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록 (안동대 미술학과 교수) 조천호는 밤새 추위에 떤 후 양지바른 곳을 찾아 몸을 녹이는 오리떼의 아침모습을 포착한다. 한 무리는 물살을 가르며 헤엄을 치고 다른 한 무리는 잔디위에 몸을 맡기고 있다. 오리떼는 따스한 햇살에 나른해져 몰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그만 곯아떨어진다. 조천호의 오리그림 <행복>을 보면 평화스럽기 그지없다. 호숫가에서나 볼 수 있는 잔잔한 물결, 햇빛에 반사된 물빛, 게다가 하늘의 푸르름을 옮겨낸 듯 물에 투영된 하늘의 이미지가 이채롭다. 반짝이는 물속을 헤엄치는 오리를 보고 있자면 마음도 한결 차분해진다. 그림에서는 들리지 않지만 가만히 있으면 아침의 새소리, 고요한 물소리, 찰랑거리는 오리의 헤엄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그의 호수그림은 우리가 어릴 적 시냇가에서 올챙이,소금쟁이,송장헤엄치기, 물방개를 신기해하며 놀던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물놀이를 하고 장난치던 아련한 유년의 세월이 그의 그림 안에 새겨져 있는지 모르겠다. 전체적으로 조천호의 그림은 ‘아이디어가 기발나다’든가 ‘첨단적’이라든가 하는 유의 그림은 아니다. 충실한 사실력을 특징으로 하는 구상화에 속한다. 일반적인 구상화처럼 그는 외부세계를 정확하고 과장없이 옮기는 방식을 택한다. 실물을 놓고 그리기 때문에 그림이 지나치게 관념화하거나 작의적인 쪽으로 기울지 않는다. 그의 그림에서는 형태가 먼저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색채가 먼저 눈에 띈다. 색채가 우선적이라는 의미에서 그의 그림은 정감이 넘친다. 그때그때의 감흥을 소재에 얹혀 전달한다. 형태를 중시하는 화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색다른 맛이 있다. 작가의 주특기라고 할 수 있는 질감표현은 풍경화에서뿐만이 아니라 정물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정물화에는 해바라기를 비롯하여 라일락, 국화, 들꽃 등이 등장한다.
그밖에도 바구니나 망사 속의 석류,앵두 등을 만날 수 있다. 꽃의 부드러운 촉각적 성질, 몽글몽글한 꽃잎을 잘 살려 내고 있다. 붓이 닿는 곳마다 물체의 촉각적 성질이 오롯하게 솟아나 있으며, 특히 해바라기 그림에서는 축 늘어진 해바라기의 의기소침함을 느낄 수 있다.일상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을 새롭게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은 화가의 몫이다. 평범한 것들을 평범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작가는 생략법을 즐겨 쓴다. 중요한 부분을 강조하고 나머지는 흐릿하게 처리하여 시선을 한 곳에 모은다. 생략법 외에 작가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또다른 수법은 드리핑이다. 무광택 희석제를 유화에 묽게 섞은 다음 캔버스위에 떨어뜨려 배경처리를 한다. 이 수법은 오리떼를 그린 <행복>과 시골의 담벼락을 묘사한 <토벽+생성 이미지>,그리고 꽃그림의 배경처리에 종종 사용된다. <공존+생성의 이미지>에선 퇴락한 담벼락을 그대로 살려냈는데 까칠까칠하고 균열이 지고 거무스레한 표정이 감상자에게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조천호는 속필의 화가이지만 하나하나의 꽃을 그릴 때마다 정성을 다한다. 붓에 물감을 붙여 두드리면서 그것이 하나의 물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생동감을 지닌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 그림의 이미지들이 박제나 마네킹처럼 보인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할까. 그래서 작가는 꽃의 향기를 감상자에게 전달해줄 의무라도 지닌 것처럼 그림의 리얼리티에 바짝 주의를 기울인다. 화사한 꽃을 테마로 설정하거나 반짝이는 호숫가를 소재로 설정한 것, 그리고 최대한 광선효과를 살려 그리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한편 그의 그림에서는 옛 것의 정취도 느낄 수 있다. 작품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담장을 보면, 비바람에 삭아 오랜 세월의 자취를 머금고 있다. 어떤 담장은 물기가 촉촉이 배인 것도 있고 눈부신 햇살을 반사하고 있는 것도 있다. 인공빛으로는 느낄 수 없는 강력하고도 형형한 빛이 드리워져 있다. 그런가 하면 목기구, 금술좋은 한 쌍의 원앙새, 빨간빛의 비단 천, 여물통, 빛바랜 문창살, 화로 등 토속적인 기물이나 공예품들이 등장한다. 조천호의 이런 ‘빈티지 취향’은 그림에서 슬쩍 지나가기 때문에 간과하기 쉽다. 그는 이런 취향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대신 그림을 통해 자연스럽게 묻어나도록 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채색과 질감의 능숙한 구사를 통해 그런 부분들을 능히 소화해버리는 것이다. 필자는 조천호의 그림을 보며 풍부한 미각을 지닌 화가라는 느낌을 받았다. 오일과 물감의 혼합, 사물의 질감표현, 억지가 없는 붓질 등이 어울려 깊고도 진한 맛을 자아내는 것이다. ‘풍미(風味)가 흐르는 그림’을 보며 맛난 음식을 먹을 때와 같은 포만감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