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그룹에 대한 2차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이번 구조조정도 지난해에 시작된 구조조정과 같이 강제적이다. 작년의 구조조정은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와 고환율·고유가 등 외부 악재에다 국내 주택시장 붕괴 조짐 등으로 국가부도 위험까지 걱정해야 할 정도의 상황에서 진행됐지만, 이달부터 본격화되는 2차 구조조정은 출구전략 시점을 논의할 정도의 경제 회복 시점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지난해에는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강제적 구조조정이 시장주의적 원칙에 어긋난다느니 하는 반발이 있었지만, 현재는 그 같은 반발이 오히려 쑥 들어갔다. 강제적 구조조정에 대한 부작용 우려를 언론, 청와대 민원 등 여러 경로를 통해 표명하면서도, 금융감독원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2차 구조조정에 상당히 순종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1차 구조조정과 이번에 진행되는 2차 구조조정의 결과에 따라 재계 서열 등 대한민국의 산업구조가 재편된다는 것이 재계의 공통적인 전망이다. 정부, 재계 중간평가 본격 착수 제2차 재계 구조조정이 사실상 이달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부의 재계 구조조정에서 반드시 거치게 되는 채권 금융사들의 채무 계열 기업들에 대한 신용등급 즉 자산건전성 평가가 시작된 것이다. 이번의 신용 중간평가는 2009년 상반기(2009년 1월 1일부터 2009년 6월 30일까지) 실적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금융권 및 재계에 따르면, 이 가운데 영풍그룹·코오롱그룹·대림그룹·두산그룹·STX그룹·한진그룹 중 4곳이 신규 구조조정 대상 그룹으로 편입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 중 한진그룹·STX그룹은 세계 해운시장의 불황에 의한 그룹 사업실적 악화가 원인이 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진그룹은 대한항공·한진택배 등 그룹 내 우량기업들의 신용등급 및 재무능력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맺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이에 따라 한진그룹에 대한 재무구조개선 약정은 한진그룹의 유휴자산, 즉 필요 이상의 보유선박 등을 매각하는 등에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STX그룹은 국민의 정부 시절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진행한 재벌 1차 구조조정의 와중에 탄생한 재계의 성공신화이다. 당시 쌍용해운의 전무이사인 강덕수 회장은 법정관리에 들어선 회사를 인수해 흑자기업으로 돌려놓은 후 매물로 나온 선박제조·해운운송 등 배와 관련된 기업들을 차례로 인수해 현재는 굴지의 대기업을 일궜다. 현재 해양 관련 한국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한 STX는 이제 전 세계의 바다를 손아귀에 넣기 위해 계속 전진하고 있다. 그런데 STX그룹과 강덕수 회장의 이 같은 급속 행보가 금융권에서 불안감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난 6월까지 STX그룹의 계열사들은 한국신용평가·한국기업평가 등 국내 신용평가기관으로부터 신용등급 불안정이라는 평가를 받는 치욕을 겪었다. 당시 신용평가기관들은 STX그룹의 신용평가 하향 이유에 대해, STX와 강덕수 회장의 사업능력 및 재무구조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세계 해운업계의 불황으로 인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경영인의 능력 부족이라면 능력 있는 경영인을 영입하면 되고, 사업구조 및 재무구조가 잘못됐다면 개혁하면 되지만, 세계 해운 및 조선 시장의 암흑기로 인한 평가등급 하향은 STX그룹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 이 때문에 금융업계의 관계자는 “재무와 신용이라는 원칙에만 의거해 냉정하게 평가할 경우 STX도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통한 사업구조 재편에 들어가야 하지만, STX의 상반기 재무 상태가 STX그룹 자체 문제가 아닌 세계적 실물경제 위기로 인한 불가항력적인 점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MOU를 유예하는 방향으로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위의 2개 그룹들이 구조조정 대상 물망에 오르게 된 것은 조선 시장의 불황 때문이다. 반면, 건설 계열사로 인해 MOU 물망에 오르는 곳도 있다. 두산건설을 소유하고 있는 두산그룹과 대림건설을 보유하고 있는 대림그룹이 그곳. 대림건설의 경우는 아직까지 비수도권 지역에서 미분양 주택 보유분의 처분을 완료하지 못하는 등 지난해 주택시장 붕괴 당시의 재무적 타격에서 완치되지 못한 점도 있다. 하지만 대림건설은 현재 건설시장에서 현대건설·GS건설·대우건설 등과 함께 4대천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4대천왕 중 지난 상반기 매출액 대비 가장 높은 이익을 실현하는 등 초우량 건설사로 거듭나고 있다. 반면, 두산건설은 역시 재벌 계열의 건설 대기업이기는 하지만, 건설시장 양극화의 파고 속에서 점차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두산건설 역시 상반기 영업실적이 지난해에 비해 조금씩 회복되고 있으며, 빅4를 제외한 나머지 건설기업군 중에서 최상위에 속하는 1군 기업이기는 하지만, 건설시장의 빅4가 시장의 70%를 장악하는 등 극심한 양극화 현상을 보이고 있어 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또 코오롱그룹의 경우 코오롱패션을 중심으로 한 서민 의류 사업, 그린순창·스위트밀 등 먹거리 사업, 코오롱건설 등 의식주를 주력 사업으로 삼고 있다. 모두 지난 1990년대까지 대한민국 경제신화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사업들이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IMF로 인해 한국 경제가 강제로 개방되면서 점차 시장 규모가 축소되고 있는 산업군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2008년도에는 한때 일부 계열사에서 현금보유량이 겨우 5000만 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두산그룹은 지난해 청와대의 의중에 의한 금융감독원 주도의 강제적 구조조정을 위한 채권은행과의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맺지는 않았지만, 정부·시장·언론으로부터 강한 구조조정 압박과 눈치를 받았었다. 이에 두산그룹은 자발적인 구조조정을, 그것도 사모투자펀드 활용이라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계열사 매각에 성공했다. 당시 두산그룹은 지주회사 두산을 통해 1142억7000만 원을 출자하여 DIP홀딩스라는 투자전문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이 회사에 삼화왕관·SRS코리아·두산DST·한국우주항공산업 등 4개 계열사를 매각했다. 지분구조를 엄밀히 따진다면 4개 회사에 대한 지배회사의 변동이 있을 뿐 실질적으로 두산그룹의 입김이 미치는 것은 변함이 없지만, 어쨌든 법적으로는 4개 회사가 완전히 계열분리된 셈이다. 이 때문에 경제개혁연대, 증권시장의 개인투자자들과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눈 가리고 아웅”, “투자자 기만”이라며 비판을 보냈지만, 두산그룹은 어쨌든 계열사 매각이라는 점, 위 회사의 지분 49%를 투자목적의 금융사에 넘김으로서 실질적인 자금조달 효과를 봤다는 점을 들어 성공적인 계열사 매각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DIP홀딩스를 설립한 지 불과 한 달도 안 되는 지난 7월 1일 두산그룹의 지주회사 두산은 DIP홀딩스를 아예 계열사로 편입해버림으로써 법적으로 4개 회사를 다시 사들였다. 이 때문에 “결국 한때의 따가운 눈총과 시장의 요구를 피하기 위한 쇼”라는 비난에 직면했다. 그러나 두산그룹은 회사채·차입금 등 상환해야 할 자금의 상환 시기 및 주체를 분산시킴으로써 리스크를 줄였다는 점 등을 들며 구조조정의 효과를 강변하고 있다. 이 같은 PEF를 이용한 새로운 방식의 구조조정 시도는 어쨌든 시장의 신뢰 하락을 가져오게 됐고, 상반기 재무실적과 겹치면서 이번에 MOU 신규 체결 그룹의 물망에 오르게 됐다. 그 밖에, 효성그룹도 이번 물망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으로 전망되며, 일각에서는 LS그룹을 거론하기도 했다. “제발 나 좀 구조조정 시켜줘” 그런데 이번 구조조정이 지난해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에는 정부 주도의 강제적 구조조정 자체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면서 언론 등에 자신들이 구조조정 물망에 오른다는 데 대해 극심한 반발심을 보였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들의 이름이 구조조정 후보군에 오르내린다는 것에 대해 큰 대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우리 좀 구조조정 MOU를 맺어 달라”고 나서서 청원할 수는 없지만 은근히 구조조정 대상에 포함되기를 바라는 곳도 있을 정도로 이명박 정부가 주도하는 강제적 구조조정에 호의적인 모습이다. 이와 관련, 재계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기업 재무구조 개선 MOU를 맺은 기업들을 보면 비주력 계열사 및 유휴자산의 원치 않는 매각, 사업구조의 반강제적 재편 등의 아픔도 있었지만, 금융권과 정부의 확실한 후원도 있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금융권의 확실한 후원이란 직·간접적인 자금조달을 말한다. 직접적 자금조달은 실질적으로 추가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다. 이는 기존 차입금 확대, 회사채 추가매입 등으로 행해진다. 그러나 기업들은 이 같은 직접적 자금조달보다 간접적 자금지원으로 더 큰 재미를 본 것으로 알려졌다. 간접적 자금지원이란 채무 상환기일 연장, 채무 금리 인하, 상환금 일부의 투자금 전환 등의 방법으로 이뤄졌다. 간접적 자금지원을 받은 기업들은 경영진들의 심리적 부담을 덜어주고 신규 사업 시행 등 경영의 환경도 대폭 개선되어 기업의 빠른 정상화에 큰 도움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까지는 필요 없는 정상기업으로 판정되어 MOU 대상에서 제외된 곳들은 차입금·회사채 상환 일정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삼성·현대자동차 등 초우량 굴지의 대기업이 아닌 B등급의 기업 및 그룹들은 이 같은 금융비용 상환 일정에 맞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느라 매달 곤욕을 치루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은행권의 한 관계자는 “예전 같으면 기업이 일시적으로 자금사정이 악화되는 등 문제가 생기면 회사채나 차입금 상환기일 연장, 추가 회사채 매입 등의 조치를 취해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지금은 MOU를 맺은 기업들에 대한 금융적 배려 여유가 없는데다 정부의 강경한 입장으로 이 같은 조치는 사실상 어렵다”고 말했다. 재계의 또 다른 관계자는 “많은 기업들이 내심 구조조정 MOU 대상에 포함되기를 바라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강제적 구조조정에 편입된 기업들에 대한 시장의 평가가 생각만큼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상 판정 B등급과 부실 C등급의 희비 교차 특히 지난해 현 정권의 강제적 구조조정에 순응하지 않았던 점을 후회하고 있는 기업들도 있다. 당시 신용등급 평가 결과 정상 판정을 받았던 B등급의 중소 건설·조선사 들이다. 실제로 지난해 6월 B등급을 받았던 중견 건설업체 현진이 지난 1일 부도를 맞았다. 현진은 지난달 31일 시중은행에 돌아온 어음 240여억 원을 막지 못해 1차 부도를 맞았고, 전일까지 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최종 부도 처리됐다. 이와 관련, 건설시장에서는 “신창건설과 현진건설의 부도가 남의 일이 아니다”라며 “대우·현대·대림 등 1군 건설사가 아닌 2군 중견 건설사들 중 구조조정 심사 B등급 사들은 모두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지난해 신용평가 당시 C등급을 받아 대외 신인도에 흠집을 남겼다고 평가받은 롯데기공·긴일건업·SC한보·대아건설·대원건설은 현재 B등급 이상의 건실한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또 우림건설과 월드건설 등 일부 건설사들은 아직 C등급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충실히 이행한 뒤 재무구조가 개선되면서 워크아웃 조기 졸업이 기대되고 있다. 특히 금융권은 반강제적으로라도 일단 체결한 자구계획을 성실히 이행한 업체일수록 간접적 금융지원에 호의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