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共存)의 사전적 의미는 ‘두 가지 이상의 사물이나 현상이 함께 존재함’ ‘서로 도와서 함께 존재함’이다. 현재 우리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이야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서로 도와서 함께 존재한다’는 공존의 뜻을 너무 자만한 건 아니었을까?
이 점을 느낀 건 아트선재센터에서 7월 7일까지 열린 ‘색맹의 섬’전에서다. 전시명은 신경인류학자 올리버 색스가 핀지랩 섬에서 희귀 풍토병을 연구한 내용을 기록한 책의 제목과 같다. 소수의 색맹 인구가 다수의 정상 색각 인구 안에 섞여 살기 위해 어떻게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는지, 또한 사회 전체는 색맹 인구에게 필요한 환경이나 능력을 어떻게 인지하고자 노력했는지 공존의 방법을 살폈다. 전시는 이 공존의 방법을 인간과 자연의 관계로 끌어 왔다.
전시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 우르술라 비에만과 파울로 타바레스의 ‘산림법’이다. 아마존 지역에서 정부와 석유회사가 원주민의 동의 없이 대규모 채굴을 강행하자, 원주민들이 숲의 권리를 주장하며 결국 법정 투쟁에서 승리해 채굴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산림법’을 통과시킨 내용을 담은 영상 작업이다.
환경 문제를 다루는 여러 전시와 캠페인들을 살펴보면 “인간이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내용을 주로 내세울 때가 많다. 하지만 우르술라 비에만과 파울로 타바레스의 ‘산림법’은 “살아 있는 자연에도 인간과 동일한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 점이 인상 깊었다. “인간이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은 은연 중 한쪽이 일방적으로 우위의 입장에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이렇다보면 인간 위주의 입장에서 자연을 대상화해 바라보며 ‘환경 보호’를 외치게 된다. 진정 자연의 목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못하는 맹점에 빠지는 것이다.
하지만 ‘산림법’은 “인간과 자연이 동등한 대상이라는 것을 인지하는 데부터 진정한 공존이 시작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환경 문제를 다루는 여러 전시 가운데 특히 이 전시에 눈길이 간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인간 위주의 관점에서 벗어나 근본적으로 자연과의 공존을 고찰하는 움직임은 올해 들어 특히 많은 전시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사비나미술관에서 11월 3일까지 열리는 ‘우리 모두는 서로의 운명이다 – 멸종위기동물, 예술로 허그’전은 인간이 바라보는 멸종동물보다 멸종 위기 동물 자체를 주체로 끌어 올렸다. 일민미술관은 8월 25일까지 열리는 ‘디어 아마존: 인류세 2019’전에서 온실가스 배출, 산림벌채, 핵실험 등 자연 환경을 변화시킨 인류의 흔적이 남겨진 ‘인류세’를 이야기하며, 인간이 스스로 만든 이 시대의 곤경을 인간의 힘으로 또다시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 인간의 오만함을 비판한다.
‘공존’은 서로 도와서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인간 위주의 관점에서 자연을 고립시킨 채로 환경 보호를 외쳐왔는지도 모른다. 하물며 대자연의 품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겸손을 잊고 오히려 자만한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진정한 공존을 위해서 “인간이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은 지구에서 살아가는 동등한 권리를 지닌 존재”라는 걸 인식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