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충환(미술평론) 인간의 체온은 보통 36.5도라고 한다. 그런데 이번 전시의 주제는 37.2도다. 육체의 교감이 절정(오르가즘)에 다다른 온도이며, 잉태를 위한 최적합의 온도이며, 진정한 소통이 이뤄지는 순간의 온도라고 한다. 어찌 보면 불안감과 두려움, 긴장감과 절정과 같은 특별한 순간에 체온이 상승하는 것(혹은 정신이 고조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듯싶다. 절정의 순간은 동시에 죽음의 순간이기도 하다. 오르가즘을 작은 죽음이라고 부른 조르주 바타이유의 말은 이런 의미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생리적 현상으로서의 불안감과 두려움, 욕망의 한 형태로서의 긴장감과 절정(나는 짜릿한 긴장감과 절정을 맞보고 싶다)은 죽음에 이르는(혹은 이르게 하는) 병이다. 그리고 그 병은 모든 거듭남의 계기들이나 정화의식의 계기들과 통한다(나는 새로 태어나고 싶고, 갱신되고 싶다). 불안감과 두려움은 성(죽음)과 속(욕망)을 매개시켜주는 계기란 점에서 신이 인간에게 심어준 신성의 지표다(신의 편재성). 그런 만큼 37.2도는 단순한 육체의 온도라기보다는 정신의 온도다. 육체의 교감과 진정한 소통(정신적 교감)은 하나다. 이주형은 포자를 그리고, 전윤정은 어둠을 그린다(엄밀하게는 캔버스에 라인테이프를 붙여 형태를 축조한다). 포자는 자가분열하고 자가증식하는 생명의 최소단위로서, 타자를 필요로 하지도 전제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특이한 생리구조를 예시해준다(이에 반해 주체는 언제나 타자를 전제로 한 개념으로서, 인간은 주체만큼이나 타자로부터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리고 어둠 역시 포자처럼 자가분열하고 자가증식할지도 모른다(나는 내 속에 자라나는 어둠을 인식하지도 치유하지도 못한다. 어쩌면 어둠에의 인식은 사실은 그저 막연한 느낌에 지나지 않은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처럼 자가분열하고 자가증식하는 것으로 털이 있고 머리카락이 있다. 이주형의 그림은 털뭉치처럼 보이고 전윤정의 그림은 머리카락다발처럼 보인다. 내 속에서 증식하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유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내 속의 타자이며, 내가 대면하고 있는 어둠이며, 트라우마(존재론적 상처)이며, 리비도(욕망)이며, 괴물일지도 모른다. 37.2도는 바로 이 내 속의 타자와 진정한 소통과 화해를 이뤄내는(어찌 보면 불가능한 기획일지도 모를) 순간의 온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