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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가해자가 피해자로 둔갑하는 요지경 현실

예술계 성폭력 다룬 ‘가해자 탐구_부록: 사과문작성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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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김금영⁄ 2017.04.28 11:43:20

▲‘가해자 탐구_부록:사과문작성가이드’는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 제대로 알 수조차 없는 진흙탕 싸움이 벌어지는 현실을 느끼게 한다.(사진=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

(CNB저널 = 김금영 기자) 지난해 예술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고상하고 품위 있는 것만 같았던 예술계에 SNS상 ‘#예술계_내_성폭력’ 키워드가 떠돌았다. 예술계에서 직위를 이용해 힘없는 예술계 입문 지원생들에게 성폭력을 가했다는 고발이 뒤따랐다.


그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속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억지로 입을 맞추고 끌어안았다” “미성년자가 성폭행을 당했는데 방관했다” 등 노골적인 내용이 SNS를 타고 퍼져 나갔다. 관련해 가해자로 지목된 인물들은 처음엔 사과문을 올리거나, 조용히 지위에서 물러나는 움직임을 보였다. 반면 반대로 명예훼손으로 맞고소를 진행하기도 했다.


현재도 예술계 내 성폭력 논란은 진행 중이다. 관련해 집담회가 여러 차례 열렸고, 여성예술인연대는 성폭력 상담 상설기구를 만들기 위한 성명 운동을 진행했다. 이 가운데 이번엔 ‘가해자 탐구_부록:사과문작성가이드’ 공연이 남산예술센터 무대에 올랐다.


본격 공연을 선보이기 전 광화문 블랙텐트 현장에서 만난 구자혜 연출은 “예술계 내 성폭력의 문제를 이끌어내려는 움직임이 유독 공연계에서는 뜸했다. 워낙 공연계가 서로 얼굴을 다 알 정도로 바닥이 좁은 이유도 있었다. 현재 이 이야기를 무대 위로 끌어내기 위해 준비 중”이라고 밝혔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 드디어 무대에 오른 공연.


그런데 주목 대상이 특별하다. 보통 어떤 문제가 생기면 사태의 문제점이 어디에서 발생했는지 그 과정을 따라가기 위해 피해자의 이야기에 스포트라이트가 쏠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번 공연엔 피해자의 모습이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등장하는 건 가해자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가해자들 주위에서 사태를 방관한 자들이다. 이들 또한 예술계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 있음을 암시하는 부분이 공연 내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특정 인물을 가리키진 않는다. 예술계 내 성폭력이라는 실질적인 현실의 이야기에, 상상이 곁들여져 당시 상황을 추측해 보는 형태다.


처음 무대에 등장한 이들은 매우 엄숙하게 선언한다. 예술계 내 성폭력 논란이 벌어진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하며,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끔 경계하기 위해 사태를 다시 짚어보는 책 ‘가해자 탐구_부록:사과문작성가이드’를 집필하게 됐다고 밝힌다. 이들의 대사는 책에 넣기 위한 내용으로 구성된다.


▲극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 더 정확하게는 가해자 주위에 있었던 방관자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예술계 성폭력 사태를 이야기한다.(사진=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

첫 시작은 반성이다. “당시 사태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제자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내 잘못도 있다” 식이다. 그런데 극이 진행될수록 비난의 화살이 오묘하게 조금씩 돌아가기 시작한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로.


“한 명이 성폭력을 당했다고 고백하니, 우후죽순 갑자기 자기도 당했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무려 6년이 지난 다음에야 성폭력을 당했다고 했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적극적으로 거부의 의사를 표하지 않았다” 등 계속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가해가자 오히려 당한 거 아냐?” 생각이 들며 피해자가 꽃뱀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 지점에서 느껴지는 섬뜩함이 있다. ‘가해자 탐구_부록:사과문작성가이드’ 도록은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실린 송섬별 번역가의 말을 소개한다. “어떤 사건에 대해 기록하는 역할을 문인인 자신들이 독점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극 중 가해자의 주변 인물들은 예술계에서 한 위치를 차지한 자들이다. 즉 이들은 사태를 반성하기 위한 기록을 한다고 하지만, 이들의 말을 통해서 적히는 기록들은 결국 가해의 기록일 뿐, 피해자의 입장은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서 이들은 “왜?”라는 다시금 논란이 될 수 있는 여지를 아주 은근슬쩍 남긴다. 표면적으로는 유감과 반성의 입장을 드러내면서도, 말끝마다 “왜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그랬을까?” “왜 피해자는 당하고도 바로 목소리를 내지 않았을까?” 등 관점의 다각화를 꾀하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꾸는 시도를 한다.


이건 예술계 내 성폭력뿐 아니라 특히 연예계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성폭력 의혹에서도 흔히 불거지는 일이다. 처음엔 피해 여성의 고발에 가해자에게 비난이 쏟아지지만, 수사 과정 속 돈을 노린 꽃뱀 의혹이 불거지면서 순식간에 비난의 화살이 바뀐다. 나중엔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 제대로 알 수조차 없는 진흙탕 싸움이 벌어진다. 누구도 반성하고, 누구도 사과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에 대해 유감”이라는 표현만이 성한다. 그리고 이 싸움판을 자극적인 언론 보도들이 더욱 부추긴다.


이 가운데 ‘가해자 탐구_부록:사과문작성가이드’는 가해의 역사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살피고, 가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가해 사실을 완벽하게 매장하고 있는 현실에 비판과 감시의 시선을 세운다. 극에는 굉장히 많은 의자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거기엔 정적이 흐른다. 아무도 그 의자에 앉아 있지 않는다. 마치 사태를 방관한 자들처럼. 하지만 이 정적에 올바른 기록의 역사를 세워야 함을 극은 이야기한다. 공연은 남산예술센터에서 4월 3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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