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호⁄ 2025.09.25 13:52:35
“스스로 구부러지거나 팽창되어 이루어짐을 지켜보며 나는 그제서야 주문을 외워야 할 차례가 되고 만다. ” 작가의 육필 원고와 육성과 함께 만나는 전국광 작가의 작품은 예술에 대한 경이로움을 일깨운다. 작가는 조각의 핵심이자 본질인 매스(Mass)를 탐구하면 끊임없이 자신을 뛰어넘고자 부단한 실험과 도전을 이어왔다.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은 한국 추상 조각의 전개에 있어 주목할 만한 발자취를 남긴 조각가 전국광(1945~1990)의 개인전 '전국광: 쌓는 친구, 허무는 친구'를 9월 24일부터 2026년 2월 22일까지 개최한다.
작가의 작업 세계를 이루는 '쌓다'와 '허물다'라는 상반된 조형적 행위에 주목한 전시 구성은 ‘적(積) 시리즈’와 ‘매스의 내면 시리즈’를 본격적으로 소개한다. 전시 제목은 작가의 작업 노트에서 가져왔다. 작가 자신이 주변에 '쌓는 (작업을 하는) 친구'로 소개된 데에서 비롯되었으며 이후, '허무는 (작업을 하는) 친구'로 불리더라도 지금처럼 허묾의 표현 방식에 심취하겠다고 다짐한 문장에서 비롯된다.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난 전국광 작가는 6.25 전쟁 시 아버지가 납북되면서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할아버지의 주선으로 기념조형물을 제작하던 박재소의 조수 역할을 하면서 조각에 입문한 그는 경희고등학교 미술교사 김찬식에게 조각에 대한 기초 이론과 실제를 배운다. 그래서 1967년 홍익대 조소과에 입학했을 때 그는 동기들과 비교해 태크닉에 있어 한참 앞서 있었다.
제18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내구'로 입선한 그는 김광진, 양숭욱, 이병호, 황효창 등과 함께 그룹 '에스프리'를 결성해 한국 현대미술의 실험적 양식을 탐구한다.
석조각, 목조각, 금속조각, 드로잉, 마케트 등 100여 점을 보여주는 이번 전시는 ‘쌓다’라는 키워드에 해당하는 그의 대표작 <적 > 시리즈와 ‘허물다’라는 키워드에 해당하는 <매스의 내면> 시리즈를 중심으로 총 4개의 섹션으로 구성된다.
먼저 <쌓는 친구: 적(積)>은 1970년대부터 주로 선보인 <적(積)> 시리즈를 통해 ‘쌓기’라는 행위를 매개로 보이지 않는 자연의 힘과 에너지의 작용을 추상적으로 보여준다.
자연의 형태를 만드는 물리적 힘과 비가시적 에너지를 담어내고자 했던 작가는 마치 얇은 면이 층층히 쌓인 뒤 어떠한 힘이 가해져 굴곡이나 주름, 접힘 등 변형이 일어난 듯한 형태를 완성한다. 작가는 다루기 쉽지 않은 돌, 나무, 금속 같은 당단한 전통 조각 재료를 고수해 마치 천이나 반죽 같은 부드러운 재료가 눌려서 주름지고, 중력에 늘어지고 졉혀서 솟아오른 것처럼 절묘하게 표현한다. 여기서 재료의 물성과 보이는 것에서 연상되는 물성 사이의 간극이 발생해 흥미로움을 자아낸다.
작가 노트에서 드러나듯 전국광 작가는 인위적 형태를 만든다기 보다는 자연의 힘이 작용해 형태가 만들어지는 것에 자신은 최소한으로 개입하겠다고 이야기한다.
1981년 제30회 국전 비구상부문 대상 수상작인 <매스의 비(碑)>를 통해 작가는 매스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를 선언한다. '쌓는다'는 개념에서 '허문다'는 개념으로 전환하는 변곡점이다.
1970년대 후반 작가는 매스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보다 자유롭게 작업하고자 하는 열망이 높아졌다. <적 변이>를 거쳐 1980~81년 기하학적 패턴이 부각되고 매스의 무게를 덜어낸 <평면구조>, <평면분할>, <입체분할>, <매스와 탈매스>와 같은 작품이 이를 반영한다. 1981년 작가는 마침내 평면적이면서도 체체처럼 보이는 일루전의 요소가 강한 <매스의 비>를 제작해 매스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지겠다는 의지를 암시한다.
<허무는 친구: 적(積)의 적(適)> 섹션에서는 매스에서 벗어나고자 다양한 실험을 통해 최소한의 볼륨으로 최대한의 매스(감)을 표현한 <매스의 내면> 시리즈를 본격적으로 소개한다. '적의 적'은 중의적 표현으로, 첫번째 '적積'은 쌓는다는 의미이고, 두번째 '적適'은 싸우는 대상을 뜻한다. 즉 매스를 허물어 매스의 내면을 보여주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전국광은 1981년 <매스의 비>를 통해 매스의 무게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의지를 표출한다. 이후 매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존의 전통 조각 재료 외에 철사, 아크릴, 점토, 종이, 나뭇가지 등 다양한 재료를 실험했다.
<예술가의 목소리> 섹션에서는 작가의 조형 작업의 중요한 바탕이 되는 글쓰기 혹은 문학 활동을 소개함으로써 ‘반복을 통한 변주’라는 작가의 조형 언어를 텍스트로 전달한다. 이번에 최초로 공개되는 자필 원고와 육성 녹음을 통해 예술가로서 다양한 정체성 속에서도 일관되게 고민한 자유의지와 예술에 대한 열정을 작가의 목소리로 직접 느낄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아내, 한대수 등 동료, 후배, 가족 등 10인의 인터뷰 영상과 아카이브를 통해 작가 전국광을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마케트 및 야외 조각은 실제 작품의 제작에 앞서 형태를 실험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마케트 30여 점을 통해 관람객의 작품 이해를 돕고, 남서울미술관의 야외 정원에 조각 6점을 설치해 조각 전시에 특화된 공간을 연출한다.
최은주 서울시립미술관장은 “남서울미술관에서 연례적으로 개최해 온 한국 현대 대표 조각가 전시인 이번 《전국광: 쌓는 친구, 허무는 친구》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재조명함으로써 시대를 초월한 작가의 예술 열정을 통해 관람객에게 깊은 울림으로 전하고, 나아가 작가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촉발해 한국현대조각사의 층위를 확장하는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경제 안용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