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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미친 지구를 지키려는 더 미친 몸부림 “지구를 지켜라”

잘못 지적하면 ‘미친 자’ 취급되는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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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48호 김금영⁄ 2017.08.11 13:45:50

▲'지구를 지키겠다'는 사명감으로 재벌 3세 만식을 납치하는 순이(왼쪽, 김윤지 분)와 병구(키 분).(사진=연합뉴스)

(CNB저널 = 김금영 기자) “돈도 실력이야.” 지난해 이 한 마디가 대한민국을 들끓게 했다. 과거엔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면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통용되는 시대였지만, 현재는 그렇지 않다. 가진 자들과 못 가진 소시민들 사이 삶의 빈부 격차가 점점 벌어졌다.


이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신조어 ‘금수저’다. 어느 순간부터 흔히 등장하게 된 이 용어는, 부자인 부모님을 만나 태어날 때부터 온갖 혜택을 다 누리는 자식 세대를 칭한다. 금수저 아래 은수저가 있고, 또 그 아래엔 동수저, 그리고 가장 아래엔 흙을 퍼먹는다는 흙수저가 있다. 계급 차이는 그 아래 세대 자식들까지 이어지고, 이 반복되는 절망의 굴레는 특히 젊은 세대에게 “노력해도 어쩔 수 없다”는 심리적 박탈감과 “니네 부모를 원망해”라는 어처구니없는 발언까지 나오는 상황을 만들었다.


연극 ‘지구를 지켜라’가 이 민감한 금수저 이야기를 끌고 왔다. 동명의 영화가 원작인 이 작품은 지난해 연극으로 첫선을 보였다. 태어날 때부터 세상의 온갖 부조리를 겪어 온 병구가 외계인의 지구 파괴 음모를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그린다.


▲연극 '지구를 지켜라' 포스터. 2003년 개봉된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외계인으로부터 지구를 지키겠다"는 황당한 사명심에 사로잡힌 청년 병구의 이야기를 그린다.(사진=PAGE1)

병구는 “세상이 이렇게 엉망이 된 것은 지구에 몰래 침투한 외계인들의 소행”이라며,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서민들에게 온갖 악행을 저질러 온 유제화학 사장 만식을 납치한다. 병구의 눈에 만식은 안드로메다 PK-45 행성에서 온 외계인이자 지구 총사령관이다. 병구는 만식에게 “개기월식이 오기 전 너희 별 왕자를 만나게 해달라”며 고문하기 시작한다. 지구를 멸망시키려는 왕자를 설득하겠다는 게 병구의 목적이다.


초연에서는 원작과의 싱크로율을 높여 마음에 많은 상처를 입고 머리가 이상해진 병구, 그리고 사회적·경제적으로 성공한 중년 사업가 만식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런데 이번 재연에서는 변화를 거쳤다. 만식은 외계인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을만한 뛰어난 두뇌를 가졌지만, 그가 처한 환경 때문에 능력을 펼치지 못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많은 잠재력과 능력을 가졌지만, 그걸 펼칠 기회조차 제대로 부여받지 못하는 청춘을 대변하는 모습이다. 만식은 타고난 외모와 재력을 갖고 태어난 안하무인 재벌 3세로 톤이 변경됐다. 원작 영화가 2003년 개봉했는데, 좀 더 2017년의 현실을 반영하겠다는 의도다.


일반적인 상식에서 보자면 극 속의 병구는 미친 인물이다. 첫 등장 때부터 알 수 없는 용어들을 초스피드로 쏟아내고, 머리엔 요상한 헬멧도 쓰고 있다. 외계인에게 세뇌당하지 않기 위한 용도라며 물파스 고문을 가하고, 연신 “네가 외계인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고 외친다. 이 주장이 허무맹랑해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병구의 말에 어처구니없어 하는 만식의 표정과 관객의 표정이 오버랩 된다. 그럴 수밖에 없다. 병구는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기준에서 동떨어진 인물이니까. 외계인 광신도 같기도 하다.


슈퍼맨은 초인적인 능력, 배트맨은 첨단 기술
병구는 “지구를 지킨다”는 대쪽 같은 의지


▲태어났을 때부터 불우한 환경을 마주하며 자란 병구(왼쪽, 키 분)와 재벌 3세로 호화스러운 삶을 살아 온 만식(김도빈 분)의 만남은 순탄치 않은 과정 속 이뤄진다.(사진=PAGE1)

그런데 이 ‘미친 자’로 여겨지는 병구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단순 공상 과학에 빠진 미친 자라고 하기엔, 매우 처절하다. 일단 그의 “너희 외계인들로부터 지구를 지키겠다”는 의지에서 순수함이 느껴진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학교 폭력, 아동 학대, 노동 인권 등 수많은 사회 문제에서 시선을 돌리고 있다.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들에게, 매 맞는 가족에게, 정리 해고되는 노동자들에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 저렇게 되는 것”이라며 피해자와 가해자가 순식간에 바뀌기도 한다.


만식의 태도 또한 그렇다. “너희는 태생부터 찌질해서, 그렇게 살아올 수밖에 없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며 마치 자신이 우월한 사람인 양 다른 사람들을 짓밟고 일어서려는 태도를 합리화한다. 이 가운데 병구는 부조리한 세상의 구조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다. “불행을 무조건 남 탓으로 돌리려는 너희들” “남 탓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나약한 놈”이라는 만식의 말에 흔들리기도 한다. 100%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었던 자신의 모습을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기 연민에 빠져 점점 삐뚤어가는 세상에서 눈을 돌릴 수는 없다고, “이 사랑하는 지구를 계속 엉망으로 만드는 너희들로부터 지켜내겠다”며 용사로 나선다. 슈퍼맨이 초인적인 능력, 배트맨이 첨단 기술을 입은 무기들로 지구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면, 병구는 “왕자를 만나겠다”는 일관된 의지로 맞선다. 남들이 봤을 땐 미친 짓일지도 모르지만, 포기하지 않는 그 의지에 나중에는 주목하게 된다. 사회에서 소위 가장 약자로 분리되는 병구가 "지구를 지키겠다"고 나선 것 자체가, 정작 힘을 가진 자는 가만히 있는 왜곡된 현실을 보여준다.


▲사회의 부조리함을 풍자하는 연극 '지구를 지켜라'의 한 장면. 재벌 3세 만식 역의 허규(왼쪽)와 불행한 삶을 산 병구 역의 강영석이 열연 중이다.(사진=연합뉴스)

이 병구를 박영수, 정욱진, 강영석, 키(샤이니)가 연기한다. 초연에도 출연한 키는 이 공연을 통해 뮤지컬뿐 아니라 연극 배우로서의 가능성도 확인시켜준 바 있다. 키는 “원작 영화의 굉장한 팬”이라 자신을 소개하면서 “초연했을 때 느낌을 잊지 못해 이렇게 또 무대에 오르게 됐다. 다시 한 번 열심히 무대에 오르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병구와 대립하는 만식 역할로는 허규, 김도빈, 윤소호가 열연한다. 초연과 비교해 젊어지고, “돈이라면 얼마든지 줄게”라며 더 시건방져진 만식을 연기한다. 병구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만식 납치를 돕는 소녀 순이는 김윤지와 최문정이 연기한다. 납치된 만식의 행방을 따라가는 추 형사 및 극의 흐름을 매끄럽게 만드는 멀티 역할은 육현욱과 안두호가 맡았다.


원작 영화가 2003년 개봉한 이래 어언 1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 지났다. 그때와 비교해 오늘의 지구는 좀 더 나아졌을까. 오히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끔찍한 뉴스들이 쏟아져 나오는 현실이 안타깝다. 진짜 극중에서처럼 인간을 지켜보는 외계인들이 ‘지구 멸망’ 버튼을 손에 쥐고 하루하루 ‘더 기회를 주어야 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연극 ‘지구를 지켜라’를 마냥 즐겁게 볼 수 없는 이유다. 공연은 충무아트센터 중극장블랙에서 10월 22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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