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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영 칼럼 - #미술계_내_성폭력] 우리의 일그러진 영웅들, 능욕의 미술사, 가짜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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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07호 미술가 김아영⁄ 2016.10.31 11:15:51



▲사진= 김아영 작가














한국 미술계는 현재, 2016년 10월 21일경 한 여성 미술학도가 SNS에 고백한 기록으로부터 드러나기 시작한, 가공할 규모의 미술계 내 성폭력이라는 진원에 의해 쑥대밭이 된 상태다. 많은 이들이 SNS를 통해 쏟아지는 미술계 피해 여성들의 고백과 이어지는 가해 남성들의 사죄문 속에서 경악과 충격으로 일손을 놓은 채 잠 못 이루고 있다. 이 글은, 한국 현대미술사의 한 챕터에 기록될 능욕적 이슈의 포문을 연 한 남성 큐레이터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른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능욕의 미술사, 가짜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다.

알고보니 우리 친구

함 모 큐레이터는 현대미술과 독립 음악 등 다방면에 걸쳐 기획자로 활동해 온 촉망받는 젊은 큐레이터였다. 문화계의 주변부에서 출발해 서서히 중심부로 활동영역을 넓힌 그는 알려진 페미니스트로서 다양한 지면에 페미니즘에 관한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고 이에 관한 단행본도 준비 중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랬던 그가 실은 여러 해 동안 본인의 사회적 지위를 방편삼아 다수의 여성 미술학도들과 젊은 여성 작가들을 성적으로 추행하려 했다는 사실이 피해자들의 증언으로 밝혀졌다. SNS에 감사할 일이다. 대부분, 유명 큐레이터와 신진 작가-지망생의 관계구도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들이 대상이었다. 그는 때로 전시를 준비하며 입에 담기 어려운 속어와 인격 모독적 발언으로 젊은 여성들을 학대하는 신경증적 행동도 보였다.

처음에는, 이것이 단기간에 과대평가된, 혹은 과도하게 부풀어 오른 문화 권력에서 시작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를 둘러싼 두터운 연대, 목적의식을 나눈 일시적 공동체가 어쩌다가 인성이 부족한 한 사람을 한껏 밀어 올려서 생겨난 일이라고. 그의 비뚤어진 성품이 고작 젊은 큐레이터로서 그가 가진 한 줌의 권력을 젊은 여성들을 협박하고 성추행하는 데 사용하게 했다고. 

그러나 그 큐레이터의 이름 석 자가 회자된 이후, 하루 이틀 그리고 사흘이 지나면서 차례차례 공개되는, 이제 일일이 외워 부를 수도 없이 기다랗게 늘어난 미술계 내 성추행-폭력자로 추정되는 이름들은, 너무나도 친숙한-했던 우리의 후배, 동료, 선배, 멘토로서 이 자그마한 미술계 바닥에 자리하고 있는 이름들이다. 이들은 지금까지 왕성한 활동을 펼쳐 왔거나 이제 막 그 진입로에 접어들고 있다. 그만큼 연령대가 다양하다는 이야기다. 더욱 아찔한 것은, 설사 그들의 성추행, 성폭력 혹은 성적 가학의 경험이 지금 당장이 아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지언정, 피해자가 짊어지고 온 상처와 수치심과는 대조적이게도 대개 죄책감의 잔재 없이 분주한 일상들을 지속해 오고 있었으리란 점에서 오는 황망함이다.

이 글을 쓰는 본인 스스로도 대학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국내에서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꾸준히 겪어 왔던 남성들로부터의 언어 폭력, 성적 추행의 일들에 대해, '교양이 부족하거나 이에 대해 인식이 부족한 옛 사람들이 저지르는 잘못'이라고 생각해왔다. 본인의 경험은 비교적 과거의 일들이라 우리 세대, 그리고 더 젊은 사람들은 내가 본 어른들과는 다른 토양에서 자라나 다른 가치관을 가졌을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밝혀진 가해자의 이름들은 단지 문화계의 어른들, 문화 권력자뿐만이 아니었다. 이러한 폭력은 실은 모든 연령대의 남녀 사이, 즉 학우 사이, 친구 사이, 오빠와 동생, 선배와 후배, 선생님과 제자 사이에서 매일 일각을 다투며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일상의 남녀 관계에는 아직도 보이지 않는 역학관계가 존재하고 있고, 가해자들은 늘, 그래도 될 만해 보이는 사람을 선택해 폭력을 행사하는 안목을 보였던 것이다.

이에 힘을 실어준 것이 우리라면? 한 번 더 확인해보지 않았던 것이 우리라면? 

다시 함 큐레이터의 이슈로 돌아가 보면, 흥미로운 것은 그는 늘 사회의 폭넓은 사안에 대해 예리한 칼끝을 겨누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는 점이다. 페미니스트로서의 활동은 차치하고서라도 그의 눈에 띄는 SNS 활동과 문화계 다양한 인사들과의 연대는, 그에게 일약 문화계 동정에 밝은 소식통이란 위치를 얻게 해 주었다. 그의 활동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던 평론가 및 그와 연대했던 집단이 지난 몇 해간 이루어 낸 성과를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의 논제는 단지 문화계의 이슈를 뛰어 넘어 사회의 각종 사안을 망라했다. ‘청년’이라 호명된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목소리를 가진 주체로 자리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 이들을 시대의 대안처럼 여겼다. SNS 상에서 함 큐레이터가 선보였던 분절된 작문 행위는 적지 않은 수의 청년들 사이에서 일상적 가십 소재를 넘어 그들의 삶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문제제기의 지점을 찾기 어렵다.

헌데 문제의 시작은, 자유로운 언표 행위가 독단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함 큐레이터의 언표 행위에는 강렬한 가치판단이 녹아 있었고, 때로는 온-오프라인 상의 대상에 대한 무분별한 공격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의 뾰족했던 비판의 날끝은 자기 자신을 향한 적이 없었다. 공격은 다수의 개인을 향해 드러났다가 번복되기를 반복했다. 이러한 감정 기복에 따른 언어폭력과 정신적 가학의 징후가 차츰 두드러지기 시작함을 어떤 이들은 감지했지만 대체로 침묵했다. 불편했지만 말하기 어려웠다. 주파수가 높아지고 음량이 커진 그 목소리에 침묵하고 지지하는 듯 보이는 두터운 연대가, 그에 대해 암묵적으로 동의한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부름에 부응했던 많은 청년들은 자신들이 이들의 문화자본을 위한 원천으로도 작용했을지 모른다는 양가성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사분오열의 모습과 반성

치명적 해악을 저지른 개인의 붕괴는 그를 돌출시킨 집단의 해체와 연결되어 있다. 가해 당사자와 자양분을 나누고 안팎으로 이론과 행동 노선을 수립해 행보를 함께 해 왔던 이들 중 몇몇의 모습에서 그 해체와 분열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들도 피해자일 수 있다. 함 큐레이터에게 비평적 안목을 수혈했거나 그의 활동의 샘에 물을 댄 것으로 일컬어지는 사람들 중 어떤 이는, 문제의 큐레이터가 일종의 매개인과도 같은 역할을 하면서 연장-작동되고 있던 상징권력이 무너짐에 따라 순식간에 혼란에 빠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너무나 신속히 그들이 행했던 과거와의 절연을 선언하고 새로이 도래한 피해자 연대에 줄을 이으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통해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역사를 통해 숱하게 보아 온 자가당착의 클리셰이며, 최후의 순간까지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두고 싶은 인간됨의 한 면모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반성한다. 함 큐레이터의 발언과 언사가 이 계열에서 수용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정도를 크게 추월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외면하려 했던 것. 그를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이유로 그 마음을 소리 내어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을, 침묵의 반복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괴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를, 우리는 이번에 다 보았다. 그에게 처음 권위를 부여한 것은 우리가 아니었을지라도 그 권위에 힘을 실어 준 것은 우리 모두일 수 있다. 그에게 쉽게 환경을 제공하고 자리를 마련해준 것, 그가 걸어 들어올 때 다시 한 번 더 그의 외투 속을 점검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떤 평론가의 말을 빌리자면 결국 그 외투 속에 든 ‘사제 폭탄’이 느닷없이 폭발해 버렸다.

치료

다시 시선을 돌려, 함 큐레이터만이 아닌 모든 성폭력 가해자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직위 해임이나 일시적 응징뿐만이 아닌 ‘적절한 치료’다. 빈번히 반복되는 무자각적 성폭력의 기저에는 그렇게 해도 나쁠 게 없다는 인식이 짙게 깔려 있다. 직위해임이나 일시적 응징만으로 깊게 뿌리내린 도덕적 불감증까지 바꿔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가해자들을 일정 기간 동안 수용하고 갱생시킬 수 있는 전문적 치료 또는 재활의 공간이 요원하게 여겨진다. 피해자에 대한 응당한 보상도 필요할 것이다.

여전히 진행 중인 이 이야기의 경위는 다시 한 번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준다. ‘환멸’의 의미에 대한 총체적 가르침이다. 하지만 이 힘겨운 사건들이 공개됨에 따라 점점이 존재하던 피해자들은 조금 더 연결되었고, 사람들은 그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공존과 대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반복되는 성적추행-폭행, 언어폭력, 조롱, 협박, 학대, 협잡으로 인해 창조적 주체가 스스로 이 창조의 공간을 떠나게 되는 일이 없도록, 때 이른 포기가 아닌 미래를 상상할 수 있도록, 이제 일그러져 버린 청년이라는 호명 대신, 그저 함께 숨 쉬고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인격체로 불리기를, 하염없이 원하는 보이지 않는 목소리들이 사그라지지 않게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폭력 주체가 섣불리 내미는 도움의 손을 잡지 말아야 한다. 이는 그들에게 손쉬운 면죄부를 제공할 뿐이다. 그들의 응당한 처벌과 재활을 촉구한 후,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목소리들에 귀 기울이고, 기록하고, 볼륨을 높이고, 자꾸만 이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한다.

[필자 소개]

미술가 김아영은 사운드, 비디오, 이미지, 텍스트, 퍼포먼스 등의 형식에 내러티브 구조상의 실험을 도모하는 작업을 지속해 왔다. 시간, 공간, 구조, 통사, 개념을 통튼 모든 종류의 횡단과 이송, 이행, 이조, 호환에 주목하고 새로운 접합과 충돌의 가능성을 찾는다. 

2016년 프랑스 파리의 팔레 드 도쿄에서 개인전을 가졌고, 2015-2016년 팔레 드 도쿄 산하 파비옹 리서치 랩에서 레지던시 활동을 했다. 2015년 제 56회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에 참여했고, 같은 해 문체부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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