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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장] ‘삶’과 ‘죽음’의 경계를 유영하는 시오타 치하루의 실

가나아트서 3년 만에 근작 선보이는 ‘리턴 두 얼스(Return to Earth)’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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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김금영⁄ 2025.08.06 16:09:50

드넓은 전시장을 한가득 채웠던 하얀 실의 장엄한 풍경을 기억한다. 이번엔 검은 실들이 공간을 엄숙하게 채웠다. 모두 시오타 치하루 작가의 손에서 탄생한 결과물이다.

실로 ‘개인-세계’, ‘삶-죽음’ 연결…“모든 건 순환한다”

전시장 초입에 설치된 사진은 시오타 하루 작가의 젊은 날 치열한 고민을 상징한다. 사진=김금영 기자

가나아트가 2022년 ‘인 메모리(In Memory)’전 이후 작가의 근작을 선보이는 전시를 3년 만에 마련했다. 작가는 지난 전시에서 흰 실과 배, 드레스와 같은 사물들을 통해 ‘기억’이라는 주제를 다뤘다. 특히 소설가 한강의 작품 ‘흰’에 등장한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부탁이야” 글귀에 깊은 감명을 받아 흰색 실로 공간에 그림을 그리듯 대규모 작품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이번엔 검은 실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작가는 “내게 검은색은 우주를 뜻한다. 그리고 검은 실을 통해 우주와 연결된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는 이번 전시명인 ‘리턴 두 얼스(Return to Earth)’에서도 읽힌다. 과거의 작업들이 작가 자신을 실존하게 하는 ‘관계’와 ‘경험’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번엔 자연과 인간, 존재와 비존재를 연결하는 보다 확장된 ‘순환의 구조’에 집중한다.

시오타 하루 작가의 작품이 설치된 모습. 사진=김금영 기자

이 순환의 구조는 탄생과 죽음이 이어지는 우리네 삶을 상징한다. 특히 작가에게 죽음은 더 특별하다. 작가는 과거 두 번의 암 투병을 하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직접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아이를 잃기도 했다. 한없이 절망에 빠질 상황에서 작가 또한 세상을 마주할 용기를 잃기도 했지만, 어김없이 찾아오는 아침을 맞이하며 생각의 전환점을 맞았다고 한다.

작가는 “암을 선고받았을 때 생명의 섬세함과 동시에 삶이 결코 영원하지 않음을 실감했다”며 “그때 나는 누구이고, 산다는 것은 무엇이며, 또 작가로서 작업을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깊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더 셀프 인 아더스(The Self in Others)’가 설치된 모습. 사진=김금영 기자

이런 복합적인 사유를 시각화하는 재료로 ‘실’을 택했다. 그에게 실은 감정과 기억, 관계의 흐름이 물질화된 형태이자,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구조를 외부로 끌어내는 매개다. 작가는 “현 사회에 살아가는 사람들 누구나 서로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 실을 연결하며 이런 복합적 의미를 담아 작품을 제작한다”고 말했다.

가나아트 측은 “작가에게 단일한 선이자 동시에 무수한 교차점을 형성하는 실은 개인과 세계, 자아와 타자, 삶과 죽음을 연결하며, 얽히고 흐트러진 형태 속에 인간 존재의 복합성을 담아내는 매개체로 활용된다”고 설명했다.

인체 모형의 오브제를 다양한 실로 엮은 모습이 눈길을 끈다. 사진=김금영 기자

나카노시마 미술관에서 미리 선보인 연작 ‘더 셀프 인 아더스(The Self in Others)’(2024)를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실을 다채롭게 연결한 모습이 눈길을 끈다. 인체 모형의 오브제를 다양한 실로 엮었는데, 작가가 암에 걸렸을 때 했던 ‘만약 내 몸 안 장기가 없어진다면?’ 상상에서 출발한 작업이다.

죽음을 가까이 맞닥뜨린 작가는, 분명 자신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몸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몰라 장기와 자신의 존재를 연결시키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한다. 여기서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이 피어났다. 주변 지인을 통해서도 이를 느꼈다고.

작가는 “친구가 신장 이식을 받았는데 수술한 뒤 예전엔 전혀 안 먹던 생선이 뜬금없이 좋아졌다고 하더라. ‘장기가 바뀌니 음식 취향도 바뀌는구나’ 하며 신기한 동시에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과연 어디까지가 나라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며 “만약 내 장기가 다른 사람의 장기로 바뀐다면, 지금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과연 어디까지가 내 존재라 할 수 있는가? 지금 실존하는 나는 누구인가? 이런 질문들을 던지고 스스로 탐구하며 장기 모형을 하나씩 모아 연결하며 작품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두 번의 암투병…“작업은 내 삶의 이유”

‘셀(Cell)’ 연작은 2017년 암 재발 이후 항암 치료를 받던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사진=김금영 기자

함께 선보이는 ‘셀(Cell)’(2025) 연작은 2017년 암 재발 이후 항암 치료를 받던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생명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인 세포조차 비정상적으로 증식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암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 앞에서 작가는 생명이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로 향하는지 작업을 통해 질문을 던졌다.

작품에서 유리를 감싼 철사는 마치 모세혈관처럼 얽혀 있어 눈길을 끈다. 또한 유리와 철사는 단단하고 고정된 형태처럼 보이지만, 열이나 압력에 따라 다시 유연하게 형태가 바뀐다. 작가는 이런 재료적 특성을 통해 고통 속에서도 재생과 순환이 가능하다는 점도 암시한다. 즉, 죽음이 끝이 아닌 새로운 생성을 향한 전환점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리턴 두 얼스(Return to Earth)’가 전시장을 채우고 있다. 사진=김금영 기자

특히 3 전시장에서 선보이는, 이번 전시명과도 같은 ‘리턴 투 얼스’(2025)는 이런 작가의 철학이 응축된 설치 작품이다. 작가는 전시장 천장에서 바닥까지 서로 얽혀 내려오는 검은 실을 통해 자아와 타자, 현실과 비가시적 세계 사이를 교차하는 구조를 가시화했다. 하나하나 엮인 실들은 중력에 따라 자연스럽게 흩뜨려졌는데, 이 광경은 마치 실로 공간에 거침없이 드로잉한 듯 생생한 압도감을 형성한다.

이 검은 실들은 마치 인간의 혈관과 신경세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검은 실들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전시장 바닥의 흙더미로 향하게 되는데, 이는 결국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는 것, 즉 죽음을 암시한다. 결국 자연으로부터 태어나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는 순환의 사고를 보여준다. 가나아트 측은 “작가는 이 설치 작품을 통해 인간의 육체가 흙으로 돌아가고, 숨결은 공기가 되며, 정체성과 영혼은 또 다른 자연의 일부로 흩어진다는 믿음을 시각화했다”고 밝혔다.

전시장을 채운 검은 실은 중력에 따라 자연스럽게 흩뜨려졌다. 사진=김금영 기자

이는 2000년 작가의 첫 개인전 ‘브리딩 프롬 얼스(Breathing from Earth)’에 대한 25년만의 응답이기도 하다는 설명이다. 가나아트 측은 “작가는 25년에 걸쳐 단순한 육체의 소멸을 넘어 삶과 존재에 대한 사유를 함축하는 작업을 이어 왔다. 현재도 진행 중인 이 여정 속 작가는 개인의 내밀한 경험과 감정을 형상화하는 동시에, 그것을 생명과 존재라는 보편적 차원으로 확장시켜왔다”며 “개인적 서사를 넘어 예술을 통한 치유를 이어가는 작가의 힘이 오롯이 느껴지는 작업”이라고 밝혔다.

또 이번 전시가 특별한 건 보기 힘들었던 작가의 회화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작가는 현재 실을 활용한 작업으로 알려졌는데, 과거엔 붓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전시엔 1990년대 초반 작가가 그렸던 초기 회화 작품 3점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서 시오타 치하루 작가의 1990년대 회화 작업도 볼 수 있다. 사진=김금영 기자

작가는 “현재 유화 5점만 남아 있고, 이번 전시에선 3점을 전시한다. 3점을 동시에 나란히 전시에 선보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본래 유화 작업을 좋아했는데 어느 순간 어떤 그림을 그려도 ‘모방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더 이상 회화 작업을 지속할 수 없었다. 나만의 표현 방식을 고민했고, 결국 실을 택했다. 현재 나는 실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렇듯 치열했던 젊은 날 작가의 고민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사진도 볼 수 있다. 전시장 초입에 자리한 사진은 과거 발버둥 치며 노력한 작가의 자화상을 담았다.

시오타 치하루 작가는 “작품을 만드는 게 내 삶의 보람”이라며 웃어 보였다. 사진=김금영 기자

현재 건강을 많이 회복했다는 작가는 여전히 삶에 대한 끊임없는 고찰을 이어가고 있다. 명확한 답이 있는 것도, 옳은 답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묵묵히 성실하게 이어갈 뿐이다.

작가는 “작품을 만드는 게 내 삶의 보람이다. ‘만약 작업을 못하게 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생각이 들 정도로 24시간 동안 내내 작품 생각만 한다”며 “현재 독일에 같이 있는 시어머니가 만들어주는 김치를 먹으며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며 웃어 보였다.

이어 “아침에 일어났을 때 상쾌한 상태에서 아티스트로서의 창작 의욕과 감각이 유독 샘솟는다”며 “앞으로도 아티스트로서 열심히 작업을 하며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전시는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9월 7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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