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그래서 왕자님과 공주님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일반적인 동화 속 해피엔딩. 세상이 동화처럼 행복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동화를 비튼 잔혹 동화가 더 어울리는 세상이다. 각자의 크고 작은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해피엔딩보다 새드엔딩에 더 가깝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동화 속 해피엔딩을 꿈꾼다.
이런 동화 같은 세상을 꿈꾸게 하는 전시를 만났다. 피비갤러리가 정승혜 작가의 개인전 ‘마법의 갑옷과 신비의 칼을 주오’를 4월 7일까지 연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전면의 벽에 설치된 책 한 권이 보인다. 이 책을 펼치면 커튼이 바람에 나부끼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시선을 돌려 오른쪽을 바라보면 전시장 바닥에 과일 모양의 인형들이 여기저기 흩뿌려진 모습이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모던한 분위기의 전시장에 갑자기 펼쳐진 동심을 자극하는 장면. 헨젤과 그레텔이 숲속에서 과자로 만든 집을 발견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신기하고도 들뜨는 느낌이다.
이 과일들을 둘러싸고 각 벽면에 또 다른 책들이 설치됐다. 모두 네 권이다. 각 책을 펼치면 또 새로운 그림들이 나온다. 한 책에는 포도, 바나나, 사과 등 과일들이 점점 많아지는 그림, 또 다른 책에는 사자와 곰 등 여러 동물들과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그림, 마지막 책에는 한 소녀가 말을 타고 어딘가로 떠나는 그림들이 담겼다.
이 그림들은 작가의 삶에서 비롯됐다. 그림의 시작은 작가의 유년시절 기억에서 파생됐다. 2001~2005년 선보인 ‘텅 빈 공간’ ‘또 다른 방’ 등 초창기 작업 때는 텅 빈 공간에 어두운 색 계열에 사람 한 명 등장하지 않는 화면을 그렸다.
“저는 평범한 삶을 살았어요. 하지만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나름대로 롤러코스터 같은 굴곡이 있죠. 저 또한 그랬어요. 나름대로의 굴곡이 있었죠. 또 저는 예민한 편이었어요. 누구에게는 그냥 흘려보낼 수 있는 일이라도 좀 더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편이었죠. 이 점이 작업에 반영됐어요. 가정환경이 다소 불우한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는 웃는 것조차 죄스러운 기분이었죠. 어둡고 복합적인 감정이 그림에 자연스럽게 반영됐던 것 같아요.”
우울함은 2006년 ‘이기적 선착장’에서 정점을 찍었다. 제한된 방에 갇혀 있었던 화면이 선착장으로 이동되며 공간이 확장됐다. 선착장은 머무르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떠나는 장소다. 어머니와 사별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 고민하고 매달렸던 시기 작가의 심정이 반영된 장소였다. 이후 5년 동안 공백기의 시간이 찾아 왔다. 이 5년은 중요하다. 방황했지만 또 다른 전환점을 맞게도 해준 시기였다.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고민했어요.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다가 조금씩 내려놓기 시작했어요. 제 스스로 불우했던 시기의 감정들을 버리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비우기 위해서는 제 안에 무언가를 가득 채우는 과정이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해 읽기 가벼운 동화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이전에 저는 보이는 그림만 생각했는데 동화책에는 그림과 글이 적절히 배합돼 있었어요. 그 방식에 끌려 한 권, 두 권 동화책을 읽다보니 글과 그림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때 느꼈어요. 표면적으로 눈으로만 읽히는 그림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요.”
말수 적은 작가, 그림으로 세상에 수다를 떨다
본래 작가는 글을 쓰는 것도 좋아했다. 긴 글 대신 짧은 에세이 식으로 자신의 심경을 담곤 했다. 이를 작가는 “세상에 주저리주저리 토씨를 다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예민한 작가는 어떤 일이 있을 때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왜?” 하며 궁금해 하는 스타일이다. 그림을 공부할 때도 대학교 은사의 “공간에 집중해 그림을 그려보면 어떻겠느냐”는 조언을 따랐지만, 거기에 나름대로의 주저리주저리 토씨를 달다보니 현재에 이르게 됐다고.
“저는 원래 수다스러운 편이 아니에요. 말수가 적죠. 그런데 그림을 그리면서 세상에 주저리주저리 수다를 떠는 기분이 들었어요. ‘내가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이었나’ 신기했죠. 제 안에 속 시원하게 풀어내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림과 글 작업을 병행하면서 부정적이고 격한 스타일이었던 그림에 다소 숨 쉴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죠.”
2012년 ‘온화함을 위한 차가운 벽’ 작업에서는 본래 추상적이었던 스타일에서 벗어나 형태를 더 알아볼 수 있는 쪽으로 이동했다. 이후 부정적인 시각에서 긍정적인 방향을 바라보려는 시도가 ‘여린 과거를 지킨 강건한 당신을 위해’(2013) ‘안녕, 무지개’(2015) ‘번뇌의 달은 모두 별이 되리’(2016)에서 엿보인다. 초창기 작업 때 ‘텅 빈 공간’으로 외로움과 박탈감을 이야기하던 작가가 ‘번뇌의 달은 모두 별이 되리’라며 세상을 향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
특히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벗어나 사람들과 함께 상처를 나누고 치유하려는 노력이 이번 전시 ‘마법의 갑옷과 신비의 칼을 주오’에서 돋보인다. 여기서 마법의 갑옷은 누구에게도 상처받지 않게 해주는 존재다. 신비의 칼은 상대방을 공격해 상처를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는 정도의 역할을 한다. 작가의 그림 속 사람과 동물들, 소녀는 옷이 찢기고, 서로 싸우기도, 울기도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갑옷을 갖춰 입고 웃으면서 앞을 향해 걸어 나가는 모습이다.
이 이야기들을 담은 네 권의 책이 마치 창문처럼 전시장 벽에 설치됐다. 작가는 “전시장 공간을 보고 창을 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전시장의 책을 보면서 스스로의 마음의 창을 열어보길 바라는 마음도 담았다. 또 세상을 향해 열어보려는 창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바닥에 깔린 과일들은 상처받은 마음들이다. 한 입 베어 물린 과일도 있고, 멀쩡한 과일도 있다. 그리고 각 과일엔 “괜찮아”라는 문구가 하나하나 적혔다. 작가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했던 말, 그리고 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건네는 위로다.
“매몰된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에 상처받을 때가 많았어요. 그때 마치 마음을 베어 물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죠. 이번 전시의 과일들은 그 상처들을 상징해요. 다른 사람들도 이 과일들처럼 저마다의 자잘한 상처들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죠. 저는 거기에 작은 위로를 건네며 치유의 가능성을 바라보고 싶어요.”
작가는 공백 시기 읽었던 동화책들 중 기무라 유이치의 ‘안녕, 가부’를 특히 좋아한다고 한다. 이 동화는 마냥 밝지만은 않다. 늑대를 사랑한 염소 이야기로, 약육강식으로 점철된 세계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갈등하는 동물들이 등장한다. 그로테스크하고 우울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마음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의 아름다움도 담겼다. 비극과 희극이 공존하는 우리네 삶. 비극이 닥쳐올 때도 희극의 순간을 다시금 기다리게 해주는 희망, 그것이 진정한 해피엔딩이 아닐까.
작가는 “아무리 힘들어도 삶은 계속된다”고 말했다. 이상적인 동화 속 해피엔딩처럼 마냥 행복할 순 없다는 것. 그럼에도 주저앉지 않는다. 작가는 “우울한 순간들은 계속 찾아온다. 하지만 주저앉기보다는 나름대로 주저리주저리 토씨를 달며 새로운 방향을 향해 조금씩이라도 한 걸음씩 딛고 싶다”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