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연수 기자) 앞선 시리즈에서 봤듯, 올해 미대 졸업생들의 작품전은 크게 물질적인 작업과 비물질적인 작업으로 나눠 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비물질적 작업의 방법으로서, 입체 조형에서는 장소의 특성이 강조된 설치작업, 평면은 영상 및 사진 작업으로 진행한 경향을 확인했다. 또한 입체, 평면 가릴 것 없이 공통적으로 눈에 띄는 경향도 있었으니 그것은 ‘텍스트의 사용’이었다.
각각의 작품 옆에 설명을 위해 붙여 놓은 A4 용지들의 글들을 다 읽어야지만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이처럼 직접적인 언어의 사용, 또는 음성이나 문자의 형태로 텍스트를 동원하는 것은, 비단 학생들의 작업에서뿐 아니라 현대 미술에서 자주 발견되는 트렌드이기도 하다.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미술 작품의 관람을 기대하고 방문한 관람객의 당황스러움을 작가들이 예상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이 언어의 직접적인 제시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텍스트의 사용들
‘텍스트(text)’라는 단어의 정의는 현재에도 사회과학, 문화연구, 심리학, 인문학 등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다뤄지고 있다. 많은 철학가들이 재정의하고 있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글에서 텍스트에 대한 정의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다만, 의미가 있는 구어 혹은 문어 등의 언어로 이뤄진 복합체 정도로 이해하기로 한다.
① 나열하기
학생들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텍스트의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었다. 그 첫 번째는 듣거나 읽을 때 맥락을 찾아 따라가기 힘든 언어나 문장의 나열들이다.
▲작품 1. 국민대 회화과 김송희, ‘프랭클린 이야기’, 멀티채널 비디오, 2015
작품 1. ‘프랭클린 이야기’ ‘프랭클린 이야기’는 일렬로 나란히 정렬해 놓은 TV 모니터에서 같은 영상이 시간차를 두고 돌림노래처럼 반복되는 것을 보여준다. 영상 안에는 구체적인 이미지와 더불어 글자로 된 문장이 보이고, 내레이션도 있다. 작가 김송희는 우리가 사용하는 텍스트(즉, 대화, 문학작품 등)는 맥락이 없고 의식의 흐름에 따라 이뤄지며, 사람들이 텍스트에 연속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의식적으로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녀는 그런 텍스트들 사이에 빈틈과 단절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빈틈들을 확대해 보여줌으로써 텍스트들이 연속되고 있다는 환상을 깨뜨리고자 한다.
‘금붕어가 뭐길래?! 무시하고, 금붕어를 사자’, ‘이기적인 개새끼!!, 금붕어 금붕어다’.(싱글채널 비디오 ‘Gold Fish’ 중)
▲작품 2. 서울대 서양화과 김한결, ‘코고는 소리 모터 기계’, 모터, 종이컵, 고무대야, 쓰레기통, 가변 크기
작품 2. ‘코고는 소리 모터 기계’ 엎어진 쓰레기통 위에 나무 패널이 올라가 있고, 또 그 위에 고무 통이 엎어져 있다. 고무 통 안에선 정말 코코는 소리 같은 모터 소리가 난다. 나무 패널에는 클램프(나무로 가구를 만들거나 할 때, 접합면을 조여 주는 고정 도구)들이 이리저리 설치되어 있으나 딱히 제 기능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것들은 마치 작업 중인 미술작가의 도구들을 아무렇게나 모아놓은 듯하다. 작가 김한결은 이원정(동료로 추측)과의 대화문을 통해 “완벽하지 않은 무엇인가의 뼈대와 과정을 그대로 전시장에서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설치작업뿐 아니라, 그와 동료가 나눈 대화의 내용과 그가 사유했던 흔적들을 인쇄된 문장으로 남겨 붙여 놓거나 가져갈 수 있도록 유인물 형태로 두기도 했다.
“아~ 근데 X나 나를 일괄할 수 있는 특징이라고 하면 X나 비관적인 거, 그렇다고 X나 비관적인 것도 아니고… XX, 난 뭐냐 X나 뭐라고 해야 하나 … 비관이라고 하기엔 적극적이지도 않고… 혼자 궁시렁 거리는 뭐… 근데 내 찌질함을 X나 보여주고 싶다…”(‘코 고는 소리를 만드는 모터 기계’에 대한 이와 김의 담화 중에서)
이들의 공통적인 믿음은 인간의 표현방식이 불완전하다고 믿는 것이다. 언어가 인간의 사유를 전달할 때, 언어 사이에 스쳐가는 혹은 저변에 깔려 있는 감정까지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완벽하게 전달되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듣고 읽는 사람의 경험과 공감에 의한 것이다. 이들은 작품에서 불완전성을 제시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생각을 시작하게 하고, 완벽하진 않지만 순간순간 놓쳐버리거나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낸다.
② 인터뷰 하기
인터뷰 형식의 텍스트 사용은 앞의 나열 형식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다. 그것은 순차적인 구성으로 되어 있으며, 등장하는 인물들이 말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목표와 주제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작품 3. 국민대 회화과, ‘새파란 아무개의 계획(완): 청춘을 말해다오’, 80분, 싱글 채널 비디오, 2015
작품 3. ‘청춘을 말해다오’ ‘청춘을 말해다오’는 작가 우지현이 기획하고 만든 토크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다. 작가는 청춘이라는 키워드에 상업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청춘의 고민은 20대를 겨냥한 자기계발서에서, 청춘의 열정은 ‘슈퍼스타 K’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소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만들어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청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에게 55만 8000원의 상금을 전달하기로 했다. 참가자들을 만나고, 후원자를 찾아다니고, 프로그램을 만들었던 일련의 과정들을 문서, 비디오, 그래프로 표현했다. 그녀는 이 과정을 통해 청춘이 고민하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중간지대를 찾고 싶었다고 했다.
▲작품 4.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박정우, ‘짐(Burden)’. 18분 54초, 2015
작품 4. ‘짐’ ‘짐’은 작가의 어머니와 두 이모들의 인터뷰를 담은 영상작업이다. 그들은 뜨개질을 하는 행위와 동시에 인터뷰를 한다. 작가의 어머니를 포함한 형제들은 예술을 시작했지만 활동을 지속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그 어려움의 원인인 환경적 요인, 편견, 다른 믿음 등의 중심에는 할머니가 있었다고 한다. 작가는 그들이 보고 겪은 예술과, 예술을 둘러싸고 있는 각자의 삶을 듣고자 했다. 이를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여성으로서 예술 하기’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하고자 했다.
의도적으로 선별한 것은 아니지만, 이 두 작업이 시작된 공통적인 동기는 현재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사회에서 꿈을 이루고자 했을 때 느꼈던 감상과 장애물 같은 것들이다. 이와 더불어 작가 자신을 사회적 약자(어리다, 여성)로 정의하는 경향이 있다.
한편, 그들이 전달하는 바를 정확히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인터뷰가 시간의 흐름에 따른 구성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쇼 프로그램이라는 형식을 차용한 것, 그리고 뜨개질이라는 상징적 행동 또한 관객들에게 이해하려는 적극성을 가지게 만든 요인이기도 하다.
텍스트의 역할 : 과정을 보여주는 것
앞서 본 두 텍스트 사용방법은 난해하거나, 만일 이해가 쉽다면 시간을 많이 할애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관객 입장에서의 단점이고, 현재의 예술계는 이해하려고 노력하거나, 시간을 투자하는 관객의 적극성을 당연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예술이 언어로써 표현하기 힘든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완성품이 아닌 그것이 나오기까지 과정 자체를 드러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은 관객을 능동적인 자세로 만드는 것을 하나의 의도로 삼는다. 그 중에서도 텍스트는 과정을 보여주는 매개체의 역할을 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박정우, ‘무제’. 디지털 프린트, 가변 크기. 2015
아직 학생인 작가들은 세련된 모양으로 결과물을 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그들이 사용하는 텍스트나 그에 담긴 내용이 그저 투정으로 보일 수도 있다. 신중한 텍스트 사용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정제되지 않은 감정들의 파편이나 흔적들로 보이며, 관객에게 성의와 예의가 없고 불쾌하게 비춰진다. 졸업 전시 작품들 중에서도 그런 사례가 가끔 보였다. 그런 측면에서, 텍스트 사용 작업의 전제조건은 관객과 소통하려는 근본 목적을 잊지 않는 것이다. 충분한 사유를 하고 오만한 태도를 버리면 된다.
2015년 졸업 전시회에서는 과정을 드러내는 미술 속의 텍스트처럼, 이제 막 사회로 발을 내딛으려는 ‘새파란 아무개’로서의 대학 졸업생들의 혼란, 두려움, 회피 등의 감정이 표현된 작업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위트로 표현한 작품들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는 공허하고 무기력한 모습에 그친 작품들도 많아 씁쓸함을 남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