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전시뿐만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의 행사를 만들어온 기획자를 만난다. 사진작가 홍진훤은 작년 한 해에만 블랙리스트와 예술계 성폭력에 대항하는 ‘블랙마켓’과 사진 작품의 판로를 모색한 ‘더 스크랩’ 등 눈에 띄는 행사를 기획했다. 작년 말까지 사진 전문 신생공간 ‘지금여기’를 김익현 사진작가와 공동운영하기도 했다.
현장을 포착하는 사진기자에서 사람이 떠난 현장을 찍는 사진작가로, 그리고 사람이 모여 새로운 현장을 만드는 기획자로 변모한 홍진훤에게 ‘작가로서의 기획자’를 물었다. 지금 여기 우리에게 필요한 걸 직접 모색해나가는 ‘실천으로서의 기획’ 이야기를 들어보자.
① 목마른 이가 우물을 파듯, 필요를 기획하다
- 사진작가 홍진훤이 기획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처음으로 기획한 전시나 행사는 무엇인가?
“(민망한 듯 웃으며) 여전히 기획자라는 말이 어색하다. 나의 활동을 돌아보면, 젊은 사진작가들의 포트폴리오를 공유하는 커뮤니티 사이트 ‘포진(4ZINE, 2010)’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이 활동으로 ‘지금여기’를 공동운영한 김익현 작가를 포함한 많은 작가들을 만났다. 처음 작업을 시작했을 때, 주변 또래 작가들의 작업이 보고 싶어 만들었다. 필요를 느낀다면, 그 빈 구멍을 직접 메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후 처음 기획한 전시로는 더 텍사스프로젝트에서의 전시 ‘우리는 왜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는가?’(2014)가 있다."
- 필요에 따른 해결이란 이야기가 흥미롭다.
“처음부터 거창한 기획의 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여기’ 공간을 마련할 당시, 김익현과 나는 사진 기획전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그래서 공간이 갖춰지자 연속으로 기획전을 열었다. 그런데 기획전이 계속되니 새로운 젊은 사진작가 찾기가 힘들었다. 아니, 젊은 작가들이 자신들의 작업을 보여줄 기회가 부족했던 거다. 그래서 기획전을 진행하다 새로운 작가들을 찾아 개인전을 또 연속으로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다 이제는 사진 이론 및 교육의 필요성, 그리고 작가들의 수익 문제도 고민하게 됐다. 작가 수익에 대한 고민은 ‘더 스크랩’으로 이어졌다. 그때그때 당면한 고민을 해결해나간 셈이다.”
-이론 및 교육에 대한 고민은 어떻게 진행할 예정인가?
“아직 기초적인 구상단계지만, 학교를 만들 계획이다.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PaTI)나 한국영화아카데미처럼 사진에도 대안적인 학습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기존 교육이 불성실한 부분에서 이런 대안들이 생겨났듯, 사진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 본인도 작가이면서, 다른 작가들 작업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기본적으로 작가의 작업을 굉장히 좋아한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적었고, 반복되는 기성의 것에는 큰 흥미를 느낄 수 없었따. 그러니 어쩌겠나, 재미있는 걸 스스로 찾아야지.”
- ‘지금여기’를 2014년 가을부터 작년 말까지 운영했다. (2017년부터는 김익현과 공동작업실로 사용하고 있는) 공간을 운영한 2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은 무엇인가?
“아무래도 처음 ‘지금여기’에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가 기억에 남는다. 기획자 정언 씨가 연 작가들의 밥벌이에 대한 좌담회 ‘접속유지’가 ‘지금여기’의 첫 행사였다. 처음에는 10~20명 정도가 참석하리라 짐작했지만, 점점 일이 커져 200명이 넘는 인원이 찾아왔다. 공간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때였는데, 밥벌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겠노라 예술가 몇 백 명이 창신동 일대를 헉헉대며 헤매는 광경이 펼쳐졌다. (지금여기는 해발고도 70m의 가파른 언덕에 위치했다.) 그 덕에 ‘지금여기’란 공간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고민할 수 있었고, 조금 편하게 시작할 수 있었다. 정언 씨에게 고맙다.”
- ‘지금여기’의 활동부터 직접 기획한 행사들을 홍보할 때,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의 SNS 활용이 두드러졌다.
“트위터에서 만난 사람도 많았고, 초기부터 활발히 이용하며 익숙한 매체였다. 트위터 문화를 향유하며, 기존의 홍보 플랫폼을 점유할 수 없던 이들이 트위터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흔히 말하듯 납작한 프로필 하나면 무엇이든 홍보할 수 있는 때였다. 그러면서 트위터를 보고 찾아오는 관객층도 생성됐고, 자연스럽게 환경이 마련됐다. 하지만 나조차도 요즘엔 트위터를 잘 이용하지 않는다. 더 휘발성 있는 매체로 이동하는 추세인 듯하다”
② 활동가가 할 일? 작가가 한 일! ‘세월호 걷는 전시’ ‘블랙마켓’ ‘더 스크랩’
- ‘블랙마켓’과 ‘더 스크랩’이 2016년 12월 한 달간 연달아 열렸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한 줄 요약이 가능할 만큼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4시간 16분 동안의 도보전시(이하 세월호 걷는 전시)’가 시작이었다. 사진가를 주축으로 미술가, 이론가가 참여해 자신의 작품을 들고 국회에서 광화문까지 4시간 16분 동안 걷는 현장 참여적 기획을 했다. 나는 내 개인사보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더 관심이 많다. 나뿐만 아니라 미술인의 대부분은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고 참여할 의지도 갖고 있다. 그런데 현장의 ‘운동에 가까운 예술’은 예술가들에게 어색하거나 또는 용납할 수 없는 방식인 경우가 많다. 처음 ‘세월호 걷는 전시’를 기획하면서도 ‘전시’에 초점을 맞췄다. 우리는 예술가니까, 우리가 늘 하던 방식으로 운동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블랙마켓’과 ‘더 스크랩’도 아트마켓, 아트페어 형식으로 진행했다. 기존의 예술과 움직임이 필요한 지점 사이의 교차점을 찾으려 했다.”
- 그 중 ‘블랙마켓’을 통해 블랙리스트 검열과 예술계 성폭력을 반대했다. 기획 단계에서는 정의가 명확하더라도, 모든 참여자가 같은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블랙마켓 기획 당시 참여자에게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다만 블랙마켓의 취지에 따라, 블랙리스트와 여성 및 소수자 대상화 문제만큼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런데 행사 당일 전까지도 여러 문의가 들어왔고, 기나긴 대화도 필요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접점이란, 배제하고 남겨진 게 아니라 어떻게든 끌어 모으고 대화하면서 같은 부분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는 광화문 광장 블랙텐트촌에서의 ‘블랙마켓’과 수백 장의 사진을 체계적으로 전시·판매한 ‘더 스크랩’에서 특히 원활한 진행이 돋보였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행사를 기획할 때 특히 신경 쓰는 부분이 있는지?
“개발자 출신으로서 학습된 뭔가가 있는 것 같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동선의 흐름에서 발생 가능한 모든 예외상황들을 경우의 수로 계산하는 것이 재밌다. 내가 기획한 모든 행사들은 사실 기존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모듈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새롭거나 다르게 경험되는 지점은 여기에서 나타난다. ‘더 스크랩’의 경우, 블라인드 전시나 작품 크기 통일하기, 사진 페어 등 이미 경험해 본 전시방식에 효율적인 상업 프로세스를 더했다. 이케아(구매목록, 사인물, 가구 등)와 유니클로(구매 데스크)의 판매 모듈을 조합했다. 물론 혼자 한 일은 없다. '블랙마켓'도 도움이 많았고, '더 스크랩'은 십 수 명의 공동 기획팀이 함께 고민한 결과다.”
- 최근 문화계 내외부에서 터져 나온 문제가 많았다. 그 중 미술계 성폭력 이슈뿐만 아니라 사진계 성폭력 문제도 계속 주시하고 있는데?
“그 일도 기획과 마찬가지다. 발언은 한 사람만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 주변을 건강하게 만들고,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에 관심 있다. 내 활동들은 모두 작가로서 해야 할(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기획자나 활동가가 할 일’이라는 구분 자체가 모호해진 지 오래기도 하고, 작가의 또 다른 역할인 셈이다.”
- 작가로서 필요에 의한, 혹은 신선한 무언가를 만들기 위한 작업의 형태가 기획으로 이어졌다는 의미인지?
“(내가) 기획을 말할 때 조심스러운 이유는, 기획이 중요한 일이자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문 기획자의 역할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기획 활동은 작업이자 놀이이고 운동이다. 작가로서 이야기를 하려면, 그 이야기할 수 있는 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이야기를 작업과 치환해 이해할 수도 있다)”
-올해 있을 활동을 미리 예고한다면?
“개인 작업과 전시에 집중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학교 구상과 출판, 서울루나포토페스티벌 축제도 준비 중이다. 그리고 ‘더 스크랩’을 함께한 십여 명의 팀이 각자의 구상을 실천하는 한 해가 될 것이다. ‘더 스크랩’처럼 현재 환경에서 필요하고 재밌는 일들이 많아질 것 같다.”
③ 작가 홍진훤의 사진
- 어떤 사진 작업을 하는지 궁금하다.
“초기 작업은 2009년 용사참사 이후부터 시작됐다. 용산참사사건 당시 외신 언론의 사진기자로 일했다. 참사 이후 사진에 관한 고민이 생겼다. 내가 현장에서 경험한 것과 그곳에서 찍은 사진의 괴리가 너무 컸고, (그 사진이) 유통되는 방식에도 회의가 들었다. 그때 기자 일을 그만두고 내 사진을 찍겠다고 결심했다. 원래 집회 참여나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용산참사 이후에는 강정, 밀양, 오키나와, 후쿠시마 문제가 한꺼번에 터졌는데, 나에겐 모두가 똑같은 상황처럼 다가왔다. 그 현장들을 찾아가 사진을 찍는데, 막상 가보니 풀밖에 없더라. 이후 비극적인 역사의 흔적 속 풀과 나무만 촬영하러 다녔다.(‘붉은, 초록’ 시리즈) 현재 출판 준비 중인 작업은 세월호 관련이다. 세월호에 탄 아이들의 수학여행 일정표를 따라 1년여 간 제주도를 오가며 사진을 찍었다.”
- 사진에는 빈 풍경이 대부분이고, 인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사진기자로 일하면서, 매일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찍었다. 결코 사람으로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걸 그 때 알았다. 나는 특정 개인의 이야기보다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 만든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래서 풍경은 풍경인데, 사람이 만든 풍경을 수집하게 됐다.”
-직접 찾아간 현장이 중요한 사진들이다.
“앞으로는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그게 좋다. 대지진이 일어나고 3년 된 시점에 후쿠시마에 가기도 했다. (후에 상담의사는 피폭된 걸 알아도 방법이 없으니 차라리 모르고 살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아직은 옛날 사람인지라 (모든) ‘그곳’에 한번쯤 가보고 싶다. 무언가 일어나면 그걸 직접 내 눈으로 보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홍진훤은…
사진작가로, 작가 김익현과 사진전문 신생공간 ‘지금여기’를 공동운영했다. 대표적인 기획 활동으로 ‘4ZINE'(2010)’, ‘지금여기’의 전시(‘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 ‘어쩌다 이런 곳까지’, ‘지금여기, 장님 코끼리 만지듯’, ‘타임라인의 바깥’), ‘4시간 16분 동안의 도보전시(2014.08)’, ’우리는 왜 달의 뒷면을 볼 수 없는가 - 더 텍사스프로젝트(2014.11)‘, ’블랙마켓(2016.12.04.)‘, ’더 스크랩(2016.12.27.-29)‘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