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작가들은 대개 두 가지 이상의 직업을 유지한다. 작가로서의 예술 작업(이하 작업)이 본업을 지탱하기 위해 실질적인 생계수단인 부업의 뒷받침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설령 작업보다 생업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할지언정 예술가의 마음 속 영원한 본업은 결국 작업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노동이 삶의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할 때, 작업은 과연 노동에서 완벽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작가 이정형의 전시 ‘오늘의 현장’은 자신의 노동 현장을 작업의 현장으로 끌어들이면서 작가의 작업과 노동 사이의 경계를 솔직하게 바라본다.
송은 아트큐브의 2016-17 전시지원 프로그램 선정 작가 이정형의 개인전 ‘오늘의 현장’이 11월 4일부터 진행 중이다. 작가 이정형은 미술관, 갤러리 등의 의뢰를 받고 전시 공간을 설계·조성하는 일을 부업으로 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이전 전시가 남긴 흔적을 모두 지운 뒤 새로운 전시를 위해 가벽을 세우고 벽을 칠하며 작품을 걸고는 조명을 달기까지의 일을 말한다.
전시 제목과 동명의 공간설치 작품인 ‘오늘의 현장’에는 쏟다 만 페인트 통, 천장과 입구를 둘러싼 비닐, 사다리, 청소기, 조명, 페인트 롤러와 컴프레서 그리고 컴프레서를 미처 피하지 못해 온통 페인트가 묻어버린 물병 등이 어지러이 놓여 있다. 대개의 전시가 깔끔한 화이트큐브 공간을 마련하고 작품에만 집중하게끔 만드는 데 반해, 이정형의 전시는 이렇게 화이트큐브를 만드는 과정 속 현장을 그대로 전시장으로 옮겨 놓았다.
‘오늘의 현장’에서 나와 전시장의 뒤편으로 이동하면, 그간 작가가 진짜 (노동의) 현장에서 찾은 작업의 단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지난 몇 년 간 전국 곳곳의 전시공간에서 발견한 이 레퍼런스(참고 자료)들이 ‘오늘의 현장’이자 작가의 현재 작업의 토대가 됐음을 보여준다. 그 기록을 살펴보면, 페인트 등을 칠하기 전에 주변에 발라놓은 비닐 마스킹 작업에 대해 “주름에 쌓인 가루로 인해 보이는 주름회화와 경계. 오래된 먼지처럼”이라고 적어놓는가 하면, “보양된 현장, 흐트러지는 경계(Blur)”를 통해 조형성을 찾을 수 있다고 쓰기도 했다. 찬찬히 그 기록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오늘의 현장’을 이루고 있는 구성 요소들이 하나의 퍼즐처럼 구별되기 시작한다. 천장과 입구를 덮은 투명한 우윳빛 비닐부터, 파랗고 노란 벽의 흔적들 모두 과거 그가 일하던 현장에서 발견한 조각들의 모음이었다.
이번 전시를 통해 그는 생계수단으로서의 노동이 목적으로서의 예술작업으로 전환될 수 있는 가능성을 실험한다. 작가의 첫 개인전(2015) ‘파인 워크스(Fine Works)’에서 순수예술을 뜻하는 파인아트(Fine Art)와 노동을 뜻하는 워크(Work)를 결합해 공사 현장에서 찾은 다양한 오브제를 작품화해 선보인 바 있다. 물론 예술가의 노동으로서 전시공간 조성을 주제로 작업한 작가가 이정형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작가에게 이 노동 현장은 특별히 중요한 게 아닌 듯하다. ‘오늘의 현장’은 노동의 순간을 모방하기보다 노동의 현장에서도 놓을 수 없는 예술에 대한 집념이 만든 ‘오늘의 작업’이기 때문이다.
엄격히 보면, 전시 설치 작업자는 해당 전시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럼에도 작가는 자신의 노동 현장을 성실하게 관찰하고 작업의 실마리 찾길 주저하지 않는다. 이정형의 작가 노트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찾을 수 있다. “많은 현장은 누군가의 전시였고 나의 전시이지 못했다. …(중략)… 어떤 경우에는 전시에 작가로 참여하면서 동시에 전시공간을 만들었다. 그때의 현장은 어떤 작업의 현장이었을까. 오늘의 현장은 겹쳐질 수 있을까." 그 속에 숨은 좌절은 쉽게 짐작할 수 없지만, 작가의 부지런한 발견은 오늘도 이어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전시는 12월 3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