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이 분화되고 있다.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뀔수록 삼성·LG·롯데 등 재벌 그룹의 앞에 범(凡)이라는 단어가 붙는다. 이는 재벌 그룹의 창업주와 승계자가 자신이 일군 업적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계열이 분리되면서 새로운 기업군이 현성되기 때문이다. 그룹 분할 초기에 재벌 일가들은 서로의 사업분야를 침범하지 않고 서로 돕기로 신사협정을 맺기 마련이다. 예컨데, LG그룹과 LS그룹은 신사옥·공장 등의 설립을 GS건설에 의뢰하고, 롯데그룹·농심의 임직원 해외출장 및 여행 등은 롯데관광개발에서 도맡아 했었다. 이 같은 기조는 사실 재벌가들의 혈연적 이너서클이라는 비판 이전에 피붙이들끼리 서로 돕는 것은 천륜이고 인지상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같은 기조는 시간이 지나고 세대가 바뀔수록 점차 흐려지기 마련. 오늘날에 와서는 범재벌가문들 간의 경쟁구도가 한껏 격화되기도 한다. 특히 범LG의 건설대전(大戰), 범삼성의 유통대전, 범롯데의 여행대전, 범현대의 M&A 등에서 재미있는 양상을 띤다. 범LG가문의 건설대전 세계 비즈니스 사회에서 인화와 화합의 모델로 부각된 LG 가문이 서로 영역 확장에 힘을 올리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지난 4일 LS그룹은 예스코를 통해 한성의 지분 60%를 인수하면서 한성피씨건설을 통해 건설업계에 진출하게 됐다. 본래 범LG그룹 내에서 건설업은 GS그룹과 계열분리하면서 직접 진출하지 않고 필요할 경우 GS그룹에 물건을 주는 형식으로 정리됐던 사업분야이다. 그러나 LG그룹에서 다시 계열분리한 LIG그룹이 LIG건영을 인수하면서 건설업에서의 이 같은 신사협정은 사실상 깨졌다. 특히 지난 2008년 LIG그룹은 LIG건영을 아예 LIG건설로 사명을 바꾸고 LIG그룹의 건설업 진출을 대외에 천명하면서 GS그룹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이번에 LS그룹이 다시 한성을 인수하여 건설업에 본격적으로 발을 담그면서 범LG가문 중 LG그룹과 희성그룹을 제외한 GS그룹·LIG그룹·LS그룹이 모두 건설회사를 계열사로 표명한 셈이다. 현재 GS건설이 국내 1군 건설사로서 위상을 가지고 있지만, 현재의 주택시장 침체와 경기불황 시기에 LIG와 LS가 그룹 차원에서 건설사 육성에 집중한다면 수년 안에 GS건설이 긴장해야 할 수준까지 성장할 수 있다. 또 구본무 회장의 LG그룹도 건설업 진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시장에서는 LG그룹이 최근 문제가 된 대우건설과 현대건설을 내심 눈독 들이고 있다는 이야기가 퍼져나왔다. 사실 LG그룹은 건설업 진출을 지난 2007년에 공식적으로 부인한 바 있지만, 이는 건설사 인수 단가를 높이고 LG와 GS간의 건설대전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한 연막작전 차원이었다. 이와 관련, 증권업계의 한 관계자는 “당장 LG그룹이 대우건설 혹은 현대건설의 매입을 천명한 후 금호아시아나그룹이나 산업은행과 협상을 진행하기에는 가격부담 등이 너무 크다”고 말했다. 그는 “어차피 이 회사들의 규모로 봤을 때 국내에서 당장 인수할 여력이 되는 곳이 사실상 전무하며, 결국 해외 투기자본밖에 없는 만큼, 가격이 적당한 수준으로 떨어질 때까지 시간을 두고 지켜보자는 의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범LG가문의 동종업계 경쟁체제는 사실상 무너진 바 있다. 전기분야에서는 LS그룹의 LS전선과 희성그룹의 가온전선이 동종업계에서 서로 영역경쟁을 펼치고 있다. 또 통신 네트워크 분야에서는 LS그룹의 LS네트워크와 LG그룹의 LG데이콤이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전자분야에서 LG그룹과 희성그룹이 각각 LG전자와 희성전자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희성전자가 사실상 LG전자의 하청기업 형태라는 점에서 여전히 단결력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는 희성전자의 모그룹인 희성그룹의 오너 구본능 회장이 LG그룹의 지주회사 LG의 2대주주이자 구본무 회장의 양자로 들어가 LG그룹의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는 구광모 씨의 친부라는 점이 작용한 때문으로 보인다. 범삼성일가의 경영대전 계열분리 일가들 간의 경영대전은 LG그룹을 중심으로 LS그룹·LIG그룹과 GS그룹으로 구성된 범LG가문이 가장 치열하지만, 오히려 범삼성일가가 더 흥미진진하다. 범삼성가의 사업경쟁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라이벌은 이부진 호텔신라 전무와 정유경 조선호텔 상무다. 이건희 회장의 2녀 이부진 신라호텔 전무와 이건희 회장의 여동생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의 장녀 정유경 조선호텔 상무는 삼성그룹 창업주 고 이병철 씨의 손녀라는 점, 비슷한 연령대, 삼성가의 여성 호텔 경영인이라는 점, 위로 오빠와 아래로 여동생을 두고 있다는 점 등 너무나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두 사람은 각자의 호텔과 그룹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나 발언권을 행사하는 영역도 비슷해 서로 간에 비교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두 사람의 경영대전은 이부진 신라호텔 전무가 사촌언니인 정유경 조선호텔 상무에게 도전하는 형태로 이뤄지고 있다. 특히 지난해 11월 18일 삼성그룹 계열사인 홈플러스의 제빵공장 설립은 이부진 신라호텔 전무의 입김으로 알려지면서 이 과정에서 이 전무가 정유경 조선호텔 상무를 의식했는지에 대해 관심이 모아졌었다. 정유경 상무는 조선호텔 내에 있던 베이커리 사업부를 지난 2005년 조선호텔베이커리로 확장 분사시키면서 본격적으로 제빵업계에 뛰어들었다. 2007년 기준으로 조선호텔베이커리는 매출액 측면에서 조선호텔 전체 매출과 비슷한 수준까지 치솟았었다. 삼성그룹 소식통에 따르면, 이부진 전무가 출시한 베이커리 전문점 아띠제플랑제리는 운영과 유통방식 등에서 정 상무의 조선호텔베이커리를 벤치마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부진 신라호텔 전무가 신라호텔과 인천국제공항 등의 면세점을 통해 명품사업에 진출한 것도 정유경 상무에게 도전장을 내민 형국이다. 정 상무는 어머니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과 오빠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의 요청으로 신세계백화점의 명품사업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현재 신세계그룹의 VIP 고객만을 대상으로 하는 명품 사업의 성공은 정유경 상무의 작품이다. 또 이부진 전무가 제빵사업에서 파트너십을 이룬 삼성테스코의 홈플러스는 정유경 상무 집안의 신세계그룹 내 대형마트인 이마트와 강하게 경쟁하고 있다. 사실 맞수 여성 CEO로 세간에 거론됐던 사람은 정유경 조선호텔 상무의 어머니인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과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장녀 신영자 씨였다.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은 지난 40여 년 동안 신세계백화점과 이마트를 키워왔다. 그 과정에서 롯데백화점과 롯데마트를 관장하는 롯데그룹의 유통기업 롯데쇼핑을 40여 년 간 키워 온 신영자 씨와는 자타가 공안하는 라이벌이었다. 롯데그룹, “집안 경영대전 무조건 이겨라” 사실 범LG와 범삼성에서 벌어지는 사업경쟁은 언론과 세간의 관심에 따라 LG-GS, 이부진-정유경이라는 구도를 만들어냈을 뿐, 실제로는 서로가 영위해온 업종에 진출한 것이 전부이다. 다만 이로 인해 상대 그룹으로부터 들어오던 협력이 줄어들었다는 점만 빼고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며, 서로 간의 사업적 활동에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서로 적극적으로 돕고 협력하는 관계이다. 하지만 범롯데그룹은 공적관계, 즉 사업적 이해뿐 아니라 사적인 교류조차 껄끄러울 정도로 깊은 상처를 남겼다. 범롯데 간에 벌어진 일들은 종가이자 절대강자인 롯데그룹이 방계인 농심·롯데관광개발 등에 강하게 싸움을 걸어온 데서 시작됐다. 롯데그룹이 범롯데가와 분쟁을 시작한 계기는 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지난해 신동빈 부회장은 롯데관광개발·롯데햄·롯데우유 측에 롯데라는 브랜드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통보를 한 바 있다. 신동빈 부회장의 롯데 브랜드 관리는 롯데관광개발을 롯데그룹과 완전히 분리시키기 위해 시작됐다. 신동빈 부회장은 롯데월드·제2롯데월드·부산롯데월드, 계양산골프장을 비롯한 전국의 롯데골프장 등을 모두 아우르는 롯데관광타운을 구상했다. 그리고 그 사업을 본격화하기 위해 일본의 JTB관광과 함께 롯데쇼핑의 합자회사인 롯데JTB를 만들었다. 그런데 롯데그룹을 대표하는 관광사업은 롯데관광개발에서 하고 있었다. 롯데관광개발은 신격호 회장의 막내여동생 신정희 씨의 회사로, 롯데그룹에 소속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신동빈 부회장은 롯데JTB의 영역을 만들기 위해 롯데관광개발 축출 작업을 진행한 것이다. 이 밖에, 롯데는 우리홈쇼핑과 관련하여 태광그룹으로부터 소송을 당하기도 했으며, 농심그룹과도 불편한 관계에 놓여 있다. 범롯데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같은 행태는 신격호-신동빈 부자가 친인척들이 분사해 나간 일가 기업들을 향해 적극적으로 싸움을 걸고 있다는 점에서 범삼성·범 LG와는 다른 양상이다. 범현대가는 상호 M&A 전략 반면, 범현대가에서는 업종 전환이 아닌 기업 자체에 대한 M&A 움직임을 가지고 있다. 현재 범현대가는 현대·기아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그룹과 KCC그룹을 중심으로 하는 한라그룹, 성우그룹, 현대산업개발, 현대해상, 현대백화점, 등으로 구분된다. 이 중 KCC그룹·한라그룹·성우그룹은 범현대가의 창업주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생전에 분리 독립시켜줬고, 나머지 현대 브랜드를 가진 기업 및 그룹들은 지난 2003년 현대그룹 내 경영권 분쟁 과정을 통해 흩어진 기업들이다. 범현대가 사람들은 이 기간 중에 흩어진 기업에 대한 아쉬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그룹 현정은 회장의 경영권에 대한 정몽준 현대중공업그룹 고문과 KCC그룹 정상영 회장의 공격이나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 회장의 현대백화점·현대해상·현대산업개발 돌보기 등도 이 같은 차원이다. 현재 범현대가의 M&A 움직임은 현대상선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대그룹 M&A 외에도 현대오일뱅크·현대백화점 등 모든 현대그룹 출신 기업들 사이에 물밑에서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