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오빠는 풍각쟁이야~머~ 오빠는 심술쟁이야~머~” 1930년대에 만들어지고 널리 불린 ‘오빠는 풍각쟁이’. 가사를 단순히 보면 평범한 일상 속 오빠와 여동생의 흔한 대화 같지만, 실상은 시대의 아픔을 담았다. 툭하면 트집 잡고, 편지를 훔쳐보고, 좋은 반찬을 다 빼앗아 먹는 오빠는 일본, 그리고 늘 오빠에게 당해 서러움을 느끼는 여동생은 일제 치하의 우리 민족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 노래가 2017년 한 여름, 군산의 적산가옥에서 불렸다.
적산(敵産)은 ‘자기 나라의 영토나 점령지 안에 있는 적국의 재산’을 뜻한다. 그리고 한국에는 적산가옥이 있다. 광복 후 일본인들이 한국에 남겨놓고 간 건물로, 특히 군산에서 적산가옥을 많이 접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으로의 쌀수출 관문 역할을 했던 항구도시 군산에는 한때 일본인이 1만 명 가까이 거주하기도 했다. 일제 치하 당시 그 집에 살던 사람들은 떠나갔지만, 여전히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가 살고 있다.
적산가옥은 먼 과거부터 현재까지 민감하게 이야기되는 부분이다. 작년 개봉된 영화 ‘아가씨’에 등장한 대형 일본식 가옥에도 일부 사람들은 불편함을 느꼈고, 원작 소설의 배경을 따르지 않고 왜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이 등장해야 했는지에 대한 의문도 많이 제기됐다. 아픈 역사와 맞물리는 적산가옥에 대해 보존과 적폐청산, 개발까지 수많은 이야기들이 오갔고 현재도 오가고 있다. 이 민감한 장소에서 아픈 노래가 불렸고, 바로 이 현장에 한국인 작가 김제원과 일본인 작가 유스케 카마타가 함께 있었다.
김제원과 유스케 카마타는 2017년 여름 군산과 김제 그리고 인천에 남아 있는 적산가옥을 찾아가는 ‘더 하우스 프로젝트(The House Project)’를 진행했다. 현재 적산가옥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한국인 작가와 일본인 작가로서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과정을 영상에 담았다. 이 프로젝트는 현재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공동의 리듬, 공동의 몸’전에서 12월 3일까지 전시된다.
김제원은 건축과 공간에 관련된 설치미술 작업을 해 왔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 바로 군산이다. 어릴 때 뛰어놀면서 자연스럽게 적산가옥을 봤다. 김제원은 “오래되고 무너지기 시작한 일본식 가옥은 아름다움과 그로테스크함을 동시에 가진, 어두우면서도 신비로운 공간이었다. 어떤 미스터리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곳으로 느껴졌다”고 회상했다. 특정한 장소가 지닌 역사와 이야기가 그의 작업에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듯 처음엔 ‘오래된 건물’로서 적산가옥에 접근했다. 그런데 건축 양식에서 접근한 적산가옥은 근대 건축 기술을 알려주는 자료였다. 하지만 적산가옥은 그것으로만 이야기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수많은 역사적 레이어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하루하루 쌓여 왔었고, 이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다양하게 존재했다. 그래서 더 적산가옥이 궁금해졌다.
적산가옥을 함께 마주한 한국인 작가와 일본인 작가
유스케 카마타는 일본 근대 가옥의 건축 구조를 시각적으로 접근하는 작업을 만들어 왔다. 그는 미국에서 일본식 가옥을 발견한 뒤 적산가옥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처음엔 비밀문서로서 일반인에게는 공개가 되지 않았었던 과거 건축 자료를 살펴보다가, 세계 2차 대전 시기 일본에 18년 동안 있었던 건축가 안토닌 레이먼드(Antonin Raymond)의 이야기를 발견했다. 그는 미국에 일본식 가옥을 세웠는데, 이유가 충격적이었다.
전쟁 중 미국은 일본 본토에 터뜨릴 폭탄을 실험하기 위해 미국 유타 주의 사막에 일본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살린 가옥을 지어 수없이 실험했다. 당시 일본 본토에서는 폭탄과 화재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많은 일본식 가옥이 지어졌고, 타이완과 한국에는 일제강점 아래 일본식 가옥들이 지어졌다. 일본식 가옥은 같은 시기에 같은 형태로 지어졌지만, 다양한 이유로 파괴됐다. 그렇게 다른 나라에 지어진 일본식 가옥에 관심을 갖고 살펴보다가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미국뿐 아니라 타이완 등 세계 곳곳에서 일본식 가옥을 발견했다. 그리고 한국 속 적산가옥을 마주했다.
적산가옥에 관심을 가진 두 작가가 처음 만났을 때 적산가옥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서로 놀랐다고 한다. 김제원은 “한국과 일본의 역사 교육이 다르게 이뤄지고 있다는 걸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알게 됐다. 유스케 카마타는 적산가옥의 의미 자체에 대해 모르고 있더라”고 말했다. 유스케 카마타 또한 “일본에서 교육을 받을 때 일제강점기라는 단어 자체도 듣지 못했고, 그래서 당연히 적산가옥의 존재 또한 몰랐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일제 강점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적산가옥은 어떠냐’는 질문을 많이 들었다. 나는 이 역사에 대해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두 젊은 작가는 오늘날의 적산가옥을 직접 찾아가보기로 했다. 이들이 집중한 건 현장, 그리고 오늘의 이야기다. 김제원은 “인터넷 검색창에 적산가옥을 입력하면 역사적, 건축적 정보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일반적인 자료가 아닌, 현재 적산가옥에 살고 있는 거주민들이 그 건축을 통해 바라보는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에 대한 개인의 시각과, 이미 사라져버린 많은 근대 건축물들에 대한 그들의 기억과 견해가 궁금했다. 그들이 오래된 적산가옥에 살면서 건물을 보존하고 있는 이유와,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곳에 살면서 마주했던 상황과 현장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리고 이 건물들이 현대의 우리에게 어떠한 역사적, 사회적 의미로 남아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고 취지를 밝혔다.
현재 적산가옥에 사는 거주민들은 그 건물을 아직까지 집으로서 사용하고 있거나 갤러리, 카페 등으로 재사용하고 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인천에 있는 적산가옥을 관동갤러리로 만든 토다 씨와의 인터뷰였다고. 토다 씨는 197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 살았다. 그는 일본어도, 한국어도 유창하다. 유스케 카마타는 “일본인으로서 한국에 오래 살며 현장을 느껴 온 그에게 그가 생각하는 일제강점기의 역사, 그리고 그가 살아온 역사에 대해 묻고 싶었다”고 말했다.
인터뷰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뤄졌다. 토다 씨가 테이블 가운데 앉고 그 양쪽 끝에 김제원, 유스케 카마타가 앉았다. 이들은 각자 궁금한 사항을 질문했는데, 사전에 서로 질문 내용을 공유하지 않았다. 유스케 카마타는 일본어로, 김제원은 한국어로 토다에게 질문을 했다. 토다 씨는 유스케 카마타에게 일본어로 일본인으로서의 견해를 답했고, 김제원에게는 한국어로 한국에 오래 산 일본인으로서의 경험과 생각을 답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내용을 확인한 결과 놀랍게도 두 작가가 궁금했던 점이 매우 비슷했다고 한다. 서로 대화를 해야 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각자 따로 탁상공론을 펼치는 현실과는 달리.
토다 씨 또한 카마타처럼 일제 강점기라는 단어도 모른 채 한국에 왔다가 정말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처음엔 “왜 나는 겪지도 않은 일인데 왜 나한테 뭐라고 하지? 왜 나는 계속 미안해야 하는 거지?”라는 생각에 억울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적산가옥에 살게 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이는 그가 오랜 세월을 머금은 적산가옥에 살면서 그 공간을 일반 관람객들을 위해 열어두는 이유와도 연결된다. 사실상 생활의 편의를 위해서는 신식가옥 또는 아파트에 사는 게 편하다. 그런데 적산가옥에 계속 사는 건 이 건물을 지키기 위해서란다. 그것도 일본의 권위를 나타내는 게 아니라 참회를 위해서.
‘더 하우스 프로젝트’를 이끄는 핵심은 함께 하는 대화
김제원은 “토다 씨는 한국 정부가 적산가옥을 대하는 지난 30년의 과정을 몸소 겪으며 지켜봤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적폐청산의 취지로 적산가옥을 없애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 결과 김영삼 정부 때 한국의 근대 건축으로서 중요성과 의의를 지닌 조선총독부가 철거되고, 많은 적산가옥들이 사라졌다”며 “하지만 이때 토다 씨는 오히려 과거를 기억하는 일본인 일부가 좋아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토다 씨가 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저는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다음 세대로 전하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일들을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때 일들을 떠올리게 해야 하죠. 도대체 그 아픈 시대는 뭐였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로서 이 집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요. 한국의 적산가옥이 없어지면 더 좋아하는 게 일본의 정부라고 생각해요. 침략의 역사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그들이기에 그 증거인 적산가옥이 없어지길 속으로 바랐을 수도 있어요. 겉으로는 아깝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빨리 없애’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비슷한 이야기는 군산의 적산가옥에서도 나왔다. 사가와라고 불리는 가옥의 거주민 유희주 씨는 “근대 유산들이 많이 없어졌다. 나도 이 집을 없애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적산가옥을 찾아와 무릎을 꿇고 울면서 사죄한 일본인이 있었다. 그는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많은 조선인을 핍박해 이 집을 만들었겠느냐’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설명했다. 그가 적산가옥을 개조하려다 그대로 두게 된 이유다.
인천에서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빙고(氷庫)를 카페로 활용하고 있는 건축가 이의중 씨 또한 “적산가옥은 지역 활성화 차원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이 이야기를 접하고 생각해볼 기회를 다음 세대에도 마련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비슷한 의견을 보였다.
김제원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적산가옥을 바라보는 태도는 변해 왔다. 한때는 쳐다보기도 싫은 부끄러운 역사의 잔재로 다 없애버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런데 2000년대에 들어 근대문화유산 보존에 대한 인식이 점차 생겨나면서, 과거의 어두운 역사도 우리가 되새기고 지켜야 하는 것으로 이야기되면서 보존으로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다”고 짚었다. 이어 “이후엔 지역경제 활성화 또는 도시 재개발이라는 미명 하에 일제강점기 건축과 가옥들이 남아 있는 특정 지역과 개인 소유의 주거 건물들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관광지화 시켜왔다”고 덧붙였다. 즉 거주민의 말은 이처럼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시각이 변하듯이 우리의 다음 세대에도 똑같은 건물을 남겨주고 그들이 스스로 그것을 판단할 기회를 남겨둬야 한다는 것.
관련해 김제원과 유스케 카마타는 ‘더 하우스 프로젝트’가 일회성으로 끝나길 바라지 않는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적산가옥을 역사적으로 바라봤을 때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반대의 의견 또한 있을 터다. 이들은 “두 번째 프로젝트에서는 목포, 대구, 포항, 부산 등 일본식 가옥들이 아직 남아있는 다른 도시들을 다니면서 다른 의견 또한 들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건 싸우는 게 아닌, 대화를 위해서다.
김제원은 “서로 다른 역사 교육을 받고 자란 우리는 정말 많이 다르다. 이번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 한국에 남아 있는 적산가옥은 단지 한국 역사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이건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가지고 있는 역사라는 것을 느꼈다. 한쪽만 관심을 갖고 이야기할 게 아니라, 함께 이야기하면서 풀어가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건축이 내재하고 있는 여러 겹의 역사적 문제들을 이 프로젝트를 통해 함께 돌아보고자 하며,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이 건축을 어떻게 남기고 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고 덧붙였다.
유스케 카마타는 “적산가옥에는 가해자의 역사, 피해자의 역사가 뒤엉켜 있다. 각자 다른 관점을 지닌 이 두 가지 시선을 모두 결합해서 보여주고 싶다”며 “내게는 이 모든 것이 올바른 역사를 알아가고 공부하는 과정이다. 일방적인 이야기가 아닌 함께 하는 대화와 토론이 이 프로젝트의 핵심”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