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을 계기로 정치권의 시선이 남북 관계로 향하고 있다. 대치 국면이었던 북미 관계가 대화 국면으로 접어든데 반해, 이명박 정부는 남북 문제의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있기 때문. 이에 정치권 일각에서는 북한이 미국과만 대화하고 한국과는 대립하는 이른바 ‘통미봉남’ 논란까지 일며 남북 관계의 어두운 전망들을 속속 내놓고 있다. 與野, 남북 대화 채널 단절 우려 지난 8월 5일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해 억류되어 있던 자국의 여기자 2명을 데리고 무사 귀환했다. 이후 우리 정치권에서는 이에 대한 환영과 함께 남북 간 대화 채널 부재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한나라당 정몽준 최고위원은 8월 5일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우리 국민 입장에서 보면 우려되는 점도 있다”며 “우리 정부와 사전에 충분한 협의가 있었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남북 간 대화 채널이 단절된 상태”라는 지적과 함께였다. 민주당 송영길 최고위원은 “민족 생존의 문제를 미국에 의존했을 때 통미봉남 문제가 발생한다. 이명박 정부는 남북 대화를 복원해야 한다”며 “싸울 때 싸우더라도 대화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반면, 정부는 이 같은 우려를 일축하고 나섰다. 정부는 일찌감치 이번 외교적 이벤트가 여기자 석방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선을 그어왔다. 물론 남·북·미 삼국 모두 이번 방북 성과와 향후 정세를 놓고 ‘동상이몽’ 식의 해석과 평가를 내놓았지만, 유난히 우리 정부만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대책 마련에 미흡한 모습이다. 정부는 북·미가 직접 대화의 물꼬를 트더라도 한·미 공조 의지가 확고한 이상 북·미 간 논의 과정에 한국이 배제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반박한다. 이번 방북이 한·미 간 사전 협의 아래 이뤄지는 등 공조 체제가 확고했다는 점에서다. 또한 오바마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선포했듯이 핵 문제에 대한 북한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 이상 북·미가 대화를 재개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하지만 이 같은 정부의 태도에 많은 전문가들이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이번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은 미국 정부의 긴밀한 조율하에 이뤄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미국의 본심 북한은 8월 5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클린턴의 방북이 북한과 미국 사이의 이해와 신뢰 조성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며 상당한 의미를 부여했다. 또한 북·미 사이의 현안 문제들이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허심탄회하고 깊이 있게 논의됐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미국 백악관과 국무부는 4일(현지시각) 브리핑에서 “달라진 건 없다”며 애써 의미를 축소했다. 게다가 로버트 기브스 백악관 대변인 역시 브리핑을 통해 “(클린턴의) 개인 활동”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이 같은 태도는 고도의 외교 전략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실제로 명목상 미국 여기자 석방을 위한 클린턴 전 대통령의 ‘개인적 차원의 평양 방문’의 배경에는 미국 정부가 있었다는 사실이 속속 언론을 통해 밝혀지고 있다. 스탠퍼드대의 쇼렌스타인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 부소장 다니엘 스나이더는 “클린턴은 여기자 석방 교섭을 하러 가지 않았다. 그는 협상의 결실을 수확하기 위해 간 것이다”라고 방북 의미를 표현했다.
뉴욕타임즈가 5일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미국은 여기자 석방을 위해 이른바 ‘뉴욕 채널’로 알려진 막후 대북한 협상 창구를 통해 조율해왔다. 신문은 북한의 유엔대표부와 미 국무부 한반도 정책 라인들이 수주 동안 은밀한 협상을 벌여왔다고 보도했다. 또한 북·미 간의 협상 시점이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 정책 라인이 확립된 시점과 맞물린다는 점 역시 눈에 띈다. 지난 6월 25일 커트 캠벨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상원에서 인준됨으로써 오바마 행정부는 대북 정책 라인 구성을 마무리했다. 특히 이번 클린턴 방북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오바마 행정부의 정권인수팀장을 지낸 존 포데스타가 동행했다는 점이다. 클린턴 대통령 시절 마지막 비서실장을 지낸 그는 클린턴 진영과 현 오바마 진영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뉴욕 채널의 미국 쪽 창구였던 데이비드 스트로브 전 국무부 한국과장이 동행했다는 것 역시 이번 방북이 단순히 여기자 석방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미국은 대외적으로는 북한과의 물밑협상을 부인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여기자 석방이 곧바로 북·미 화해 무드로 받아들여져 북한 핵실험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움직임이 느슨해지고 북한이 다른 생각을 갖는 것을 우려한 미국 정부의 고도의 전략이라고 말한다. 또한 미국 내 대북 강경파들의 비난의 화살을 우회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대북정책 전환 ‘이구동성’ 이종주 통일부 부대변인은 지난 8월 5일 브리핑에서 “여기자 문제와 개성공단 근로자 유 씨 문제는 상황이 발생한 맥락이나 성격에는 차이가 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유 씨 문제, 연안호 선원 문제 등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정부도 주의 깊게 보고 있다”고 밝혔다. 이 부대변인은 “정부는 유 씨의 조속한 석방을 위해 지금까지도 최선의 노력을 다해왔고 앞으로도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는 정작 “현 단계에서는 특사 파견이나 별도의 남북회담과 관련한 논의가 진행 중에 있지 않다”고 밝혔다. 정부는 정책전환을 서두르기보다 이번 사안이 추이를 관망하면서 차분히 대책을 마련하자는 분위기다. 대북의 채널이 대부분 끊겨 접촉을 시도할 만한 창구가 마땅치 않고,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북한이 남북 관계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만큼 정부가 먼저 움직이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정부의 대북정책이 전면 수정돼야 할 시점에 온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개성공단 직원 유모 씨 문제부터 연안호 선원 4명의 억류까지 정부가 뾰족한 해법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데 따른 비판 여론이 만만치 않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북 특사를 보내는 등 우리 정부도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통일부 장관을 지낸 정동영 의원은 “이번 클린턴-김정일 면담은 북미 적대관계의 청산과 냉전체제 해체를 목적으로 하는 9.19 공동성명의 복원이며, 북미 관계를 빠른 속도로 진전시킬 획기적 신호탄이 될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정 의원은 “8.15를 계기로 그동안의 냉전적·강압적·반포용적 정책을 폐기하고 다시 화해와 협력 정책으로 대전환해야 한다”며 정부의 남북대화 재개를 촉구했다. 한 북한 전문가는 “우선 ‘비핵화’라는 최종 목표를 남북 관계 개선의 전제조건으로 삼는 모순적인 정책부터 고쳐야 한다”고 조언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미국처럼 다양하고 유연한 접근을 펼쳐야 하는데, 지금 같은 강경기조로는 아무런 성과도 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전문가는 “북·미 관계 개선이 기대되는 상황에서 한국이 대북 강경기조를 고수할 경우 또다시 한국 정부가 외교적으로 소외될 가능성이 있다”며 “특히 남·북 간 대화가 조기에 정상화되지 않을 경우 또다시 ‘통미봉남’에 대한 우려가 제기될 소지가 있다”고 소견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