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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칼럼] 4년 전엔 통일대박論, 지금은 “안 돼”論…‘내 말로 나 찍기’는 양반-당쟁 사회에선 예삿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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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최영태 CNB뉴스 발행인⁄ 2018.10.08 10:09:59

 

최영태 CNB뉴스 발행인

지난 1일 국회에선 재밌는 문답 놀이가 이어졌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4년 전 조선일보의 ‘통일이 미래다’ 시리즈를 인용해 “남북한이 통합되면 6000조 규모의 자원 강국이 될 것이라는 당시 조선일보 보도에 신빙성이 있느냐”고 묻자 조명균 통일부장관은 “그런 잠재적 가능성이 있다는 데 동의한다”고 대답했다. 


박 의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4년 전 독일 드레스덴에서 낭독한 이른바 ‘드레스덴 선언’도 낭독했다. 4년 전 박 전 대통령이 “남북교류협력사무소 설치를 북측에 제안하고자 합니다”고 할 때 박수를 쳤던 당시 새누리당의 후신인 자유한국당은 왜 비슷한 사업이 진행되는 지금은 뒤돌아 앉아 있냐는 비판이었다.

 

민주당 송영길 의원도 이낙연 국무총리에게 “2014년도 조선일보의 ‘통일이 미래다’ 시리즈를 보셨느냐. 지금은 왜 이런 보도가 안 나올까요”라 물었고 이 총리는 “나도 어리둥절하다. 통일을 그렇게 갈망했던 분들이 왜 그렇게 평화는 한사코 반대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4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의 '드레스덴 연설'을 낭독한 뒤 이낙연 총리에게 "4년 전과 지금이 왜 이리 다르냐"고 질문한 박주민 의원 관련 뉴스를 보도하는 채널A의 화면.  

 

FTA-강정기지로 제 발등 찍었던 민주당 

 

이런 코미디는 한두 번이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FTA를 추진했던 민주당이 정권이 바뀌어 이병박 전 대통령이 FTA 체결을 서두르자 극구 반대하다가 “당신들이 먼저 추진한 일을 마무리 지으려는데 왜 반대냐?”는 비난을 들었다. 이에 민주당 측은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는 상황론으로 맞섰지만, 결국 민주당 스텝만 꼬일 뿐이었다. 


제주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도 마찬가지였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 추진된 강정 기지 건설을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완성하려 하자 주민과 시민단체-야당의 격렬한 반대시위가 이어졌고, 역시 “당신들이 시작한 일을 이제 와선 반대하냐”는 비난이 주어졌다.

 

자신의 과거 발언으로 현재가 공격 당하면 아프다. 일관성을 갖추지 못한 이랬다저랬다 인간으로 낙인찍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는 수도 없다. 뉴스에 가끔 나오지만, 발언자 이름을 가리고 읽으면 도대체 이 주장이 과거 새누리당의 것인지, 요즘 민주당의 것인지 헷갈리는 게 너무나 많다. 정당의 이념지향이 제대로 정립돼 있다면 발언 주체를 가리고 읽어도 대충 짐작은 돼야 하는데, 한국에선 그게 영 잘 안 된다.

 

9월 27일 서귀포시 강정동 제주해군기지 정문 앞에서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주민회가 국제관함식 즉각 취소를 요구하는 시위를 열고 있다. 강정 해군기지는 노무현 정권이 시작했고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계속 추진돼 10일 관함식이 열릴 예정이다.(사진=연합뉴스)  

이런 현상은 결국 논리부재-입장부재를 근거로 지적할 수밖에 없다. 논리가 없으니 입장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현상이다. 그래서 그런가? 독일-프랑스에서는 주관식(논리)으로 대입 합격자를 걸러내도 아무 문제가 없지만 한국에서는 그랬다가는 대번에 난리가 벌어질 게 뻔하고, 그래서 영원히 4지선다형 객관식 찍기로만 명문대 합격자를 가려낼 수밖에 없는 게? 

 

‘내로남불’이 한국처럼 심한 나라 또 있나?

 

물론 자신의 과거 발언이 현재 자신의 발등을 찍는 현상은 구미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그러나 한국처럼 자주는 아니다. 이는 한국에서 “사정에 따라” 여러 주체들이 수시로 말을 바꾸는 데 너무나도 능수능란하기 때문이다. 내로남불이니 ‘그때그때 달라요’라는 비아냥 전문용어가 한국에서 자주 쓰이는 이유다. 정치니 국가안보니 하는 중차대한 일을 마치 중국의 변검(变脸: 얼굴 가면을 수시로 바꾸는 기술)하듯 하는 한국은, 자칫 외국에게 아주 우스운 나라로 비칠 수 있다.
‘그때그때 달라요’가 이렇게 심한 이유를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의 책 ‘인문학의 거짓말’에서 해석해내고 싶다. 책 서문의 한 문장을 보자. 
 

문명이나 문화의 서양어 어원에는 글이나 문자라는 것이 없는데 한자어로 번역되면서 그 점이 특별히 강조되었음은 역시 전통적으로 문을 중시한 문화였기 때문이다.(18쪽)

 

문명은 영어 civilization의 번역어고, 문화는 culture의 번역어다. 번역은 물론 개화기에 일본인이 했다. 박 교수의 주장인즉, civilization이든 culture이든 원래 서양에서는 ‘글월 문’ 개념이 없었는데, 한자화 되면서 ‘글월 문’이 들어가는 유교적 현상이 발생했다는 얘기다. 


civilization의 어원은 civitas(城 또는 도시) → civil(도시민)을 거쳤기에, 중세 장원을 빠져나와 도시에 가서 도시민 생활을 하는(civilize: 도시민이 되다) 게 바로 문명화 과정이었다. 글월 문을 할 줄 알건 말건 자유도시에 들어가 자유도시민으로 살면 그게 바로 문명화였다. 사람을 땅의 일부로 간주하는 중세 장원, 신분제를 벗어나 자유가 보장되는 도시에서 계급 간의 새로운 질서를 잡아가는 과정이 서양의 문명화였다. 


culture 역시 cultivate(작물을 키우다)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듯 ‘의도적으로 키우다, 배양하다, 양육하다’는 의미에서 나왔을 뿐, ‘글월을 배우다’와는 근본적으로 상관없는 서양 개념이다. 


따라서 civilization과 culture의 직역은 ‘도시민化’, ‘배양’ 등이 맞지만, 문(文)을 최고 가치로 치는 한자 문화권에 오면서 각각 文명, 文화라는 ‘글쟁이-선비가 좋아할’ 번역어로 자리잡았다는 게 박홍규 교수의 지적이다.

 

기원 전 4세기 경 완성된 그리스의 야외 노천극장. 이렇게 인공의 힘이 가해진 것이 서양의 문명 세계이며, 멀리 보이는 숲-자연은 그와 대립하는 야만의 세계다. 이처럼 서양에선 문명이 꼭 '글월 문'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문명 개념이 동양으로 오면서 '글월 문'과 연결된 文明으로 번역된다. (사진=위키피디아)

 

서양의 ‘人學’이 동양에선 ‘인文학’으로 번역되는 이유

 

7가지 자유학문(인문학)을 그린 12세기 독일의 그림. 유럽의 자유학문에서도 글은 중요했지만, 문사(文士)가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체제를 완성한 중국과는 사정이 많이 달랐다.(사진=위키피디아)

文 자를 넣기 좋아하는 한자 문화권의 습관은 무서울 정도다. 인문학으로 번역되는 영어의 Humanities 또는 Human Studies 단어에도 원래 ‘글월 문’의 개념은 없다. 글자만을 보면 인간학 또는 人학으로 번역하면 되는 단어였지만, 한자화되면서 준엄하게 ‘인文학’(사람을 글월을 통해 파악하는 학문)이 돼버렸다. 서양에서는 글월 문에 통달하지 않아도 인간 연구(Human Studies)를 할 수 있지만, 한자 문화권에서는 선비 사(士)가 아닌 자가 인간학을 하겠다고 덤비는 건 주제넘은 짓이 되기 쉽다.


물론 서양에서도 글월 문(=라틴어) 구사자가 권력자 근처에 갈 확률이 높았지만, 다원사회(왕권과 상권, 봉건영주와 자유도시민 등 여러 요소가 대립하는)라는 유럽 사회의 특징상 문사(文士)가 전권을 장악하는 경우란 근본적으로 있을 수 없었다. 오히려 유럽에서 학문의 전통을 유지해온 기독교 수도원은 정치적 권력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했다고, 즉 권력과 지식(文)은 대립하는 성격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과거제도가 도입되면서 글월 문에 통달한 자들이 모든 권력(전권)을 좌지우지하는 체제가 벌써 로마시대와 겹치는 한(漢)나라 시대에 정립됐기 때문이다. 

 

2000년 넘게 무럭무럭 자란 ‘황제 해바라기 학문’

 

정치에 뜻을 펼치기 위해 중원의 여러 나라를 찾아다니면서 자신을 중용할 것을 요구한 공자. 그는 같은 사안이라도 경우에 맞게, 그때 그때 다르게 표현을 구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사진 = 위키피디아)  

중국에는 황로학(黃老學)이라는 개념이 있다. ‘황제(黃帝)를 위한 학문’이란 개념이다. 이미 서기 0년쯤에 중국에서는 ‘학문이란 황제를 돕기 위해 하는 것’, 즉 황제라는 최고 권력에 문사들이 접근하기 위해 요리조리 文을 요리하는 것이란 공식이 정립됐다는 얘기다. 


이런 전통이 2천 년을 넘었으니, ‘통일대박’이든 ‘FTA를 통한 사회개혁’이든,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말을 만들어내고 바꿔가면서 정치적 권력을 차지하려는 말(言) 정치의 역사가 동양에서 서양보다 훨씬 연원이 깊다고 할 수 있다. 


글 잘하는 사람을 최고로 치는 특징은 한국과 중국에서 특히 심하고, 문명-문화란 번역어를 만든 일본에서는 이러한 ‘文士 독점 현상’이 상대적으로 덜 했던 듯하다. 

 

일본사 연구 전문인 김시덕 교수의 책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에 보면 이런 부분이 나온다.
 

1764년 제11회 통신사 파견 때 [중략] 소수의 지배계급 이외에도 다양한 계급 출신이 서로 어울려 세계의 정보를 공유하는 일본 사회의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206쪽)

 

임진왜란에서 왜군에게 나라가 멸망당할 위기까지 겪은 뒤 통신사란 이름으로 일본을 방문한 조선 관리들이, 일본의 사농공상 등 다양한 계급들이 서로 어울리며 정보를 나누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는 얘기다. ‘황로학’의 전통을 유지한 조선에서는 글월 문을 할 줄 아는 士만이 대화를 나눌만한 인간이었지, 기술자인 공(工) 또는 장사하는 상(商)은 ‘인간 이하’였지만, 반대로 일본에서는 하다못해 접시를 돌리든, 이쑤시개를 깎든 ‘천하제일(= 일본 안에서 최고)’ 수준에 도달하기만 하면 대접을 받는 모습에 조선 관리들이 “오잉~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장면이 있냐?”며 큰 충격을 받았다는 기록이다. 

 

士 계급은 조선에서는 “선비”, 일본에서는 “사무라이”

 

일본에도 사농공상이라는 구분은 있었지만 우리의 사(士) 계급은 “선비”고, 그들의 사 계급은 “사무라이”라고 읽힌다. 글자의 유래는 비슷하지만 관련되는 인물상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물론 이런 차이는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다. 일찌감치 중앙집권을 완성한 중국과 한국에서는 전쟁이라는 실질 다툼(펜보다 칼이 더 중요한)이 까마득한 과거지사였기에 왕권-황권에 다가가는 ‘황로학’적 접근이 중요했지만, 메이지유신(1867년) 전까지만 해도 전국이 여러 개의 나라(番)로 나뉘어 전쟁-경쟁을 벌인 일본 열도에서는 글 싸움보다는 칼 싸움, 경제 경쟁이 더 중요했기에 글월 문보다는 실질을 더 숭상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본다.

 

강희언이 그린 1700년대 중반 조선 선비의 모습(위)과, 1702년 사무라이의 할복 장면을 그린 일본의 그림. 거의 같은 시기지만 이렇게 두 나라는 달랐다.(사진 = 위키피디아)

 

일본이 메이지유신 뒤 불과 수십 년 사이에 서양 열강과 맞먹는 강대국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글월 싸움을 주로 한 중국-조선과, 진짜 총-칼-경제 싸움을 주로 한 일본의 사정이 워낙 판이했다는 점을 들 수도 있겠다. 


문제는, 한국의 잘난 분들(글을 잘 다루는 분들, 현대로 치자면 명문대 출신들)은, 경제전쟁 시대라는 둥, 4차 산업혁명이 생사를 가른다는 둥 화려한 말 잔치들을 잘 구사하고 계시지만, 실제 싸움의 전개는 아직도 조선시대 식의 당쟁 차원에 머물고 있지 않냐는 의심을, 한국 정치의 ‘제 말로 제 발등 찍기’ 반복 현상에서 읽을 수도 있다는 데 있다. 

 

한국의 명문대 출신들 또는 고시 패스자 등 스스로 "난 장원급제 급"이라고 자부하는 분들은, 스스로를 현대판 양반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분명히 있다. 조선시대 양반은 병역-조세 의무를 지지 않았다. 서양의 귀족이나 일본의 번주(番主)-사무라이가 칼을 들고 전쟁에 앞장서는 위치, 즉 경제적-안보적 책임주체였다는 점과는 아주 많이 다른 점이다. 양반 체제는 조선시대에 끝났지만, 한국인들, 특히 잘난 분들의 양반 관념은 아직도 철저하다. 그래서 현대판 양반님네들은 안보 책임을 지는 걸 아주 싫어하며(“신성한 국방의 의무”라는 말을 항상 입에 올리면서 자신이나 제 자식들은 이 신성함과 항상 거리를 두려 하니), 유리지갑으로 성실 납세를 하는 월급장이를 저 아래로 내려다본다. 자신들은 조선시대 양반 같은 특권 계층, 즉 ‘법 위의 사람들’로 본다.  

 

재벌가의 병역기피 실태를 보여주는 채널A의 방송 화면. 조선시대 양반은 아예 병역 의무가 없었으니, 일반인의 5분의 1이라도 병역 의무를 지는 현대판 한국 양반은 그래도 나은 편인가? 

 

쪼잔했던 士禍의 다툼 주제…지금은 다른가?

 

조선시대 양반이 파를 나눠 죽고 죽이는 사화(士禍)를 화려하게 펼쳤듯이 한국의 현대판 양반들도 파를 나눠(여당이니 야당이니 제3당이니 하며) 화려한 文의 대결을 펼친다. 떼죽음을 초래한 사화의 다툼 주제가 ‘왕족이 죽었을 때 3년상이 합당한가, 아니면 1년상이 합당한가’라는 참으로 쪼잔한 주제였듯, 21세기 한국의 명문대 출신 엘리트 주도 정당정치의 다툼 주제는 ‘북한과의 평화협상을 우리가 하면 옳지만(正) 니들이 하면 그르다(邪)’라는 역시 논리부재의 아전인수-내로남불 식이 아닌지 궁금해진다.  


황로학의 원리는 “실질이 중요한 게 아니라, 황제가 내 말을 받아주느냐 아니냐가 중요하다”다. 실질은 중요치 않고 정치적 승부만 중요한 게다. 


독일의 통일 과정에서 서독 정부-교회가 엄청난 돈을 동독 정권에 갖다 줬고, 심지어 동독 스파이가 서독 총리 측근에 침투해 활동한 사태가 발각되기도 했지만, 독일 선거에서 여야가 바뀌어도 독일이라는 나라 전체의 동방정책(Ostpolitik)은 정권교체와 상관없이 꾸준히 지속됐고 결국 동독 사람들이 서독으로 대거 넘어가면서 통독은 이뤄졌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른 정쟁(정치적 말싸움)도 중요하지만, ‘동방정책이란 실질은 옳다’라는 합의가 있었기에 이런 게 가능했을 것이다. 


아직도 황로학적 현상이 판을 치는 한국에 이러한 실질에 대한 합의는 존재하는가? 그런 실질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4년 전 당시 대통령의 “통일대박”論에는 박수를 쳤던 정치인과 언론들이, 지금은 “북한과의 대화는 곤란해”라면서 사사건건 시비를 걸 수가 있는지?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기 위한 실학이 존재했다고 보여주는 국회방송의 화면. 그러나 한국에 정말 실질을 숭상하는 실학이라는 게 존재했다면, '이랬다 저랬다' 현상이 지금처럼 심할 수는 없을 것 같다.(사진=국회방송 화면 캡처) 

 

‘실사구시의 학문’이 존재했다굽쇼?

 

우리는 교과서에서 한국 역사에 실학(實學)이라는 게 존재했다고 배웠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이라는 게다. 실사구시의 학문이라는 게 존재했고 정립됐다면, 독일의 동방정책 같은 게 이뤄져야 한다. “이건 정쟁과는 상관없이 옮은 거야”라는 실질이 확립됐다면, 그런 실질은 정권이 바뀐다고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아직도 실질이 확립이 안 된 나라고, 그래서 ‘때에 따라 달라요 나라’이다.


아, 우리는 언제나 이 지긋지긋한 ‘황로학적, 엘리트 명문대 출신 지배적, 글월 文의 권력 나눠먹기 독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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