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혼(horn) 소리와 폭풍우 치는 음향은 네덜란드인을 부르는 음울한 소리다. 노르웨이 잿빛 바다에 떠 있는 배 한척은 신의 저주를 받아 영원히 바다를 떠돈다. 바그너의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유령선 전설과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야만 비로소 육지에 정착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형체가 없는 유령들에게 “땅에 내려와 같이 놀자”고 제안하지만, 유령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음산한 합창으로 답한다. ‘바다’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 어쩌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유령’인 걸까. 아니면 오늘날 90% 이상의 무역을 담당하는 세계 자본주의 시장의 전쟁터일까. 알렌 세쿨라와 김신욱은 우리들의 손을 잡아 바다의 저장소로 이끈다.
알렌 세쿨라의 ‘바다의 복권’과 ‘검은 조류, 바다로 유출된 증유’
바다는 정치적 영역일까. 신비와 환영의 공간일까. 아니면 깊은 공포와 불안의 장소일까. 미국의 사진작가이자 이론가, 영화제작자, 운동가인 알렌 세쿨라는 숭고함의 원천인 바다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찰해왔다. 그리스 신화, 원양어선을 탄 어부들, 난민들의 이야기, 길을 잃은 선원, 국제무역, 미국 영화, 세계화 등 급변하는 해양계의 정치적, 환경적 공간 등을 다룬 서사를 구축해왔다.
오늘날 우리는 기후변화, 환경, 바다, 날씨 등 잊힌 공간을 되살리기 위한 세쿨라의 전략에 주목하고, 질문을 던져야만 하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기획전 ‘자연에 대한 공상적 시나리오’(2023년 9월 2일~2024년 1월 7일)에서 알렌 세쿨라의 작품 ‘바다의 복권(The Lottery of the Sea)’(2006)과 ‘검은 조류/바다로 유출된 증유(Black tide/Marea Negra)’(2002/2003)를 만날 수 있다.
‘자연에 대한 공상적 시나리오’전은 기후위기와 동시대 자본주의의 관계를 고찰하고, 동시대 미술에서의 생태정치의 가능성을 살피는 전시다. 이번 전시에서는 한스 하케의 초기작 ‘투게더’(1969/2013), 부산역 유라시아 플랫폼에서 상영되는 요코 오노의 아티스트 캠페인 프로젝트 ‘지구야 사랑해’(2023), 자본주의의 관계 및 을숙도의 현재를 보여주는 댄 퍼잡스키의 ‘기후드로잉-휴먼 네이처’(2023) 등의 작품도 함께 볼 수 있다.
바다의 복권은 일본을 출발해 파나마, 아테네에서 요코하마, 로스앤젤레스, 스페인 등 항구에서 항구로, 배에서 배로 이동하는 거대 선박의 여정을 추적한다. 다큐멘터리의 제목 바다의 복권은 아담 스미스(1723~90)가 위험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이 문구를 우화로 사용한 ‘국부론’에서 차용한 것이다.
바다의 복권은 갈라시아 대서양 연안을 거쳐 바로셀로나 지중해 연안으로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가며 국제정세, 세계금융, 해양운송법 등 다국적 사회의 이해관계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병치시켜 보여준다. 시장에서 고기를 자르는 정육점 주인, 세계 각지로 향하거나 돌아오는 물품을 싣고 내리는 항만 노동자 등 세계화된 해상 유통망의 다양한 모습을 담은 영상 위에 내레이션이 흐른다.
세쿨라는 18세기 후반 증기기관 선박의 개발을 또 다른 중요한 기술적 순간으로 꼽았다. 부정확한 항로와 날씨에 의존했던 기존 선박과 달리 증기선은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흐름으로 미끄러지는 상징과도 같았다. 그의 또 다른 작품 ‘피쉬 스토리’(1989~1995)에서는 전 세계 무역의 90%를 차지하는 상품의 이동과 상품의 교환 가치에 의해 소외되는 노동과 각박해지는 인간관계, 선박과 화물, 항구와 바다의 광경을 다루고 있다.
작가는 6년 동안 컨테이너 선박과 함께 항로 네트워크로 연결된 항구를 연결하는 항해에 동행했다. 그 과정에서 대서양 중부 적재된 화물선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 그단스크의 옛 레닌 조선소 주조공장의 용접공, 로테르담 항의 자동화된 ECT/해상 터미널, 울산의 현대 조선소, 푸에블라 공장에서 수출을 위해 선적 대기 중인 폭스바겐 등 다양한 풍경을 기록했다. 아담 스미스는 선상에서 일하는 불안정한 선원들과 배의 항해를 후원하는 투자자를 비교했다. 세쿨라는 컨테이너를 ‘노동의 관’이라고 지칭했고, 바다를 숭고함의 원천인 동시에 소외의 장소로 보았다.
검은 조류, 바다로 유출된 증유는 10개의 액자에 담긴 20장의 컬러 사진과 텍스트로 구성됐다. 2002년 11월 스페인 북서부 갈라시아 해안에서 발생한 유조선 프레스티지호 침몰로 인한 역사상 최악의 기름 유출 사고를 다룬 작품이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항을 떠나 싱가포르로 항해 중이었던 프레스티지호는 스페인 북부 해안에서 50km 떨어진 지점을 지나면서 거대한 파도를 만났다. 침몰 직전까지 유조선에서 추가로 흘러나온 기름이 해안가를 오염시켰다. 작가는 검은 기름으로 둘러싸여 돌이킬 수 없이 오염된 해안 풍경과 석유의 잔재를 걷어내고자 분투하는 지역 어민들과 자원봉사자들의 완수할 수 없는 노동현장을 다룬다.
사진 작업에 덧붙인 에세이 ‘오페라를 위한 단상들(Fragments for on Opera)’에는 향후 30년간 이 바다에 머물러 있을 ‘오페라적인’ 침묵이 담겨 있다. 현대 미술에서 바다는 세쿨라의 작품을 통해 살아있는 공간으로 귀환했다. 산업화된 무역으로의 전환, 심해 채굴에 대한 위험한 추진 등 여전히 확장되고 있는 상품화 과정을 상기시킨다.
김신욱, ‘보물섬: 출몰하는 유령들’전
2018년 보물선으로 알려진 제정 러시아 발트함대 소속 군함 ‘돈스코이호’가 113년 만에 울릉도 인근 해상에서 발견됐다는 보도와 함께 터진 사기사건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뮤지엄한미 삼청별관에서 진행 중인 김신욱의 개인전 ‘보물섬: 출몰하는 유령들’(2023년 10월 13일~12월 31일)은 이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돈스코이호는 1905년 5월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의 공격을 받아 침몰됐다.
이 작업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유령으로 출몰하는 작동방식에 궁금증을 품고 보물선 소문의 근거인 러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흔적을 탐색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약 1년 반 동안 작가가 한반도 남단과 주변의 섬들을 돌아다니며 작업한 신작 ‘보물섬’의 주요 작품 20여 점과 아카이브를 살펴볼 수 있다.
작가는 그동안 스코틀랜드 네스호에 산다는 전설 속의 괴물 ‘네시’를 찾아가는 ‘네시를 찾아서(In Search of Nessie)’(2018~2020), 한국호랑이와 동해북부선 등을 추적한 ‘단절의 망탈리테(Mentality of Disconnection)’(2021~) 등 특정 대상과 장소에서 비롯된 이야기가 그 진위와 상관없이 생명력을 갖고 지속되는 방식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왔다.
울릉도에서는 100여 년이 흐르는 시간 동안 돈스코이호 침몰 후 바다 아래에는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왔다. 러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아시아의 영토와 인력, 수많은 자원을 수탈한 일본군은 소위 ‘야마시타 보물’이라 일컫는 금은보화를 패망 직전 아시아 곳곳에 숨겨놓았다는 것이다. 돈스코이호뿐 아니라 제주시 아라동의 산천단 곰솔 일대 지하 동굴에 금괴와 보물이 매장됐다는 소문도 여전히 전해진다.
김신욱은 울릉도를 시작으로 지심도, 거제도, 가거도, 가덕도, 취도, 중죽도, 제주도, 그리고 일본의 쓰시마 섬(대마도) 등 일본군이 군사기지로 활용한 섬을 찾아 나선다. 섬에는 포대나 벙커, 동굴기지, 탄약고와 망루, 관측소 등 군사시설이 남아 있다. 특히 태평양전쟁의 흔적을 찾기 위해 방문한 제주의 장소는 4·3사건의 기억과 겹쳐진다.
“역사가 파생한 유령의 망령과 보물은 바다와 섬을 부유하며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유혹한다. 과거의 시간 속 유령들은 우리의 현실 세계에 어떻게 출몰하고 있을까. 섬과 육지,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유령을 기어이 소환해 찾아내야 할 것은 누군가 숨겨놓고 찾아가지 못한 보물이 전부일까.” - 작가노트 중에서
바다는 현대 예술가들에게 특별한 장소다. 낚싯배로 영국해협을 횡단하는 모습을 보여준 타시타 딘의 ‘아마데우스(스웰 콘소피오)’, 매사추세츠의 트롤 어선에서 어부들에게 고프로 카메라를 부착하는 실험을 한 루시앙 캐스팅 테일러와 베레나 파라벨의 영화 ‘리바이어던’(2012), 샤르자 크릭의 노동자들을 다룬 비디오 및 출판 프로젝트 ‘부두사용료(Wharfage)’(2009~2013)를 제작한 집단 캠프(CAMP) 등 시각예술가들에게 바다는 글로벌 노동현장뿐 아니라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 김신욱이 추적한 일제강점기의 전쟁과 욕망 등 다양한 모습으로 펼쳐진다.
글: 천수림(사진비평)
이미지 제공: 부산현대미술관, 뮤지엄한미
<작가소개>
알랜 세쿨라(Allan Sekula 1951~2013)는 미국의 사진가, 영화 제작자, 이론가이자 운동가다. 그는 세계화의 흐름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스템의 본격화에 따라 극도로 추상화되는 해양계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환경적 공간의 모습을 탐색하며, 이를 사진 매체를 통해 재현하기 위한 방법론을 고민했다.
김신욱(Shinwook KIM 1982년 출생)은 서울을 기반으로 런던과 밀라노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영국 런던대학교 골드스미스에서 순수예술 학사와 영국 왕립예술학교 (RCA)에서 사진학 석사, 영국 이스트런던 대학에서 미술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제12회 일우사진상 전시부문, 제7회 아마도사진상을 수상, 제10회 KT&G상상마당 SKOPF 올해의 작가에 선정됐다. 뮤지엄한미 젊은 사진가 포트폴리오 뷰 리뷰 프로그램 연계 출판물을 비롯해 ‘야간순찰(THE NIGHT WATCH)’, ‘네시를 찾아서(IN SEARCH OF NESSIE)’ 등 여러 출판물이 있다. 현재 경일대학교 사진영상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