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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아티스트 - 김석영] 폭풍의 눈에 위치하는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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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65호 유근오 미술평론⁄ 2016.01.14 08:58:32

▲김석영 작가.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유근오 미술평론) 무엇인가 요동치고 술렁거리고, 무언가는 급한 속도로 내달리고, 또 다른 무언가는 들썩거리며 꿈틀댄다. 색채의 난장이 화면 위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런 첫 인상은 숨길 수가 없다. 격동의 시간이 지나자 화면이 곧 잠잠해지며 섬섬하게 그려진 실체들이 망막에 포착된다. 분명 거기에는 화사한 꽃이, 다소 튀는 색깔들로 생경하게 재해석했음에도 거리낌 없이 내달리는 말이 경쾌하게 자리한다. 까닭에 사건의 전후를 고려하자면 그가 그려낸, 아니 체현한 형상은 일순간에 낚아챈 듯하고 임의적 묘사의 성격도 강하지만, 동시에 역설적으로 대상 본래의 형태에 심히 빚진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섬세하게 묘사된 듯한 표현력도 엿보이지만, 이는 작가와 대상 간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통해 물질을 정신으로 갱신할 수 있는 존재를 구현하고자 한 것으로 여겨진다.     

▲김석영. ‘곡신’. 2015.

우리는 이러한 김석영의 그림에 대해 회화의 거울 이미지, 혹은 대상에 대한 작가의 감정이입 등으로 진단한다. 물론 그의 그림이 어떤 대상을 재현했는지 명확하게 식별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거울 이미지에도 해당되며, 그 대상에 작가의 감성을 격정적으로 투영시켰다는 의미에서 감정이입을 거론하는 것도 타당하다. 이런 진단은 어찌됐든 결국 김석영의 작품이 대범하긴 해도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일상적 세계를 화면 위에 펼쳐 보이는 조형언어를 구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구상화이면서도 추상표현주의의 붓질이…

그럼에도 김석영의 화면은 그 일상적 세계의 대상을 표현하기 위해 붓고 뿌리고 긋는 몸의 제스처가 보이는 듯한, 일종의 가쁜 숨을 쉬고 맥박이 뛰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현장 같기도 하다. 이런 어휘는 흔히 추상표현주의를 논할 때 사용하는 어법이기는 하나, 그가 그려내는 존재의 생명력 내지는 활력, 즉 이런 기호 체계에 의해 드러날 수 있는 가시적 형상을 위한 매개의 행위에 집중함으로써 드러나는 상징적 어법이기도 하다. 

▲김석영. ‘Sound of Silence’. 2015.

이런 견지에서 감상자는 그의 작품에서 추상표현주의 작품에 버금가는 행위의 흔적을, 행위는 행위이되 표현적 재현의 층위를 발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재현의 방법론을 고의로 부정하거나 무시할 의도가 없었음은 이 재현의 층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오히려, 매개의 행위에 집중하면서도 대상의 내적인 어떤 것에 다가가려 했음에 있다. 나아가 이것은 그가 대상을 단지 아름답게 수식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진 본성을 구현하는 데 더 심혈을 기울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양식적인 측면보다는 행위를 작동하게 하는 의미론적 측면에서 대상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자, 단지 대상을 형상화하는 과정으로 읽혀지던 붓질이, 그에게는 더 적극적 형상성의 대리자로서의 행위를 통해 일상의 사물들을 그것들의 근원에서부터 추적해내려는(archi-peindre) 구조적 틀로 자리 잡았다는 말이다. 

망막에 상이 맺히기도 전에 화면에 산포된 현란한 색채의 형상에 압도되는 김석영의 그림은 어떻게 보자면 의외로 안료의 아말감이다. 아말감이란 색채가 마구 뒤섞여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뒤섞임 속에서도 쓸데없는 재현이나 마티에르를 위한 필요 이상의 남아도는 물감 층은 없다. 혹여 잉여의 물감 층이 보인다면 그것은 실체가 아니라 시각적 현상일 뿐이다. 게다가 그 아말감 덩어리 사이에서 우리가 아는 것,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 이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그가 현실적 주제를 즉흥적으로 그려내는 또 다른 표현주의자에 불과한 작가가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사실 김석영이 다루는 모티프는 그만의 독창성을 드러낼만큼 특이한 것은 아니다. 꽃과 말 등의 주제가 그리 새로울 것도 없다. 오히려 전통적 주제에 가깝다. 차라리 다른 작가들보다 더 잘 그려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허망할 수밖에 없는 모티프이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에서 예기치 않은 감흥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화면에 심대한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음이다. 폭풍은 폭풍이되 거부할 수 없는 우아한 폭풍이다. 단지 폭풍처럼 휘도는 격앙된 붓질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감성이 그 손끝에 있어야만 느끼는 우아함이다. 이 우아한 폭풍은 더 엄밀하게 말해 그가 그런 격렬한 붓질 속에서도 대상이 가진 특징들을 놓치지 않고 디테일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데 연유한다. 

▲김석영. ‘팔마도’. 2015.

대개 격렬하고 표현적인 그림에서 이만한 섬세함을 발견한다는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격렬함과 섬세함은 당연히 의미론상 대척점에 놓여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차게 내달린 거친 붓질이, 색의 아말감이 현실과 물질의 너머에 있는 세계(예술작품)로 향하는 것은 이런 상이한 형식의 충돌과 불일치에서 융합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김석영의 작품은 웅변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캔버스를 벗어나려 하는 물질 세계

그렇다면 김석영의 작품을 명확하게 진단하기 위해서는 그가 이 대척점에 위치하는 두 관점을 어떻게 융합하는 데 성공했느냐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융합에 대한 결론은 사실 매우 단순하다. 주체인 작가와 대상 사이 어디에 방점을 찍고 있느냐에 따라 그 융합의 가치는 달라진다. 사실 김석영은 앞선 개인전에서 대상 자체보다는 작가 자신의 감성에 충실하여 이 융합의 덕목이 잘 보이지 않았다. 대상은 단지 미끼일 뿐 작가가 분출한 감성적 행위의 흔적만 보일 뿐이었다. 말하자면 보편적 시각으로 있는 그대로의 재현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을지라도 작가의 의도가 너무나도 드러났다. 하지만 이런 류의 그림에서도 우리는 작품의 이면을 보길 원한다. 물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안다. 한편으로 그 너머를 보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란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물질의 세계에서 정신의 세계 - 물질세계의 이면 -로 넘어 가는 것이 예술작품이라는 것을 또 다른 이면으로 오해한 것은 아닐까. 착각이었을까? ‘회화의 세계에서 작가는 침묵할 뿐 말하는 것은 이미지’라는 것을 우리는 종종 무시해버린다. 

에둘러 말해서 반대의 경우라면, 즉 이미지보다 작가의 언어가 과도하게 도드라질 때 미술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이런 경향의 작품 군을 표현주의라고 통칭한다. 표현주의라 하여 작품의 조형적 가치나 질이 떨어질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일세를 풍미한 위대한 양식이다. 문제는 거기에 맞물려 물질 속에 그 작가만의 독특한 정신이 담겨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김석영이 이번 전시에 도달한 세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혹여 이것이 상상력의 문제라면 피카소의 말처럼 우리가 상상하는 것은 곧 우리의 또 다른 현실임을 상기하자.

이 상상력의 세계는 늘 고려해봐야 할 문제겠지만, 굳이 작품의 이면 운운하는 것은 이번 전시에서 김석영만의 특출한 방법론이 물질 속에 발현되고 있음을 필자가 주목하고자 함이다. 근작에서도 분명 현란한 색채의 축제가 화면 위에서 펼쳐지고 있음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대상의 존재감이 그대로 살아 있다는 것은 이제 김석영 자신과 대상 사이에, 물질과 정신 사이에 모종의 교감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부언하자면 대상의 실물 자체를 곧이곧대로 재현하고 있지 않음에도 대상이 풍기는 존재의 생명력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음이다. 

예컨대 말들을 푸르게 혹은 붉게 혹은 노랗게 더 나아가 온갖 색채의 범벅으로 휘저어 놓은 작가의 맥박과 숨결이 동시에 말들에게서도 감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 어쩌면 말들의 맥박과 숨결이 작가에게 전이되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 때때로 색깔들이 들썩거리며 사각의 캔버스를 벗어나고 싶어 한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그려내는 대상을 캔버스에 가두어 두기보다는 캔버스 외부로 탈출시키고자 하는 것 같다. 설사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화면을 생동감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는 유효하다. 이는 작품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라는 의미에서 작가와 대상, 물질과 정신의 상호 교호를 통해 드러낼 수 있는 작품의 진면목이다. 또 다른 덕목은 김석영이 오랜 시간 동안 사각의 틀에 갇혀 부동의 무기력증에 걸린 형상의 한계를, 나아가 현대미술에서 평이한 대상의 재현미술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식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을 통해 그 자신만의 독특한 조형언어로 형상화함으로써 재현의 회화가 지닌 형상의 흥취를 극대화 시키고 있다는데 있다. 


김석영 작업노트

비바람을 견디고야 나무가 열매를 맺고 그 열매는 짐승의 몸을 통해 그 고단한 삶을 치유하고 그 씨앗이 순환되어 다시금 새로운 땅에서 생명을 꽃피우듯 나의 작업은 세계로부터 인식되어져 나를 통해 법제된 후 다시 세계를 향해 열리는 순환구조를 갖고 있어 곡신(谷神)의 그것과 내용뿐 아니라 형식에서도 유사하다.

계산되지 않은 오토메티즘적인 ‘그리는’ 행위들은 나에게 늘 매혹과 영감을 주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무의식과 우연이라는 광활한 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이 싱싱한 만남들과 서로 다른 이미지나 정신 또는 문화가 만나서 이루는 이 불협화음은 다시 새로운 화음의 단초가 되며 그것은 무한의 바다에 도전하는 인간정신에 바치는 나의 오마쥬이다.

(정리 = 최영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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