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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현장] ‘베일에 싸인 천재 디자이너’ 마틴 마르지엘라, 전시의 통념을 깨부수다

롯데뮤지엄서 대규모 기획전…설치·조각·영상·퍼포먼스·페인팅 작업 아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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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39호 김금영⁄ 2023.01.02 10:56:54

마틴 마르지엘라의 전시를 알리는 대표 이미지에 데오도란트가 자리해 있어 눈길을 끈다. 사진=김금영 기자

전시를 알리는 대표 포스터에 떡하니 데오도란트 이미지가 자리해 궁금증을 자아냈다. 전시장 입구엔 작가를 소개하는 문구 및 작품명이 A4 용지를 급하게 오려붙인 듯 설치된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아직 전시 준비가 완료되지 않았나 싶었는데, 이 모두 작가의 의도란다. 사람들 머릿속에 자리 잡은 기존 전시에 대한 고정관념의 틀, 이것을 완전히 깨부수는 마틴 마르지엘라의 기획전이 열리는 롯데뮤지엄 현장을 찾았다.

마르지엘라는 최근 삼성전자와 협업으로 화제가 된 프랑스 패션 브랜드 메종 마르지엘라의 창립자다. 갤럭시 Z플립4 메종 마르지엘라 에디션은 일반 모델(147만 4000원)보다 높은 가격인 225만 5000원에 판매됐음에도, 출시 8초 만에 품절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이는 마르지엘라의 독창적인 디자인 가치를 재해석해 반영한 영향이다.

전시장 입구에 작가를 소개하는 문구 및 작품명이 A4 용지를 급하게 오려붙인 듯 설치된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사진=김금영 기자

이처럼 마르지엘라의 독특한 디자인 철학은 전 세계에 알려졌지만, 정작 그의 실체는 공개된 적이 없다. 통상적으로 패션쇼가 끝난 뒤 디자이너가 무대에 인사를 하러 나오지만, 마르지엘라는 런웨이 피날레 무대에 등장한 적도, 언론 매체 등에 모습을 보인 적도 없다.

이번 전시 준비 과정에서도 마르지엘라는 철저히 모습을 감춘 채 스튜디오 소속 디자이너 등을 통해 롯데뮤지엄과 소통을 이어갔다고 한다. 하지만 소속 디자이너조차 그의 진짜 얼굴을 본 적은 없다고. 그래서 마르지엘라는 ‘베일에 싸인 천재 디자이너’로 불린다.

전시장 초입에서 마주하는 프랑스 잡지책 표지 설치물 '헤어 포트레이츠'. 모델의 얼굴을 머리카락으로 다 가린 잡지책들을 전시해 놓았다. 사진=김금영 기자

마르지엘라의 천재성은 단지 패션 분야에 한정되지 않았다. 2008년 돌연 패션계를 은퇴하고, 순수 예술 창작자로서 활동해왔다. 지난해 프랑스 파리 소재 라파예트 안티시페이션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올해 베이징 엠우즈에서 전시한 뒤, 세 번째 전시 장소로 서울을 찾았다.

이번 전시는 마르지엘라가 1980년대부터 고민해온 ‘예술, 물질과 신체, 성별의 관념, 시간의 영속성, 직접 참여’를 주제로 작업한 작품 총 50여 점을 선보인다. 설치, 조각, 영상, 퍼포먼스, 페인팅 등 표현 매체는 다양하지만, 고정관념과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과거 무언가 걸렸을 것으로 유추되는 '흔적'이 남은 전시장 벽. 이 흔적 자체가 바로 마틴 마르지엘라가 말하는 작품이자, 그가 관심을 지닌 시간의 영속성이 투영된 결과물이다. 사진=김금영 기자

전시장 초입에서 마주하는 프랑스 잡지책 표지 설치물 ‘헤어 포트레이츠’에서부터 이 점을 느낄 수 있다. 잡지 표지엔 흔히 시대를 풍미하는 아이콘이 등장하기 마련이지만, 마르지엘라는 모델의 얼굴을 머리카락으로 다 가린 잡지책들을 전시해 놓았다. 정체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마치 마르지엘라의 자화상 같기도 하다.

그 아래편에 쌓인 잡지는 지구 환경에 대한 이미지를 담고 있는데, 일정 시간이 되면 전시 스태프가 이 잡지책들의 위치를 무작위로 옮기는 퍼포먼스를 진행한다. 이로 인해 모델과 지구 환경 이미지가 마구 뒤섞이고, 동시에 본래 전시장의 작품은 만지고, 옮겨선 안 된다는 불문율이 깨지는 순간을 맞이한다.

가죽으로 덮어씌운 '더스트 커버(Dust Cover)' 작품이 설치된 모습.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비밀이다. 사진=김금영 기자

이처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을 한데 두고,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을 일어나게 해 궁금증을 유발시키고, 스스로 생각하게 하며, 통념을 뒤엎는 것. 이 기조가 전시의 시작부터 끝까지 관통한다.

흰 커튼으로 작품 덮어둔 이유

피부 실리콘 위에 씌워진 빨간색 가발은 과거 주로 불길함, 퇴폐성으로 이야기됐던 빨간색이 현재는 관능적이면서도 강렬한 매력의 색으로 상징됨을 돌아보며 생각의 다변화를 이야기한다. 사진=김금영 기자

과거 무언가 걸렸을 것으로 유추되는 ‘흔적’이 남은 전시장 벽도 눈길을 끈다. 이 흔적 자체가 바로 마르지엘라가 말하는 작품이자, 그가 관심을 지닌 시간의 영속성이 투영된 결과물이다.

 

구혜진 롯데뮤지엄 디렉터는 “마르지엘라의 지시를 받은 스튜디오 소속 디자이너가 직접 전시장 벽을 철제 수세미 등을 사용해 긁어낸 것”이라며 “벽을 간 흔적을 본 사람들은 본래 여기엔 어떤 작품이 걸렸을지, 그 작품은 어떤 것이었을지, 이 흔적이 만들어지는 데는 얼마나 걸렸을지 등 여러 시간의 영속성을 인지하며 상상력의 폭을 넓히게 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공간엔 가죽으로 덮어씌운 ‘더스트 커버(Dust Cover)’ 작품이 설치됐다.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비밀이다. 구 디렉터는 “그것을 궁금해 하고 상상을 유도하는 게 작가의 의도”라고 답했다.

금발부터 백발 가발까지 함께 전시된 ‘바니타스’는 나이 들어가는 과정을 그리며 피할 수 없는 죽음과 인생의 덧없음을 표현했다. 사진=김금영 기자

이번 전시에선 머리카락에 관한 작품들도 많이 설치됐다. 어릴 때 이발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마르지엘라는 자연스럽게 사람의 신체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이를 작품으로 표출했다.

피부 실리콘 위에 씌워진 빨간색 가발의 경우 과거 주로 불길함, 퇴폐성으로 이야기됐던 빨간색이 현재는 관능적이면서도 강렬한 매력의 색으로 상징됨을 돌아보며 생각의 다변화를 이야기한다. 금발부터 백발 가발까지 함께 전시된 ‘바니타스’는 나이 들어가는 과정을 그리며 피할 수 없는 죽음과 인생의 덧없음을 표현했다.

일상에서 흔히 보고, 무심코 지나가는 존재에 단순히 모발을 씌웠을 뿐인데, 이 사소한 변화가 버스 정류장을 살아 있는 동물처럼 변모시켰다. 사진=김금영 기자

이 머리카락을 비롯해 신체 일부를 클로즈업한 작품들도 전시장 곳곳에 설치됐다. 신체 모발과 아무 것도 없는 흰 화면이 교차하는 화면은 불쾌함과 신기한 양가감정이 공존하는 현장을 만든다. 모발을 사용해 만든 버스 정류장도 마찬가지다.

 

일상에서 흔히 보고, 무심코 지나가는 존재에 단순히 모발을 씌웠을 뿐인데, 이 사소한 변화가 버스 정류장을 살아 있는 동물처럼 변모시켰다. 이 과정들을 통해 작가는 사람들에게 흔히 정답처럼 여겨지는 가치들에 대해 다시 생각, 고민해볼 것을 제안한다.

인식의 전환은 ‘토르소’ 시리즈에서도 이어진다. 인체의 일부를 3D 스캔해 만든 토르소 시리즈는 고대 조각상의 관념에서 탈피하는 한편 젠더의 의미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구 디렉터는 “본래 고대 조각상은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신격화돼 왔지만, 마르지엘라는 이를 비틀었다.

인체의 일부를 3D 스캔해 만든 토르소 시리즈는 고대 조각상의 관념에서 탈피하는 한편 젠더의 의미에도 의문을 제기한다. 사진=김금영 기자

신체 일부분을 부각해 조각상으로 만들었지만, 이것이 신체 어느 부분인지, 성별에 대한 정보도 주지 않는다”며 “또, 마네킹이 설치되는 지지대와 마네킹을 일체화시켰고, 퍼포먼스를 통해 이 마네킹을 하나씩 가리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했던 고대 조각상이 아닌 새로운 조각상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붉은 손톱을 거대한 규모로 형상화 한 ‘레드 네일즈’는 변화하는 아름다움의 개념과 구성 원리에 대해 연구한 마르지엘라의 사유를 담았다.

미로처럼 구성된 전시장서 당혹스러운 감정 증폭

전시장 중간 지점엔 이번 전시를 위해 마르지엘라가 새롭게 구성한 '모뉴먼트'가 설치됐다. 2017년 롯데뮤지엄이 지어지던 공사 장면을 담은 거대한 프린트가 배경으로 걸렸다. 사진=김금영 기자

전시장 중간 지점엔 이번 전시를 위해 마르지엘라가 새롭게 구성한 ‘모뉴먼트’가 설치됐다. 지난해 파리 라파예트 안티시페이션에서 전시된 작품으로, 마르지엘라는 이번 전시를 위해 롯데뮤지엄 공간에 맞게 몰입형 전시 작품으로 구상했다.

 

관람객은 전시공간에 설치된 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이 공간에서 발생하는 일상 소음과 스피커에서 나오는 체육관의 소음을 함께 듣게 된다. 그리고 눈앞엔 2017년 롯데뮤지엄이 지어지던 공사 장면을 담은 거대한 프린트가 배경으로 걸렸다.

이번 전시에서는 신체 일부분을 클로즈업한 이미지가 눈에 띈다. 하지만 마틴 마르지엘라는 이것이 신체의 어느 부위인지, 성별에 대한 정보도 주지 않는다. 사진=김금영 기자

구 디렉터는 “해당 사진은 롯데뮤지엄 개관 전 건물 내부에서 석촌호수가 보이는 배경을 찍은 것”이라며 “지금은 없어진, 부재의 흔적을 찾아가는 작품으로, 관람객의 기억과 경험으로부터 특정한 순간을 일깨우며, 설치된 이미지를 계속해서 환기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전시장을 둘러보면서 의아한 점이 있었다. 본래 롯데뮤지엄은 약 400평 규모의 넓은 공간인데, 이번 전시에서는 통로가 유독 좁게 느껴졌다. 이 또한 마르지엘라가 의도한 바다. 전시장 곳곳에 흰 커튼을 설치하면서 전시장 자체를 미로처럼 구성한 것. 또, 한 작품이 온전히 보이지 않도록 전시 스태프가 전시장에 설치된 흰 커튼을 걷었다가 치기를 반복한다. 커튼을 걷을 때도 작품의 반 정도만 보이게 해놓는다.

이번 전시는 작품과 작품 사이에 흰 커튼을 쳐 모든 작품이 동시에 노출되지 않는 구성을 취했다. 사진=김금영 기자

구 디렉터는 “이번 전시에서 마르지엘라는 미술관에서 일반적으로 하지 않는 동선과 작품 설치를 시도하며 사람들의 생각을 전복, 환기시키고자 했다”며 “그는 관람객에게 작품을 모든 시간 동안 노출시키지 않는다. 스태프가 작품을 하얀 천으로 덮었다 열었다 반복하며 작품 관람 시간을 제한한다. 이로 인해 관람객은 제한된 시간 안에서 작품을 더 밀도 있게 감상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시장 끝에는 이런 당혹스러운 감정이 증폭되는 영상이 기다린다. 영상엔 털로 된 마스크를 쓴 여자가 등장하는데 웃는지 우는지 도통 모를 소리를 낸다. 그러다 갑자기 이질적인 데오드란트 광고 영상이 뜬금없이 등장하고, 다시 여자가 등장하기를 반복한다. 영상 옆에는 여자가 쓴 털로 된 마스크가 함께 전시됐다.

전시장 끝에는 당혹스러운 감정이 증폭되는 영상이 기다린다. 영상엔 털로 된 마스크를 쓴 여자가 등장하는데 웃는지 우는지 도통 모를 소리를 낸다. 사진=김금영 기자

영상 속 데오도란트는, 이번 전시의 대표 작품이기도 하다. 인류의 역사에 등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현대인의 일상 필수품으로 자리한 데오도란트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체취를 인위적으로 은폐하며, 아름다운 신체에 대한 고정관념을 은연 중 우리에게 심어줬다.

 

이 고정관념에 울분을 토하듯, 또는 비웃듯 소리를 토해내는 여자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말하는 듯하다. “당신의 머릿속 통념을 깨부수라”고. 전시는 롯데뮤지엄에서 3월 26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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