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은 9월 3일 정운찬 서울대 전 총장을 국무총리로 내정하고, 법무·국방·지식경제·노동·여성부 등 5개 부처 장관과 특임 장관을 내정하여 개각을 단행하는 집권2기 신호탄을 쏘아 올렸으며, 특히 이 대통령이 장고(長考) 끝에 나온 히든 카드는 ‘정운찬 총리’ 지명이었다. 정운찬 총리 내정자는 지난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요직을 제의받은 것은 물론, 현 정권 출범 초기부터 줄곧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을 비롯하여 총리직을 제의받은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막상 정 후보자가 내정되자 여권에서는 ‘파격적’이라는 반응을 나타냈으며, 야권에서는 허를 찔린 듯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물론 이번에 단행한 ‘9.3 개각’의 특징은 이 대통령이 집권 이래 줄곧 강조해왔던 ‘화합과 통합’ 그리고 젊은 인물들을 등용한 ‘개혁과 변화’였다. 충청 출신으로서 지난 대선 당시 지금의 야당인 범여권의 대권후보로 거론됐던 정 전 총장을 총리로 기용한 것은 지역적·정치적 화합과 통합의 메시지로 풀이되고 있다. 그리고 친박계인 최경환 의원을 지식경제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당 출신 의원 3명을 기용하는 한편 특임 장관을 신설한 것은 친박계를 끌어안고 당청 간의 교류 폭을 더욱 넓히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져 향후 많은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 대통령, 왜 ‘정운찬 총리 카드’ 빼들었나 이처럼 ‘9.3 개각’의 핵심은 정 총리 후보자 발탁이지만, 정 내정자는 그동안 대운하 구상, 4대강 살리기, 감세·환율정책 등 현 정부의 주요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등 이명박 정부와 일정한 거리를 둬왔으며, 특히 2007년에는 민주당의 전신인 열린우리당 대선후보로까지 거론되는 등 보수보다는 진보적 이미지가, 안정보다는 변화와 개혁적인 이미지가 더 각인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렇다면 왜 정운찬인가? 이 대통령은 정 후보자가 가지고 있는 진보성향의 기조를 내세워 통합과 탕평의 효과를 극대화하면서 최근 자신의 중심 화두인 ‘중도실용주의’와 ‘친서민적’정책이 추진력을 얻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으며, 정 후보자 역시 총리 지명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경쟁을 촉진하되 뒤처진 사람에 대해 따스한 마음을 배려해야 한다는 좀에서 이 대통령과 나의 생각이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는 등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대통령은 집권 이후 꾸준히 정 총리 후보자에게 인수위원장·총리직 등을 제안하며 러브 콜을 보냈고, 정 후보자는 이를 계속 고사해오다, 개각 발표 전날인 지난 2일 총리직을 수락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 청와대 이동관 홍보수석은 “정 후보자를 어렵게 모셔왔다”며 “그러나 기본적으로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향, 철학에 대해 공감했기 때문에 총리직을 수락한 것 아니겠느냐”고 주장했으나, ‘정운찬 카드’는 이 대통령의 다목적 카드라는 정치권의 분석이 우세하다. 우선 국민통합에 대한 이 대통령의 의지를 싣고 있다. 집권2기 내각 사령탑인 정 후보자는 출신지역이 여권 비주류인 충남 공주 출신이며, 또한 이념은 현 정권과 거리가 있고 쓴소리도 마다 않는, 민주당에 가까웠던 인사를 총리에 발탁한 파격을 선택한 셈이라는 점에서, 촛불시위·용산참사 등 정국 주요 고비 때마다 일방통행식 국정운영을 한다는 비판을 들어온 이 대통령은 이번 인사를 통해 이러한 우려를 희석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권의 입장에선 국회의원 의석 분포상 사실상 ‘불모지’나 다름없는 충청권 공략의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분석도 유력하다. 충청권은 역대 대선에서 ‘캐스팅보트’역할을 해온 전략적 요충지로서, 이회창 총재가 과거 한나라당에 있을 때는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었으나, 현재는 이 총재를 중심으로 자유선진당이 출현한 이래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은 충청권에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이다. 따라서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충청연대를 적극 모색해왔고, ‘심대평 총리 카드’를 노심초사하면서 만지작거린 이유도 이 때문이며, ‘심대평 카드가 무산되자 고심 끝에 나온 대안이 이 대통령과 다소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했던 ‘정운찬 카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현재 여권 내 차기 구도는 박근혜 전 대표의 독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가운데, 정몽준 최고위원을 비롯하여 김문수 경기지사, 오세훈 서울시장, 이재오 전 최고위원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르고 있지만 박 전 대표의 대항마로는 역부족이라는 점에서, 정 후보자는 결국 박 전 대표의 독주를 견제하면서 이 대통령의 차기주자 육성과도 관련이 있다고 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정운찬, 국회 인사청문회 무사히 통과할까 정 후보자는 9월 4일 오전 세종로 정부 중앙청사 내 총리 집무실을 방문해 한승수 총리를 만나 국정 운영 전반에 걸쳐 의견을 교환하는 등 본격적인 국회 인사청문회 준비에 나섰다. 이 자리에서 한 총리는 “여러 가지로 힘들 때 큰 자리를 맡았지만 친화력이 좋으시니까 잘하실 거라 믿는다”면서 “인사청문회 등에 대해 총리실에서 성심껏 보좌해 드리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정 후보자는 시내 모처에서 인사청문회 준비를 총괄하는 권태신 국무총리실장과 만나 총리 임명 때까지 필요한 절차와 전반적인 국정 현황을 청취하고, 청문회 준바 작업에 대한 철저한 준비와 협력을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 후보자의 사무실은 보안 등을 고려해 정부 중앙청사 창성동 별관에 마련될 것으로 보이며, 사무실이 마련되는 대로 실·국별 수석국장들이 정부의 정책 방향과 주요 현안을 수시로 보고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총리실은 병용 정무실장을 단장으로 하여 인사청문회 준비 작업을 담당할 실무단을 구성했으며, 이 실무단은 이력·재산·병역·납세·범죄경력 등 정 후보자에 대한 개인적 검증 자료를 작성하는 행정지원 업무를 담당하게 된다. 특히 실무단은 역대 교수출신 인사들에 대한 인사청문회에서 논문 표절 및 중복게재 등 학자로서의 도덕성에 대한 추궁이 많았던 만큼 이에 대한 점검과 대비도 철저히 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으며, 정 후보자에 대한 임명동의안은 이르면 내주 중 국회에 제출될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심대평 전 대표의 총리 기용설로 당 대표의 탈당사태 등 대혼란을 겪고 있는 자유선진당이 충청권 출신 정 후보자에 대해 연이어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날을 세웠다. 특히 정 후보자가 3일 기자회견에서 세종시를 축소 수정해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데 대해, 자유선진당은 세종시 원안 추진을 강조하는 한편, ‘후보사퇴’를 요구하면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는 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당5역 회의에서 먼저 정 후보자의 총리 지명에 대해 “그동안 보아온 인사 스타일, 즉 가까운 사람, 잘 아는 사람, 마음 편한 사람, 부리기 쉬운 사람 등 이런 사람을 임용하던 틀에서 벗어난 인사라는 점에서는 평가할 만하다”고 밝혔으나, 곧바로 “정운찬 지명자 본인은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수위를 바꿨다. 이어 이 총재는 “정운찬 지명자는 노무현 정권 시절에 잠시 정치권을 기웃거린 적이 있다. 그때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충청향우회였고 충청지역이었다”면서 “그런 사람이 결코 경제적 효용만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세종시 문제에 대해 깊은 내용을 파악하지도 않은 채 경제적 효용론을 운운하며 원안 추진이 어렵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내정자 신분으로서 참으로 무책임한 발언”이라고 비판했다. 류근찬 원내대표도 “정운찬 후보자가 어제 첫 일성으로 세종시 건설을 원안이 아닌 수정안을 갖고 추진하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결국 원안 추진을 재검토하겠다는 발언”이라며 “세종시와 관련한 섣부른 발언으로 충청 민심을 사분오열시키는 행태를 과연 화합형 총리 지명자가 할 수 있는 일이냐”고 뒤를 이었다. 그리고 류 원내대표는 “정 후보자가 한 말은 개인 의견이 아니라 이명박 대통령과 사전 조율이 있었던 것으로 확신한다”면서 “이명박 정권이 세종시 원안 추진을 포기하고 싶은 속내를 정 후보자의 입을 통해서 밝힌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철저하게 검증하겠다고 별렀다. 민주당 박지원 정책위의장도 한 라디오 방송에 나와 “잘 알다시피 정 후보자는 이명박 정부의 대운하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 교육 및 경제 정책 등에 대해 반대 목소리를 냈던 사람”이라며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소신 총리가 될지, 그냥 끌려 다니는 예스 총리가 될지 철저하게 검증하겠다”고 밝혔다. 박 의장은 “소신 없이 ‘예스, 예스’하면서 끌려 다니면 국민과 국가가 얼마나 불행해지겠느냐”며 “어려운 국정, 정치 현실에서 총리로서 리더십이 있을지는 좀 더 두고봐야겠다”고 ‘주시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또 박 의장은 이명박 정부의 정책 방향 수정·보완이라는 기대감에 대해서는 “그런 것을 기대하는 것은 좋지만 대통령과 총리가 엇박자를 보여 혼란을 가져오면 그것도 문제”라며 “정치인이라면 정치적 소신, 학자라면 학자적 양심에 얼마나 충실한지가 본질적인 문제”라고 강조해 인사청문회가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국회법 및 인사청문회법에 따르면, 국회는 대통령의 총리 임명동의안이 넘어오면 여야 13인으로 이뤄진 ‘인사청문회특위’를 구성하여 3일 이내의 청문기간을 포함해 총 15일 이내에 심사절차를 마무리해야 하며, 임명동의안은 본회의 무기명 표결을 통해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에 출석의원 과반수 이상의 찬성으로 의결된다. 이명박 대통령의 ‘신(新) 여의도 정치’ 개막 ‘9.3 개각’의 또 하나의 특징은 이번에 발탁된 6명의 장관 중 절반인 3명이 한나라당 현역 의원인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정치인 입각 무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동부 장관에 내정된 임태희, 지식경제부 장관에 내정된 최경환, 그리고 특임 장관에 내정된 주호영 의원 등이 입각해 이달곤 행정안전부 장관, 전재희 보건복지부 장관을 포함해 이명박 정부 내각에 5명의 정치인이 포진하여 16명의 장관 중 3분의 1 가량이 정치인으로 채워짐으로써 이 대통령의 ‘(신) 여의도 정치’의 개막을 알리는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낳게 했다. 이 같은 정치인들의 대거 발탁은 이 대통령이 중도·실용 및 친(親)서민 행보를 가속화하기 위해서는 민심 읽기가 급선무인 상황에서 선거를 통해 선출된 정치인들이 ‘민심 읽기 전문가’라는 점에서 무엇보다 당정, 나아가 민심과의 소통 강화를 위한 강력한 의지가 담긴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당정 소통 강화를 위한 시스템 정비가 수차례 있었지만, 정책 잡음 및 엇박자가 이어져왔다는 점도 이 대통령이 한나라당에 내각의 문호를 넓힌 배경으로 꼽히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최고위원회의·주요당직자회의 등 당의 주요 회의에 참석해 당정 간 가교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이는 특임 장관직을 신설한 점도 당정 소통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포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정치인 출신 장관들의 정무적 감각을 적극 활용해 국민의 피부에 와 닿는 정책의 우선순위 및 조합을 만들고 정책에 대한 홍보를 강화해 나가겠다는 포석과 함께, 이번 개각을 앞두고 안상수 원내대표를 중심으로 당 지도부가 정치인 3∼4명의 입각을 줄기차게 요구했었다는 점에서 이 대통령이 당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는 모양새를 갖췄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으로 꼽히고 있다. 사실 현 정권 출범 이래 단행된 두 차례의 개각에서 ‘정치인 기용’이라는 당의 요구를 허공 속으로 흘려 보냈던 것과 비교할 때 큰 변화라 할 수 있어, 이 대통령의 ‘신(新)여의도 정치’가 개막한 게 아니냐는 시각도 적지 않다는 점에서 정치권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