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오리치듯 잇따라 움직이는 액체를 담은 투명 관이 산재한 전시실은 언뜻 과학자의 실험실을 연상시킨다. 유리 실험관, 아크릴 판, 좁은 액체 관 등 각종 투명한 실험관에는 저마다 다른 색감과 질감의 물질들이 각기 다른 형태로 요동치고 있다. 이 물질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어떤 광물의 이름 대신 ‘광결정’이라 불린다. 지난 10여 년간의 독자적인 실험과 작업을 통해 직접 물질의 유동적인 에너지를 실험해온 김윤철 작가를 만났다.
몽환포영로전(夢幻泡影露電)
송은 아트스페이스는 유체역학의 예술적 잠재성과 메타물질, 전자 유체역학을 활용한 작품을 선보여 온 김윤철 작가의 개인전 ‘몽환포영로전(夢幻泡影露電)’을 7월 20일~9월 3일 연다. 이번 전시는 제목 그대로 꿈, 환상, 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처럼 형상 없는 무상(無像)의 이미지를 작가만의 방식을 통해 담아냈다.
전시 중인 작업 중 가장 초기작으로 자화상을 먼저 살펴보자. 작가는 우선 자신의 얼굴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고, 해당 이미지 파일을 문서파일로 변환했다. 그렇게 얻은 방대한 양의 코드를 큰 종이 위에 작가가 직접 옮겨 쓴 작품 'Self-Portrait'(2003)이다. 이 거대한 자화상은 멀리서 보면 마치 타자기로 작성한 듯 보이는 글자가 점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직접 만든 점자처럼 손으로 눌러쓴 견고한 문자들이 드러난다.
자화상을 완성하기까지 매일 8~10시간 이상 6개월을 꼬박 글자를 써내려가면서 작가는 현재 작업의 실마리를 찾았다. 실재를 담은 광학 자료(비물질)를 문자로 변환하고 다시금 그것을 시각화(물질화)하는 작업 과정의 실험이었던 셈이다. 이 과정에서 그는 빛, 데이터 등의 비물질의 질량을 상상하게 됐다. ‘1MB는 과연 얼마나 무거울까?’하는 궁금증을 시작으로, USB 메모리에 용량이 꽉 차면서 무게도 같이 무거워지는 상상을 이어가기도 했다는 진지한 농담도 곁들였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질량의 세계(물질)를 비물질에 비출 수 있다고 말이다.
그렇게 시작된 작업은 2007년부터 점차 독자적으로 물질에 접근하기 시작했고, 현재까지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시각적인 구현을 이뤄냈다. 현재 그의 대표적인 작업은 전시 중인 현재까지도 현재진행형인 ‘캐스케이드(Cascade, 폭포)’ 프로젝트다. 작가는 이를 “외부에서 유입된 것들이 대기에서 충돌하면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입자 소나기’”라고 표현한다. 이번 전시는 캐스케이드가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이자 그 사이 도출된 일련의 결과물들을 모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2층부터 4층까지 이어지는 9m의 벽면에 설치된 미세역학적 장치로, 작가는 전시 기간 중 수시로 작품을 수정하며 캐스케이드를 완성해볼 예정이다. 작가에 따르면 캐스케이드가 완성되면, 아크릴 판 안의 수많은 미세 관들에 액체가 지나가면서 빛 굴절을 일으켜 액체가 타고 흐르는 관(튜브)이 사라지듯이 보이지 않게 될 것이란다. 첨단 물리학이 다루는 빛 제어 기술(포토닉 크리스탈)을 작가는 혼자만의 힘으로 물성의 발견을 이뤄가는 과정인 셈이다. 궁극적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물질적 상상력을 구현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아서 작년 한국으로 귀국한 후부터 줄곧 캐스케이드 작업에 매진했지만, 현재까지는 완성 이전의 실험 단계다.
전시 오프닝 날까지도 그의 손은 까맣게 물든 채 이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는 “캐스케이드가 현재의 형태를 넘어서 안정적인 상태로 진행되길 바란다”며, 전시 진행 중이라도 완성되길 바랐다.
물질적 상상력과 시
2~4층의 전시장 곳곳에는 작가가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 구절 6편이 자리했다. 모두 전시 안의 6개 무상 이미지를 소재로 했다. 이들 6가지 모티프의 특징은 비록 형체는 없지만, 끝없이 움직이는 유동성에 있다. 그 중 하나로 ‘꿈’에 대해 김윤철 작가는 가스통 바슐라르를 인용했다.
꿈 (Dream)
몽환적인 풍경은 여러 인상으로 가득 차 있는 하나의 액자가 아니고, 부풀어 오르는 하나의 물질인 것이다.
- 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과학철학자이자 문학비평가인 바슐라르는 언어 이전의 세계로 회귀하기 위해 ‘물질적 상상력’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물질적 상상력이란 의미와 상징으로 대변되는 언어 이전의 징후들을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상징을 바라보기보다 실재하는 질료와 그것의 물성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으로, 김윤철 작가가 작업에 접근하는 방식과 맞닿았다. 바로 언어의 한계에서 벗어나 물성을 통해 본질을 향하는 방법이다.
김윤철 작가는 예술가이자 음악가(실험음악 작곡가)인 동시에 과학자다. 학부 시절 음악을 전공했다. 이후 독일로 유학을 떠나 10여 년을 그곳에서 작업해왔다. 3가지 분야 모두 비언어적 활동이라는 데 유사성이 있다. 바슐라르는 과학자와 예술가의 공통점으로 ‘상상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자 해결하는 사람’이라 말했는데, 김윤철을 떠올리게 만든다.
설명이 다소 어려울 수 있으니 예를 들어보자. 관람객으로부터 “이게 의미하는 게 뭐냐?”는 질문보다 “이게 뭐냐?”는 질문을 들었을 때 더 기분이 좋은데, 이유는 자신이 만든 작업 속으로 관객이 들어왔다고 느끼기 때문이란다. “꽃이 꽃인데 꽃에서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언어적 해석에서 벗어나고자 작업과 음악을 선택했던 것”이라고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그의 작업들을 일반 관객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을까? 기자의 질문에 작가는 “과정을 꼭 모르더라도 움직이는 물질 그 자체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실제로 전시장을 가득 채운 작품들 모두 그가 원하는 물성을 표현하기 위한 실험의 과정이 담긴 일련의 결과물들이다.
설령 위의 과정들을 굳이 알지 못한다 해도, 출렁이고 회오리치는 각양각색의 독특한 물질들은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다. 만약 더 알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전시장에 배치된 도슨트에게 설명을 요청하자. 작가가 직접 전한 이야기를 소화해 친절히 이야기해줄 것이다.
지난달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가 수여하는 2016 Collide International Award를 수상한 김윤철 작가는 곧 스위스 취리히의 CERN과 영국 리버풀의 FACT에서의 레지던시를 위해 떠날 예정이다. 각각 2개월, 한 달의 입주 기간 동안 각 기관의 유명한 물리학 석학들과의 연구 교류를 통해 영감을 주고받는다. 그는 현재 고등과학원의 초학제연구단 책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며, 이미 예술가로서 과학자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초학제적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