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오직 실재하는 것만을 보여준다.’ 사진의 발명가인 영국의 폭스 탤벗(William Henry Fox Talbot, 1800~1877)과 다게르(Louis Jacques Mandé Daguerre, 1787~1851) 이후 이 말은 진리처럼 믿어온 신념이었고, 꽤 오랫동안 우리의 정신을 지배해왔다. 정말 그럴까. 우리의 지각은 지금 여기 외에 그 너머를 볼 수 없는가?
현재 페이스 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아티스트이자 지리학자, 2018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 수상자이기도 한 트레버 페글렌(Trevor Paglen, b.1974)과 올해 성곡미술상 수상자이자 ‘땅, 사람, 관계 탐구(Reflecting on Relationship : Earth & People)’전을 개최했던 박형렬은 이 질문에 대해 ‘실재 그 너머’를 볼 수 있다고 답하는 작가들이다.
인간 시각의 범주를 탐구해온 풍경 사진
트레버 페글렌은 최근 한남동에 위치한 페이스갤러리 서울에서 열리는 트레버 페글렌의 개인전 ‘트레버 페글렌: 어 컬러 노테이션(Trevor Paglen: A Color Notation)’을 통해 한국을 찾았다. 전시는 11월 11일부터 12월 24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는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통해 시각적으로 변화시킨 풍경 사진 작품을 선보인다.
아티스트이자 지리학자인 트레버 페글렌(Trevor Paglen, b.1974)은 사진, 조각, 비디오, 설치글쓰기, 공학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감시, 데이터 수집, 군국주의 등 보이지 않는 세계를 포착해왔다. 그는 미국 서부의 풍경부터 우주의 영역까지 우리가 자연 세계를 지각하고 이해하는 방식에 질문을 던지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예술, 과학, 탐사 저널리즘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데 관심이 있다. 작가는 현대 사회를 형성하는 대규모 감시, 군사 산업 단지 및 비밀 세력을 리서치했다.
이번 페이스 갤러리 서울에서 선보이는 풍경 사진 중에 미국 서부의 미국 오리건에 있는 멀트노마 폭포는 19세기 초반 흑백 사진을 재소환한다. 웅장하고 초자연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이 사진에 한 발짝 더 가까이 가서 보면 폭포 위에 거미줄처럼 미세한 선들이 폭포를 덮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 풍경 사진은 작가가 자체 개발된 맞춤형 컴퓨터 비전 시스템을 사용해 제작된 이미지로 다양한 컴퓨터 시스템의 분석 결과를 통해 새롭게 해석한 시각적 결과물이다.
19세기 사진은 정치적 산업적 변화를 담아내기 위해 사진가들을 고용해 군사용 지도를 제작하거나 정부를 향한 폭동을 진압하기 위한 시찰 용도로 쓰였다. 미 서부 초기 풍경 사진도 이런 기원과 궤를 같이 한다. 미서부 풍경 사진으로 유명한 사진가 칼턴 욋킨스(Carleton E. Watkins)도 캘리포니아주 지질연구소와 태평양철도회사가 고용한 것이다. 현재 우리는 19세기 풍경 사진들을 역사적 맥락을 제거한 채 옛날 빈티지한 풍경쯤으로 인식하고, 빈티지 소품을 사 모으듯 소비한다.
트레버 페글렌은 자신의 작업을 ‘디지털 세계의 숨겨진 풍경과 금지된 장소에 대한 지도’라고 말한다. 작가가 활용한 ‘고전적인’ 컴퓨터 비전 알고리즘은 자율주행차, 산업 제조, 무기 시스템 및 로봇 공학 응용 프로그램에서 사용되는 기술이다. 이러한 알고리즘의 흔적은 작가의 풍경 사진 위에 미세한 선과 여러 도형들을 통해 풍경 너머의 세상을 상상하게 만든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풍경 작품들은 2020년부터 2022년 사이에 제작한 것이다. 인공지능의 프로세스를 이용해 꽃이 피는 장면을 활기차고 강렬한 색깔과 질감으로 변환한 ‘블룸(Bloom)’ 시리즈, ‘고전적인’ 컴퓨터 비전 알고리즘(computer vision algorithms)에 의해 생성된 선과 도형이 만들어낸 하늘 풍경은 우리의 시지각을 실험한다.
이외에 흑백 사진의 여러 가지 구성 요소를 감지하고 식별하는 인공지능 또는 머신러닝 알고리즘에 의해 분석된 것으로, 인공지능 시스템에 의해 각기 구별된 영역을 임의적인 색상으로 보여준다. 정교한 기술과 개념에 기반을 둔 작품을 통해 우리의 인식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 순간을 보는 방법을 배우고 대안적인 미래를 상상할 수 있도록 이끈다.
산의 단면, 무명의 풍경들
박형렬은 땅을 통해 자연을 지배하는 인간의 폭력적 시선을 포착해온 아티스트다. 그동안 퍼포먼스를 기반으로 한 사진, 영상 작업을 해왔다. 오늘날 땅을 잠식한 개발과 자본의 논리를 성찰한 그간 10년에 걸친 작업을 ‘땅, 사람 관계 탐구(Reflecting on Relationship : Earth & People)’(성곡미술관 2022년 2월 14일~6월 5일)과 송은에서 개최한 ‘제21회 송은미술대상전’(2021년 12월 10일~2022년 2월 12일)에서 선보였다.
작가는 ‘포획된 자연’에서 비닐과 실, 아크릴과 같은 인공적 생산물로 자연을 포획하고자 ‘헛된’ 시도를 설치로 담아내었고, ‘형상 연구’ 연작에서는 별 볼일 없고,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땅에 물리적인 변형을 가한 후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은 치유 과정을 보여줬다.
신작 ‘산의 단면(Cross Section of the Mountain Project)’(2021~) 시리즈는 땅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어디까지 치달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연작이다. 작가는 지금까지 땅에 주목해왔다면 이번엔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산을 대상으로 한다.
박형렬은 작업을 위해 간척지를 찾으러 다니던 중, 경기 서남부 지역의 간척 사업지를 목격했다. 땅을 확장하기 위해 주변의 산을 깎아 흙과 돌을 나르는 모습을 보며, 점점 낮아지는 산의 단면에 눈길을 보냈다. 그때의 감정은 그의 작업노트에 기록돼 있다.
“흥미로운 지점은 잘린 산의 단면은 자연 공간에 개입한 인간의 폭력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산에 단면의 색과 조형적인 형상으로 인해 추상적이고 감각적인 흥미를 끌어내는 이중성을 드러내는 것을 발견했다.” - 작업노트 중에서
그는 간척지 하나를 건설하는 데에는 적어도 하나의 산이 희생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간의 욕심으로 사라진 산의 흔적을 채집하기 시작한 그는 위성사진과 등고선에 주목해 과거와 현재의 산을 비교하고 기록했다. 이 연작에서 작가는 산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색을 추출하기도 하고, 색상을 반전시키기도 했다. 전시장에 설치된 산은 마치 추상화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반전시킨 색은 예상치 못했던 색을 드러냈다. 우리에게 익숙한 푸른 산, 혹은 겨울산처럼 갈색 산이 아닌 생경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산의 단면#1’은 취합한 100개의 위성사진 중 일부이며 그 형태들을 일정한 면적으로 재구성해 실제 간척지의 땅에 그 흔적을 조각하고 사진으로 기록한 작업이다. 이 산들은 분명히 고유한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북위 37°27'01.9, 동경 126°22'49.1, 북위 35°32'00.9, 동경 126°38'19.2의 기록’이라는 캡션의 위치를 근거로 추적해야 산의 정보를 알 수 있다. 그가 보여준 산의 단면들은 실제 존재했었지만 이제 볼 수 없는 풍경들 상상의 풍경들이자, 이름이 사라진 무명의 풍경들이다.
‘종이 찢기-백색(Paper-Tearing-White)’ 영상은 갈색 대지 위에 거대한 흰 천이 덮여 있다. 퍼포머들은 흰 천을 잡아당긴다. 이 힘 때문에 결국은 종이는 찢긴다. 마치 자연과 인간의 잃어버린 관계를 떠올리게 만든다. 서로 의존하거나 협력하지 않고, 힘의 균형을 잃어버렸을 때 자연과 인간은 어떤 상태에 놓이게 될까.
작가는 10여 년 동안 다양한 땅의 모습을 사진과 영상, 리서치, 도큐멘타로 남겼다. 1평이라도 땅을 늘려보겠다는 인간의 욕망이 투영된 간척지는 현대인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든다. 흥미롭게도 대형 프로젝트 영상에서는 파헤친 땅을 보듬는 치유의 행위가 드러난다. 풍경은 포획될 수 있는가. 대지는 과연 치유될 수 있을까.
지리학자이기도 한 트레버 페글렌은 최첨단 기술을 통해 포획된 풍경의 너머, 우주로까지 우리의 시각을 넓힐 것을 제안하고, 박형렬은 마치 지질학자처럼 땅의 숨소리를 들으며, 우리의 눈을 가장 낮은 대지로 끌어내린다.
<작가 소개>
트레버 페글렌(1974년 출생)은 이미지메이킹, 조각, 탐사보도, 글쓰기, 공학 등 여러 분야를 예술에 대한 자신만의 접근 방식으로 선보이는 예술가다. 그는 인간 시각의 범주를 탐구해온 풍경 사진, 추상화, 낭만주의, 기술의 오랜 역사와 같이 ‘더 블랙 사이트(The Black Sites)’, ‘아더 나이트 스카이(Other Night Sky)’, ‘리미트 텔레포토그래피(Limit Telephotography)’ 등의 시리즈를 통해 시각성의 한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한다. 재현의 인식론에 관한 그의 연구는 텍스트, 비디오, 오브제 및 이미지를 활용해 군대 문화와 언어를 둘러싼 의문들을 탐구하는 ‘심볼로지 앤 코드네임(Symbology and Code Names)’ 시리즈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 순간을 보는 방법을 배우고 대안적인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수단을 개발하는 것이다.
박형렬(1980년 출생)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지배 구조에 관심을 두고, 이 주제를 사진 매체를 통해 다양한 형태로 드러내거나 재구성하는 작업을 선보여 왔다. 개인전으로 ‘땅, 사람 관계 탐구(Reflecting on Relationship : Earth & People)’(성곡미술관, 서울, 2022), ‘와이 아트? 와이 북? #2 언씬 랜드(Why Art? Why Book? #2 Unseen Land)’(더 레퍼런스, 서울, 2021), ‘랜드스케이프(Landscape)’(정부서울청사 갤러리, 서울, 2020), ‘레이어 오브 랜드(Layers of Land)’(KT&G 상상마당, 서울, 2018) 등을 개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