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6호 최영태 기자⁄ 2022.07.05 11:23:34
(문화경제 = 최영태 기자) 서울 성수동의 서울숲역 인근에 최근 눈길을 잡아당기는 새 건물이 들어섰다. 미술 전시장과 의류 팝업 스토어, 카페가 한 빌딩에 층을 달리하면서 들어서, ‘예술을 가까이 하면서 쉴 수 있는 공간’을 내세운 ‘피그먼트 플래그십 스페이스(PFS:MOF)’ 빌딩이다.
이 빌딩의 1층과 3층에선 쉽게 접하기 힘든 미술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한국 현대 판화의 선구자 고 이항성 화백과 아들인 이승일 전 홍익대 판화과 교수가 80여 년간 수집한 판화 작품들이 1층 갤러리에서 ‘세계 판화전’이란 제목으로 열리고 있다. 3층 전시실에선 고 이항성 화백의 미공개 작품까지 최초 공개하는 ‘이항성 상설전’이 함께 한다. 앞으로 이 새로운 공간에서 전시회를 계속 개최하면서 신진 작가 발굴에도 나설 이승일 전 교수와 만나 앞으로의 계획과 공간 특성에 대해 들어봤다.
- 1층의 ‘세계 판화전’에 특히 관심이 갑니다. 1층 피그먼트 갤러리의 개관전으로서 부친 이항성 화백과 이 교수님이 2대에 걸쳐 80여 년 간 수집한 명화 중 일부를 전시된다고 소개돼 있습니다. 소장 판화 작품 중에서도 특히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으신지요.
이번 세계 판화전이 보여주는 명화들 중에서도 특히 조르주 브라크의 작품 ‘Les Etoile(별)’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국내에는 아직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브라크는 파블로 피카소와 함께 입체주의(큐비즘)의 대가로서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만큼은 드물게도 몽환적이고 동화적인 정서를 간직한 점이 돋보입니다. 무수히 반짝이는 작은 별들과 경쾌한 색감 아래 평화를 상징하는 새의 모습은 전통 회화에 혁명을 가져온 큐비즘의 창시자임이 무색할 정도로 따뜻하고 경쾌한 느낌을 줍니다.
- 3층에는 ‘이항성 상설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부친은 1958년 한국 최초의 판화협회를 결성하고 회장을 맡는 등 판화 문화의 융성을 위해 기여하셨습니다. 이번 상설전의 특징은?
이번에 공개되는 부친의 작품들 중에는 대중에게 처음 공개되는 작품들도 많아요. 부친은 주로 평화에 대한 대외적 메시지를 담은 대형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 상설전에서는 부친이 가족간 화목의 기쁨, 어머니의 사랑, 어른에 대한 공경, 우애와 충성 등 우리 삶을 받쳐주는 인의예지의 가치들을 일상의 추상으로 소소하고 다정하게 풀어낸 따뜻한 그림들을 다수 전시함으로써 부친의 전체 모습을 알 수 있도록 기획했습니다.
- 1-3층의 전시가 이항성-이승일 2대에 걸친 미술을 보여주는 전시라고 한다면, 4층에선 허진의 작가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홍익대 미대에서 수십 년 간 미래의 작가들을 지도해오면서 재능 있는 신진 작가들의 전시 기회가 더욱 용이하게, 폭넓게 주어져야 한다고 언제나 생각해왔습니다. ‘피그먼트 플래그십 스페이스’라는 좋은 공간이 탄생한 만큼 매달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데 도움을 줄 계획입니다. 미술 전시만 하는 곳이 아니라 대중에게 큰 접근성을 가지고 있는 패션 브랜드와 함께 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작가와 방문객에게 신선한 영감을 줄 것을 기대합니다. 미술 시장이 활성화되고 사람들의 선호 또한 다양해진 만큼, 작가와 다른 브랜드 간의 콜라보레이션과 굿즈, 감각 콘텐츠 생산 등도 시대의 흐름에 맞춰 다양한 예술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분야입니다.
(현재 4층에서 열리는 허진의 작가의 전시는 ‘미라지 숲’이라는 환상 속의 공간에서 생명력을 자랑하는 숲과 몽환적인 인물들을 제 3자의 눈으로 표현한다. 작가가 발견한 인물들은 저마다 각자의 터에서 자리를 잡고 어떤 시간, 계절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이것은 가지치기를 하지 않은 나무처럼 마음대로 뻗어나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의미라고.)
- 최근 한국 판화계가 어려움을 겪는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한국 판화의 현재와 앞날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신다면.
판화는 이제껏 다른 미술 장르에 비해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요즈음 미술품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판화의 위상 또한 과거에 비해 유례없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판화는 작품 컬렉팅에 있어서 부담 없는 친구 같은 존재입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기념비적인 작품을 그린 작가들의 손길로 만들어진 오리지널을 보다 합리적인 가격으로 나의 공간에 걸어둘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주지요. 미술관에서만 보는 그림이 아닌, 내 공간에 영구적으로 걸어둘 수 있는 예술 작품의 심미적 가치와 만족감은 느껴본 사람만이 아는 기쁨입니다.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지난 수백 년의 역사에서 일상에 미술의 가치를 보급하는 데 가장 큰 일조를 하였던 것은 다름 아닌 판화였습니다. 이런 가운데 직업적 사명감을 가지고 판화에 종사한 모든 작가들은 재조명을 받을 가치가 충분합니다.
“서울숲역에 플래그십 스토어, 남양주·용인에도 곧”
김남일 PFS:MOF 대표와의 일문일답
개관 전시만큼이나 ‘PFS:MOF’ 빌딩의 공간 구성에 대한 관심도 높다. 다음은 김남일 PFS:MOF 대표와의 일문일답이다.
- 빌딩 이름에 ‘플래그십’(기함, 모함)이 들어갔다는 것은 추후 2관, 3관을 지속적으로 내겠다는 구상으로 보입니다만?
“네. 용인과 남양주에 고객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간들을 추가로 예정 중입니다.”
- 의류 브랜드와 공간 이름에 ‘피그먼트’가 들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를 선택한 특별한 동기-이유가 있나요?
피그먼트는 색감, 색소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제품군의 색상과 색감(컬러웨이)을 조율하는 데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브랜드명의 정체성을 따라 피그먼트 플래그십 스페이스도 5개 층을 각각의 시그니쳐 색상과 색감으로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
- 소개서에 보면 “피그먼트의 또 다른 이름 건축 바른지음”이란 문구가 있습니다. 바른지음이란 ‘바르게 짓는다’란 의미인가요? 건축과 관련되는 사항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네. 건축 ‘바른지음’의 전체 이름은 ‘바른지음살다’입니다. 소리를 들어 바르게 짓는다는 뜻입니다. 피그먼트는 여성 패션 브랜드, 바른지음은 공간 건축 브랜드로서 모두 케이컴퍼니의 자회사입니다.
- 4층을 “기초를 이루는 탄탄한 팔레트로 전체 벽과 바닥의 베이스를 구성했다”고 했습니다. 의미를 추가 설명해 주신다면요.
피그먼트 플래그십 스페이스의 각 층은 브랜드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각각의 콘셉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4층은 ‘브랜드와 기업은 기초가 튼튼해야 성장한다’는 피그먼트의 철학을 나타내는 공간입니다. ‘팔레트’는 화물 운송 현장에서 물건을 적재하는 데 사용되는 튼튼한 소재입니다. 기초를 단단히 하여 높게 쌓인 적재물을 받쳐주는 팔레트의 쓰임새처럼, 무엇이든 기초부터 튼튼히 쌓아야 높이 성장할 수 있다는 피그먼트의 철학을 담아 벽면과 바닥을 구성했습니다. 또한 이 공간은 신진 작가들의 전시를 유치하는 공간으로서, 그들과 함께 내딛는 브랜드의 성장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 앞으로의 전시 방향을 알려주세요.
기본적으로 5개 층 모두가 전시를 위한 공간입니다. 현재 개관전으로 ‘세계 판화전’이 열리고 있는 1층은 화이트 큐브로 정형화된 갤러리 공간으로서, 계속해서 새로운 전시들을 큐레이팅해 나갈 예정입니다. 2층 또한 공간 한가운데 위치해 있는 아트월(전시 박스)에 시즌마다 변화를 줄 것입니다. 3층은 현재 고 이항성 화백의 상설전을 진행하고 있으나 헤리티지의 전승이라는 공간의 목적에 걸맞게 원로 작가들의 전시를 지속적으로 유치할 것이며, 4층은 신진작가들의 전시를 활성화하고자 1개월마다 새로운 전시와 작가와의 협업 콘텐츠를 제공할 계획이 잡혀있습니다. 5층은 시즌에 따른 브랜드의 이미지 변화를 콘셉트로 삼아 공간에 계절마다 새 바람을 줄 예정입니다.
- 향후 발전-전개 계획이 있다면 알려 주세요.
피그먼트 플래그십 스페이스는 고객들과의 지속적인 소통의 창구로서, 문화적인 휴양지의 역할을 자처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입니다. 이 공간은 앞서 말씀드린 피그먼트의 공간 건축 브랜드 ‘바른지음’에서 건축을 담당하였습니다. 5층의 환경을 살리는 ‘써큘레이션’ 공간에서 엿보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바른지음은 폐자재의 낭비를 방지하고 건축의 원재료를 살리는 환경 디자인을 지향합니다. 앞으로 용인과 남양주에서의 2, 3호점에서도 기존의 건축에서 조금은 벗어난 바른지음의 손길로 만들어낸 독특한 공간에서, 고객들이 소통하고, 문화적 휴양을 즐기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