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아티스트 - 정희경] 한지 창호에 비친 불빛처럼 은은한…
(CNB저널 = 전준엽(미술평론가·화가)) 미술은 아름다움을 만드는 기술이다. 그렇다면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는 우선 보기에 좋고, 오래 보고 있어도 싫증나지 않으며, 언제 보아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재단하는 기준은 시대와 환경, 나라에 따라 달라져 왔다. 이에 따라 일반적으로 아름답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에서도 아름다움의 새로운 가치를 찾으려는 예술가들의 시도와 노력이 꾸준히 있어 왔다.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미술로 넘어오는 가교 역할을 했던 천재 화가 카라바조는 추한 인물을 통해 아름다움의 진정한 실체를 찾으려고 했고, 낭만적 사실주의 화가로 평가되는 제리코도 토막 난 동물의 사체를 대상으로 새로운 아름다움의 가치에 다가서려는 실험적인 시도를 했다. 스위스 상징주의 화가 뵈클린은 죽음의 모습에서 괴기스러운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그런가 하면 20세기 독일의 판화가 콜비츠는 가난과 굶주림의 고통에서 아름다움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으며, 영국 포스트모더니즘 회화를 이끈 베이컨은 마약과 동성애, 폭력으로 버무려져 뒤틀린 인간상에서 끔찍한 아름다움의 모습을 제시하기도 했다.
▲Whispering Light, 73 x 60cm, 캔버스에 오일.
그러나 이러한 시대 흐름과는 무관하게 우리 곁에서 꾸준하게 가치를 지켜온 아름다움이 있다. 너무나 익숙해서 진부하며 그래서 그 위대한 가치의 소중함마저 잊게 만드는 아름다움. 흡사 공기와도 같은 이러한 아름다움을 우리는 ‘보편적 아름다움’ 혹은 ‘절대적 아름다움’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세상이 아무리 숨 가쁘게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다. 탄생이나 죽음의 수수께끼, 사랑이나 선이 지닌 본성적 가치, 자연이 일깨워주는 절대 가치, 일출이나 일몰, 달의 순환이 보여주는 절대 감정 같은 것이다. 희망에 대한 생각도 여기에 속한다.
정희경의 회화가 품어내는 아름다움도 이 지점에서 만날 수 있다. 희망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회화이기 때문이다.
▲Whispering Light, 53 x 61cm, 캔버스에 오일, 2015.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예술가들이 매력적인 주제로 삼았던 희망은 그만큼의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향한 예술가들의 구애에는 변함이 없다. 그것은 희망이 인류에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의 뿌리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희망은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다. 그런 만큼 표현의 다양함을 허락하는 흥미로운 예술적 주제가 될 수 있는 셈이다.
정희경은 희망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그는 빛으로 해석하고 있다. 휘황찬란하거나 장엄한 빛이 아니다. 수줍고 겸손한 태도로 빛에 접근하고 있다. 빛이 속삭이듯이 은은한 표현이다. 희망을 향해 토닥이는 부드러운 손길 같은 빛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뚜렷한 이야기가 보이지 않는다. 구체적 형상이나 강렬한 색채가 없다. 온화한 추상에 가까운 표현 방법을 택하고 있다. 이는 작가의 심성과도 맞닿아 있는 듯하다.
힘주어, 형상으로 말하지는 않아도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두드러지지 않기에 그의 그림에는 메시지가 분명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 탓에 눈길을 사로잡는 시각적 충격 요소가 없다. ‘희망은 이런 것이고 여기에 있으니 나를 따르라’고 소리 지르지 않는다. 조근 조근 낮은 소리로 말하며 등을 도닥여주는 어머니 손길 같은 호소력 짙은 희망의 모습이다.
▲Whispering Light, 73 x 60cm, 캔버스에 오일.
구체적 메시지나 분명한 형상이 없는 그림이기에 정희경의 작업은 ‘읽는 회화’가 아니라 ‘느끼는 회화’다. 이에 걸맞게 표현 방식도 추상적 방법을 따르고 있다.
그의 최근작에 매력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타원형의 구성이다. 마치 달걀을 연상시키는 원이 화면을 그득 채우고 있다. 작가는 천사의 날개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이런 구성을 택하게 됐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작품은 두 점이 한 쌍을 이루며 대련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변형된 하트를 떠오르게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원 안에 파스텔 톤의 색채와 식물 형상으로 보이는 다양한 형태가 빚어내는 은은한 이미지들이다. 이들은 겹겹이 겹치면서 심도 있는 공간감을 만들어내는데, 마치 한지 창문으로 배어나오는 온화한 불빛 같은 분위기를 보여준다. 혹은 우리네 달 항아리에서 풍기는 다사로운 밝음이나 보름달이 보여주는 그윽한 빛 같은 느낌도 든다.
▲Whispering Light, 53 x 41cm x 2, 캔버스에 오일, 2015.
깊이감이 보이는 색채의 운용에서는 작가의 연륜이 묻어난다. 삶의 진솔한 경험이 축적되어 자연스럽게 스며 나온 감성이 아닌가 싶다. 작가가 자신의 진솔한 이야기를 감성적으로 풀어내기란 그리 녹록치는 않다. 그것도 구체적 형상이나 분명한 메시지를 빌리지 않고 순전히 회화적 방식으로 말이다.
회화는 눈으로 소통하는 마음의 언어다.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 다르다. 다른 만큼 언어가 필요하다. 지금은 똑 같은 소리의 세련된 함성이 세상에 가득하고 그 허황된 힘으로 시대를 끌고 간다. 이런 현실에서 아직은 작지만 자신의 소리로 말하는 정희경의 회화 언어가 은근하게 마음을 두드린다. 그것이 반가운 소리다.
(정리 = 최영태 기자)
전준엽(미술평론가·화가) babsigy@cnb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