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떠난 서거 정국의 한복판에서 민주진영이 암중모색을 시작했다. 2007년 대선 참패 이후 민주세력의 ‘구심점’역할을 해온 DJ가 세상을 떠나면서 민주진영은 어떤 방식으로 그의 유고를 계승할지 고심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결식 이후로 민주개혁진영의 통합 논의가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지금 야권을 향한 정치권의 시각은 크게 두 가닥으로 나뉜다. 하나는 DJ의 역할을 누가 대신할 것이냐 하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DJ 없는 야권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활로를 찾느냐이다. ‘포스트 DJ’를 차지하기 위한 정치인들의 약진과 ‘친노(親盧.친노무현) 신당’ 출범 움직임 등 야권 분화 움직임이 포착되는 것은 이 같은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다. 정세균-정동영 ‘DJ적자’ 줄다리기 야권의 적통계승 경쟁의 본격화는 민주개혁세력의 리더 찾기 움직임의 첫 번째 국면이다. 물론 새로운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정치권 내에 이견이 없지만, 누가 김 전 대통령의 유지를 받들 수 있느냐에 물음표가 찍히면서 스스로 적통임을 내세우는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 경쟁의 두 축은 정세균 민주당 대표와 무소속 정동영 의원이다. 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8월 25일 당 지도부와 호남 지역 의원 20여 명을 이끌고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목포를 거쳐 김 전 대통령이 태어난 하의도를 찾았다. 호남의 ‘집토끼’(고정적 지지층)를 다잡고 ‘DJ의 적자’임을 강조하기 위한 행보라는 분석이다. 하의도에서 정 대표는 “60, 70년대 김대중 대통령은 대중경제론을 말씀하셨다. 중산층과 서민의 정당이라는 민주당의 기본 철학을 제시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이) 남북 문제에 있어 4대국 보장론을 수십 년 전에 이야기한 예지에 감탄할 따름이다. 6자회담은 4대국 보장론을 지금 실천하는 것”이라는 얘기도 이어갔다. 특히 “민주당은 김 전 대통령의 철학과 정신·정책을 이어받을 것”이라며 “민주개혁진영이 하나로 통합해야 할 책무가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작은 이해관계에 집착 않고 대연합을 이루는 노력을 전개하겠다”고 강조했다. 한편에서는 무소속 정동영 의원이 이날 “김 전 대통령이 하려던 미국 내셔널 프레스 클럽(National Press Club) 연설을 대신 맡게 됐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김 전 대통령은 9월 18일 미국 워싱턴에서 언론인 클럽인 NPC의 ‘뉴스메이커(Newsmaker)’ 프로그램에서 ‘북한 핵문제, 한반도 평화, 남북한 및 6자회담 중단’에 대해 연설할 예정이었다. 정 의원 측은 “이달 초 방미 때 NPC에서 별도 연설을 하기로 돼 있었으나 김 전 대통령의 건강 악화로 급거 귀국했던 점이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은 “정동영 전 장관은 김대중 대통령의 철학을 함께 나누고 있는 지도자인 만큼 이번 초청은 당연한 것”이라는 NPC 측의 발언도 상세히 소개했다. 정 의원이 김 전 대통령의 뒤를 잇는 지도자라는 점을 부각시킨 것이다. 이 외에도, DJ와 고향이 같은 천정배 의원,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딸’로 불린 추미애 의원, 386의 선두주자인 전남 고흥 출신의 송영길 의원 등이 DJ를 계승할 잠재적 후보군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당내 일각에선 DJ 적통계승 경쟁이 ‘호남당’ 이미지를 고착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한다. 친盧신당 창당 움직임, 민주당에 부담 야권의 향후 활로 모색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지 아직 혼란스럽다. 민주당은 “DJ의 유지를 계승하겠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일부 ‘친노무현’ 인사들의 신당 창당 움직임은 민주당에게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천호선 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8월 25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민주당을 비판하며 창당 입장을 확고히 했다.
그러자 박주선 최고위원은 “민주당은 자타가 공인한 이 나라 민주주의의 기반과 터전을 확보한 당으로서 정체성과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다”며 “민주당을 중심으로 민주개혁세력이 대동단결해야 할 시점에서 어떤 주장과 명분으로도 신당 창당은 오히려 국민 분열 내지는 민주개혁세력의 갈등으로 치닫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박 최고위원은 “그 누구도 개인은 ‘포스트 DJ’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민주당 전체가 포스트 DJ가 돼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DJ의 유지는 민주당 중심의 통합이라는 것이다. 박지원 정책위의장도 ‘민주당 중심’을 강조했다. 박 의장은 “손학규 대표가 민주당 대표일 때 김 전 대통령께서는 손 대표가 50년 민주당의 적통을 이어받았다고 했다”며 “대표이기 때문에 그 대표를 중심으로 뭉쳐서 민주당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지 특정한 개인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대표를 중심으로 대오 유지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친노 신당 창당에 대해 “민주당은 과거에 단합해서 승리했고 분열해서 패배했다”며 “그분들도 거의 비슷한 이념과 생각을 가졌다면 똑같은 실패를 계속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신당 창당에 거부반응을 보였다. 김 전 대통령은 생전에 남북 평화체제, 민주주의 신장, 서민중심의 경제정책을 민주당 정신 계승조건으로 꼽아왔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2007년 열린우리당이 민주당과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분열되는 과정에서 남북 정상회담과 햇볕정책을 부정한 민주당에게 “민주당 50년 전통을 잃어버렸다”고 호통 치기도 했다. 이를 종합해보면, 정치집단으로는 민주당이 김 전 대통령의 적통세력임은 무리가 없어보인다. 민주당은 민주정부계승위원회와 ‘통합과 혁신위원회’를 두고 민주개혁세력의 통합을 위해서라면 민주당의 기존 기득권도 모두 버리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신당, 정치적 반향 일으킬 수 있나 친노그룹의 좌장격이면서 친노신당과는 보조를 달리하는 이해찬 전 총리는 8월 25일 열린 ‘노무현 시민학교’ 강연에서 “민주당 없이는 (연대가) 안 되지만 민주당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은 안 된다”고 말했다. 이 전 총리는 또 “민주당이 신당을 추진하는 이들이나 시민사회가 요구하는 수준으로 자기개혁을 하면 좋은데 지역적 한계 등으로 거기까지 될지 자신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등 민주당에 크게 기대하지 않는 눈치다. 쟁점은 외곽에서 요구하는 혁신과 관련하여 민주당이 어느 정도 변할 수 있느냐, 친노신당은 어느 정도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느냐, 그리고 시민사회는 어떤 역할을 하느냐 등으로 모아진다. 민주당은 ‘통합·혁신위원회’를 구성한다고 했지만, “기득권을 포기하겠다”는 원칙론만 나올 뿐 아직 구체적인 밑그림이 나오지 않고 있다. 당내에 여러 갈래의 세력이 엉켜 있고, 지난 총선과 전당대회를 거쳐오며 어렵사리 추스린 당 세력 구도와 체제를 일거에 뒤흔들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신당도 민주당과는 별도의 야당으로 자리매김해 통합은 아니더라도 ‘연대’의 기치를 들 수는 있지만, 이해찬·한명숙 전 총리나 유시민 전 장관 등의 참여가 불투명한 가운데 유의미한 정치세력으로서 기본적인 덩치를 갖출 수 있느냐가 문제이다. 일단 신당 측은 9월 20일 창당발기인 대회를 열기로 했다. 결국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마련된 통합 논의가 지지부진해질 경우 주도권 경쟁이 과열되고, 이 경우 여론의 역풍을 맞을 가능성도 있다. 야권의 한 중진 인사는 “모처럼 좋은 기회가 마련됐는데 또다시 논의만 하다 타이밍을 놓치게 될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인물 중심 벗어나 시스템의 정치로 일단 표면적으로 민주당이 내세운 처방은 내부 혁신과 통합이다. 3김시대처럼 인물에 치중하지 않은 시스템에 의한 정당정치를 뿌리내리고 시민사회 진영, 친노 진영, 구민주계 일부 인사를 모으면 야당의 역할을 되살릴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민주당 지도부의 한 재선 의원은 “지금은 3김시대처럼 1인 리더십에 정당이 좌지우지되던 시대가 아니다”라며 “시스템만 정비하면 인물 부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박지원 정책위의장이 “민주당은 정 대표를 중심으로 단결하고, 야 4당과 단합하라”는 DJ의 유훈을 공개한 것이나, 친노세력 직계인 안희정 최고위원이 “두 전직 대통령의 지지자를 결합시키고 촛불시민주권세력을 합칠 때만이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고 강조한 것은 통합 필요성을 강조한 발언이다. 그 연장선에서 DJ의 서거가 민주진영이 재부상하는 긍정적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엿보인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에 이어 민주세력을 뭉치게 하고 새로운 지도자를 발굴하는 촉매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3김정치’식의 폐단을 걷어냄으로써 민주진영의 `정치 소프트웨어'가 한 차원 선진화할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이러한 움직임들은 여야 정치권의 큰 승부처로 꼽히는 내년 6월 지방선거를 향해 수렴될 것으로 보이며, 이 선거를 전후해 민주진영의 ‘새판짜기’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예상이 나온다. DJ가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인 지난 6월 “민주개혁진영이 힘을 합해 민주주의 후퇴 등 민주주의와 서민경제, 남북관계의 3대 위기를 막아야 한다”고 지적한 것은 위기에 처한 민주진영에 제시된 일종의 좌표로 해석되는 분위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