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면 대신 공간에 펴낸 잡지, 빛과 소리만 공명하는 전시장, 스마트폰 거치대가 된 미술관, 설계도의 빈 공간을 가상의 x로 만든 연극, 미술관 인근의 과거 리서치…
국립현대미술관은 서울관의 공간, 건축, 장소성을 재해석하는 ‘보이드(Void)’전을 10월 12일부터 개최했다. 제목에 쓰인 보이드(Void, 빈 공간)는 건축에서 비어있는 공간, 구멍을 의미하는 동시에 개방된 공간 또는 기능할 수 없는 공간을 뜻하는 개념이다. 쉽게 떠올리면 복도, 마당을 비롯해 계단 아래 공간이나 움푹 들어간 공간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전시는 곧 개관 3주년을 맞는 서울관의 건축적 의미를 되돌아보기 위해 기획됐다. 민현준 설계사는 서울관을 기획할 당시 ‘군도형 미술관’이란 개념을 내세웠다. 다도해의 섬들처럼 서로 떨어진 전시장을 둘러싼 바다 같은 미술관이란 설명이다. 그래서인지 2013년 서울관 개관 당시, 이 개념에 익숙하지 않은 관람객으로부터 전시 공간에 비해 복도가 넓어 공간 낭비가 아니냐는 평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미술에서 미술관 속 빈 공간은 퍼포먼스, 행사, 강연, 리서치 등 다양한 형태의 전시를 위해 활용된다. 서울관도 이런 불확정적인 현대미술의 여러 양상을 표현하기 위한 전략으로 지어졌다는 것이 국립현대미술관의 설명이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정다영 학예연구사는 지난 11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을 주제로 지어진 미술관이지만 지금까지는 빈 공간들이 일시적이고 복합적인 용도로만 사용됐다. 이번 전시를 통해 보이드를 전면에 내세우고자 한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출품 작품들을 살펴보면 기획 의도가 대체로 명확히 드러난다. 서현석, 김성희, 슬기와 민으로 구성된 그룹 ‘옵.신’은 지금까지 동명의 잡지를 4권 출간했다. 이번 전시에서 이들은 5번째 잡지 ‘옵.신 5: 보이드’를 전시의 형태로 선보인다. 서울관 내·외부 곳곳을 따라 총 20페이지에 이르는 보이드 공간을 마련했다. 관객이 홀로 페이지 지도를 따라 이동하면서 성립되는 일종의 참여형 퍼포먼스 작품이다. 미리 녹음된 오디오 가이드를 통해 각 페이지에 인용된 글귀를 들으며 감상할 수도 있지만, 그저 설치물을 따라 걸으면서 조용히 공간을 응시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한 권의 책(혹은 공간)을 읽어 내려가는 기분을 경험할 수 있다.
미술가 장민승과 작곡가 정재일의 작업 ‘밝은 방’은 2개 층으로 나뉜 방 3개의 거대한 전시장인 갤러리 6을 빛과 소리만 남긴 채 비워냈다. 장민승과 정재일은 지금으로부터 7년 전 서울관 자리에 있던 기무사 건물에서 함께 인연이 있다. 이들은 전시로 꽉 찬 미술관 공간을 텅 빈 방을 만드는 동시에 음악과 빛 등 비물질로 채움으로써 공감각적 사색의 경험을 유도한다.
김희천 작가는 서울관을 임의의 스마트폰 거치대로 삼고, 갤러리 7의 방 한 칸엔 비스듬히 공간을 관통하는 스크린을 설치했다. 작가는 관람객을 삼킨 한 마리의 거대한 고래로 미술관을 상상했다고 설명한다. 거대한 스크린을 핸드폰 액정으로 삼는 한편, 스크린 옆에 미술관의 미니어쳐 모형을 설치해 건물을 바라보는 두 개의 다른 스케일(크기) 감각을 자극한다. 스크린 속 영상은 ‘스마트폰 화면 - 자신 - 미술관(이자 스마트폰 거치대) - 미술관(이자 스마트폰 거치대)에 걸친 스크린 부분 - 미술관(이자 스마트폰 거치대)을 넘긴 전체 스크린’을 오가며 확대와 축소를 반복한다. 건축을 전공한 김희천 작가는 미술관 자체를 다양한 관점과 위치에서 바라보는 경험을 제시한다.
그런가하면 보이드의 역사를 각각 다른 방식으로 리서치한 작업도 눈에 띈다. 임진영, 염상훈, 성주은, 김형진, 최진이로 구성된 오픈하우스서울는 서울관의 주변 지역의 과거 모습을 통해 이들의 공백을 찾는다. 조선시대 종친부, 근대의 기무사, 현대의 미술관이 그러하듯 인근의 소격동, 가회동, 삼청동의 과거를 추적해 분석했다.
반면 최춘웅의 ‘실종된 X를 찾습니다’는 설계도면에서 보이드 공간을 표시하는 문자 'x'에 주목한다. 실제 입체 공간의 보이드 공간이 아니라 한국 건축의 역사적 맥락에 존재하는 구멍인 ‘납작한 보이드’의 성격을 찾는 과정을 전시로 풀었다. 그는 ‘x'에 관한 하나의 가설을 설정하고 연구한 내용을 2막 연극 형식의 강연 퍼포먼스로 엮었다. 전시장에 놓인 설치는 이 연극을 위한 무대이자 배경이 되기도 한다.
한편, 전시 기간 동안 다채로운 연계 프로그램과 행사가 진행된다. 10월 26일에는 ‘문화가 있는 날’ 행사의 일환으로 전시 참여 작가의 라운드 토크가 서울관 멀티프로젝트홀에서 열린다. 최춘웅 작가가 연출한 한국 현대 건축사를 은유하는 주제 낭독극 ‘건축극장 X'도 11월 5일과 12월 3일 전시실 7에서 열린다. 이 밖에 10월 26~30일 5일간 오픈하우스서울의 ’보이드 커넥션 + 옥상달빛 페스티벌‘이, 12월 7일에는 ’보이드‘전의 큐레이터 토크가 진행된다. 전시는 2017년 2월 5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