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6호 김금영 기자⁄ 2016.10.21 09:20:01
(CNB저널 = 김금영 기자)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헌지도 모르면서.” 올 상반기 영화 ‘곡성’을 통해 전파된 유행어다. 이 대사는 수많은 패러디를 낳았고, 정말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고 싸우기만 하는 답답한 사회 상황을 비꼬는 말로도 많이 쓰였다.
김한울 작가에게도 이 말이 와 닿는 지점이 있었다. 어디서냐고? 건물 그리고 거기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 연유가 궁금해 작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는 오래 된 주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가는 한 달에 한두 번 꼭 방문하는 장소가 있다. 태어나고 28년 동안 생활한 사당 5동. 작가는 올 4월 이사를 했다. 원해서는 아니었다. 30년 넘은 오래된 주택 단지였는데, 자신의 나이와 함께 세월을 머금은 집에 작가는 애정을 갖고 있었다. 가족 또한 평생 살 공간이라 생각하고 소중하게 삶의 터전을 꾸렸다.
그런데 어느 날 개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재건축 관련 투표를 했다. 작가의 가족은 반대했지만 찬성 주민이 90%에 육박해 다수결 원칙에 따라 재건축이 결정됐다. 현재 그곳은 작가가 뛰놀던 골목도, 가족과 함께 28년을 살아 온 공간도 모두 사라진 채 폐허 더미가 됐다. 그런데 여기서 작가의 눈길을 끄는 광경이 있었다.
“재건축이 결정되고, 먼저 떠나는 사람들이 생겼어요. 이사를 가면 그 집 대문에 ‘X’ 표시를 했죠. 그런데 그 이사 간 사람들이 가끔 동네에 돌아와서 역정을 내더라고요. 누가 X 표시를 해놓았냐고요. 그리고 자신이 살던 곳을 돌아보고는 근처에서 돌멩이나 식물을 주워가더라구요. 평소엔 거들떠보지 않던,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을 말이죠. 그때 느꼈죠. 막상 평소에는 의미를 모르다가, 사라져 버리고 나니 소중했던 존재를 자각한다는 걸.”
이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 중엔 재건축 찬성자도 있을 것이다. 집을 사람이 안락하게 사는 공간이라기보다는, 재테크 측면으로만 보는 시선도 강하다. ‘티끌 모아 티끌’이라고, 경기가 어려운 가운데 ‘내 집 마련의 꿈’과 더불어 ‘건물 재테크’는 현대인의 주요 관심사다.
“꾸준히 새 건물들이 지어지죠. 허물어진 폐자재 더미 위로 신축 아파트가 들어서고, 좋은 조건의 건물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의 경쟁도 치열해요. 그런데 집은 그저 단순한 존재가 아니에요. 자본의 논리로 낙후된 지역을 살리고, 더 살기 좋은 아파트가 지어진다 해도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담아 온 집이 사라지는 건 자신의 일부가 없어지는 것과 같이 느껴지죠. 사람들도 이걸 인식하기에 살던 곳에 돌아와 쓰레기를 주워가는 등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하는 게 아닐까요? 진짜 중요한 것을 외면하면서, 재화의 가치로만 알고 살아오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재화의 가치로만 사는 세상에 의문
실제 존재했던 장소들을 다시 바라보기
작가는 이런 마음을 담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세밀화 방식의 ‘자라나는 집’ 시리즈다. 없는 공간을 상상해서 탄생시키진 않고, 직접 눈으로 본 장소들을 바탕으로 그린다. 현재 많이 그리는 건 사당동에 실제 있었던 집들이다. ‘경기수퍼’도 작가가 늘 봤던 가게고, 작품 ‘옥상에서’에 등장하는 집도 실제 존재했다.
그런데 화면을 보다 보면 특이한 점이 있다. 사람들은 온데간데없고, 모자를 쓴 너구리, 미어캣, 그리고 집 주변을 날아다니는 새 등 동물들이 있어서다.
“한 번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동네에는 사람뿐 아니라 고양이, 산비둘기 등 동물들도 많이 살고 있거든요. 사람들은 새 집에 이사가면 되지만, 동물들은 어떻게 될까 궁금했어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동물들을 그림에 끌어들이기로 작정한 건, 편안하게 다가가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제가 다루는 이야기가 마냥 가볍진 않죠. 하지만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불편하게 꺼내는 것보다는, 재미있는 이미지를 통해 친근하게 다가가고 싶었어요.”
그림에는 평소 쉽게 볼 수 있는 새 등 동물이 나온다. 나중엔 특성에 따라 집을 위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동물들을 선별했다. 무리지어서 생활하는 미어캣에서 사람들과 비슷한 모습을 발견했고, 너구리는 터전을 마련하는 사람처럼 꾸준히 돌을 날라 집을 만든다.
더 나아가 나중에는 신화적 이미지를 차용했다. 작가는 전지전능한 신을 다루는 서양 신화보다 화장실 신, 문지방 신 등 일상 속 가깝게 다가오는 아시아 신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 가운데 가면과 모자를 쓰고 신의 역할을 대행하는 제의에 대한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
“그림 속 너구리와 미어캣에 모자와 가면을 씌웠어요. 이들은 집을 소중한 존재로 여기고 마치 지키려는 듯 자신들만의 제의를 보여주죠. 동물들의 행동을 통해 집은 신화적인 장소로 탈바꿈하고요.”
또 신의 역할을 대행하며 집을 지키는 동물들은 남들이 봤을 때는 무의미해 보이는 행동을 화면에서 반복한다. 너구리는 계속 돌을 나르고, 미어캣은 주변을 정찰하는 듯 집을 에워싸고 있다.
남들이 보면 쓸데없는 행동이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의식으로 탈바꿈
“돌을 계속 나르거나, 하루 종일 서서 주변을 바라보는 건 어떻게 보면 의미 없어 보이는 행동이에요. 그런데 이들에게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의식이죠. 너구리는 집을 더욱 튼튼히 하기 위해 돌을 쌓고, 미어캣은 소중한 집을 지키기 위해 계속 눈을 밝혀요. 이 행동이 민속 신앙에서 물그릇을 떠놓고 간절한 마음으로 소원을 빌던 사람들의 모습과 겹쳐 보였어요. 남들이 봤을 때는 왜 하는지 모를, 쓸데없어 보이는 짓일지라도 이들에게는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간절한 마음이 이런 행동들을 반복하게 하는 거죠. 자신에게 무엇이 중요한 건지 인식한 행동인 거예요.”
옥상 위가 빗물로 가득 찬 ‘옥상에서’는 물그릇의 의미를 담아놓은 것 같다. “빗물은 물에 관한 신화가 돼 죽은 건물을 살아나게 한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이처럼 작가는 나름의 방식으로 집을 단순한 존재에서, 소중하게 다뤄야 할 존재로 재탄생시킨다.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고 이야기를 건네는, 작가만의 대화 방식이다.
이건 작가 또한 개인의 삶에서 느낀 것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술을 전공한 작가는 예술에의 길을 포기하고 의류 회사에 취직했었다. 자신의 능력이 보잘 것 없다고 생각했고, 가시밭길이 펼쳐질 것이 예상되기에 시작도 하지 못했다. 또 작가로서의 성공은 명성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그림 가르치는 일을 하다가 생각의 전환을 맞았다. 아이들은 자신이 그림을 잘 그리나, 못 그리나 상관하지 않고 그리는 것 자체를 즐거워했다. 이 모습을 보고 작가는 그림을 그릴 때 진짜 자신에게 중요한 건 주위의 시선이 아니라, 작업에의 즐거움과 열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올해 대학원에 진학했고, 다시 붓을 손에 들었다.
그림 뿐 아니라 세라믹 작업에도 관심이 있어 작업에 끌어오고 있다. 진짜 자신에게 중요한 게 무엇인지 느끼고 나니, 하고 싶은 작업들이 이것저것 생긴 것. 내년 2월엔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는 첫 전시도 예정돼 있다. 추후엔 현재 하고 있는 ‘자라나는 집’ 시리즈의 확장 버전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을 다루고 싶다고 했다.
“붕 뜬 이야기가 아니라, 제가 살면서 느끼는 것들을 작업에 담으려 해요. 재건축과 집에 관한 이야기를 펼치다보니, 사회적 이슈인 젠트리피케이션에도 관심이 생겼죠. 비슷한 주제로 작업하는 작가들이 많아요. 아마 그만큼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공통 주제여서가 아닐까요? 저는 저 나름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보고 싶어요.”
작가의 시선은 늘 한 곳을 향해 있다. 외적인 요소에 눈이 멀어 사람들 가슴 속에 잊힌, 진짜 소중한 존재들. 그 존재들을 꺼내는 나름의 의식을 그림으로 행한다. 진짜 뭣이 중헌지 알아가고 있는 작가의 시선이 향할 그곳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