 사계절을 겪으며 자연의 변화를 느꼈다 한다. 그리고 보는 경관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심상을 담아 산을 새롭게 재해석했다고.
더 페이지 갤러리 측은 “작가는 몇 년 간 몸소 산을 올라 그 속에서 자연과 호흡하며 대화를 시작했다. 그는 단순히 자연 경관의 절경을 담는 게 아니라, 더 나아가 자신이 품은 메시지, 사상, 철학 또는 감정의 모습들을 전달하려 했다”며 “이는 작가 자신이 그려내려 한 예술적 방향을 특정 대상이 아닌 커다란 대자연 속에서 봤음을 나타낸다”고 밝혔다.
▲자신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한 인자오양. 사진 = 김금영 기자
이어 “전시장 각각의 공간에 놓인 작품엔 때론 따뜻함도 차가움도 존재한다. 작가가 산을 그렸을 당시 변화 가득했던 솔직한 감정을 담았기 때문”이라며 “이번 전시가, 작가가 가졌던 복합적이면서도 여과 없는 표현의 결과물을 공유하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전시는 더 페이지 갤러리에서 2016년 2월 28일까지.
인자오양 “뭘 좋아하는지 찾는 게 자아발견”
미소를 별로 볼 수 없었지만 강직하고 굳건해 보이는 인자오양 작가는 그가 그린 산과 매우 닮아 있었다. 그에게 작업이야기를 들어봤다.
- 2011년 주목받은 ‘매니악’ 시리즈에서 산수화로 변화를 거쳤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특별한 계기가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어느 날 산을 봤고, 문득 그 산에서 제 자아를 발견했습니다. 인위적이 아닌, 아주 자연스럽게 이뤄진 과정이었어요. 제 모든 것을 표현하고 이야기하는 데 자연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해서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소재가 바뀐 것일 뿐, 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같았어요.
2011년 ‘매니악’ 작업과도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매니악’ 시리즈의 마지막이 완성될 즈음 제가 마흔 살이었습니다. 그런데 마흔 이후로는 새로운 자아를 만들고 보여주는 작품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그 과정에서 풍경 시리즈가 도입된 것입니다. 5년 가까운 시간 동안 풍경을 그리며 더 자유로워진 것은 분명하지만 맥락은 같습니다. 제 삶을 바라보고, 그 속에서 생겨나는 복합적인 감정들을 표현하는 것, 그 주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 산을 굉장히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평소 등산도 자주 하나요?
“시간 날 때마다 가는 편입니다. 거의 매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누구와 함께 가는 것보다는 혼자 가는 걸 좋아해요. 산을 오르면 마치 다 같은 산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분명히 산마다 스타일과 정체성이 달라요. 마치 우리 모습처럼요. 이런 산의 모습이 특히 제 마음을 투영하는 데 가장 적합한 장소라는 느낌이 들어 자주 찾아갑니다.”
- 특히 영감을 받은 산이 따로 있나요?
“꼭 중국의 산만을 그리려 한 것은 아닌데, 여건상 제가 살아온 환경에서 중국의 산을 많이 간 것 같네요. 그런데 작품의 소재가 어디인지는 사실 제게 중요하지 않아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자아를 발견했는지가 중요하죠.”
- 산에서 발견한 자신의 자아는 무엇인가요?
“작가로 활동하면서 제 자아에 대해 많은 생각과 고민을 했습니다. 그 결과 현재까지 제가 느낀 건, 작품 활동을 하면서 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자아의 발견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늘 곁에 존재하는 자연을 매일 방문하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꼈고, 계속해서 조금씩 바뀌는 자연의 모습과 함께 변해가는 제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렸고, 그렇기에 제 그림엔 제 자아가 이미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자아를 이야기한다고 하는데, 그림 속에 사람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데요?
“오히려 사람이 없는 풍경 속에서 역설적으로 그 안에 숨어 있는 인간의 감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자연은 완전히 둘로 나뉘지 않고, 항상 관계를 갖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죠.”
- 사계절 산의 모습을 그렸는데, 특히 선호하는 계절이 있나요?
“각 계절마다 산의 모습이 가진 개성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어떤 계절의 산이 좋다고 특정 지어 이야기하긴 힘들 것 같네요. 다만 중국 회화에서 겨울 산을 묘사하는 건 최고의 경지이자, 철학적 세계를 담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 추후 작업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전 항상 자아를 인식하고, 이를 표현하는 과정에 관심을 갖고 그려왔습니다. 이번엔 그 표현 방식으로 산수화가 쓰였고요. 옛 전통 방식도 현 시대에 맞게 쓰이려면 변화를 거치는 것처럼 표현 방식은 바뀔지 몰라도 이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김금영 기자 geumyou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