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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장] 미란다 포레스터·한정은 작가가 그려낸 숭고한 풍경들

파운드리 서울서 전시 선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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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김금영⁄ 2025.08.26 11:03:25

9월을 목전에 둔 미술계의 분위기가 매우 뜨겁다. 글로벌 아트페어 키아프·프리즈 시즌에 맞춰 각 갤러리, 미술관이 특히 전시에 힘을 주는 시기이기 때문. 이 가운데 오히려 파운드리 서울은 고요한 평화감이 깃든 두 작가의 작업을 내세워 눈길을 끈다.

미란다 포레스터, ‘쉼’을 통한 ‘저항’의 풍경

미란다 포레스터의 작품이 설치된 전시장. 사진=김금영 기자

전시의 두 주인공은 각각 런던,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해온 영국 작가 미란다 포레스터, 한국 작가 한정은이다. 파운드리 서울 윤정원 이사는 “화려한 파티와 전시가 많이 열리는 이 시기에 고요하고 평화로운 전시를 선보이며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을 만들고자 했다”며 “전시를 감상하며 잠시 마음을 쉬어가는 동시에 보다 작품에 집중할 수 있는 장을 꾸리고 싶었다”고 전시 기획 배경을 밝혔다.

포레스터는 ‘비 라이크 워터(Be Like Water)’전을 통해 관람객을 만난다. 그의 작품에서는 한가로이 눕거나 앉아 있는 여성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이들은 온전한 자유를 만끽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어 보는 이 또한 마음이 한결 누그러진다. 환한 화이트 톤의 전시장 무드와 맞물려 어딘가 휴양지로 떠나온 듯한 느낌도 들었다.

미란다 포레스터의 작품 속 인물들은 평화로운 쉼을 즐기고 있다. 사진=김금영 기자

이런 쉼의 정서는 작가에게는 ‘저항’의 일환이기도 하다. 작가는 서구 미술사에서 배제돼 온 흑인 퀴어 여성의 이야기를 작품에 표현해 왔다.

그는 “흑인 여성에겐 예로부터 ‘강인해야 한다’는 고정관념과 동시에 ‘게으르다’는 편견이 공존해왔다. 이런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더 치열하게 사는 모습이 그간 많이 묘사돼 왔다. 그래서 미술사를 살펴보면 흑인 여성이 한가로이 쉬고 있는 모습을 담은 그림은 잘 발견되지 않는다”며 “그래서 오히려 흑인 여성이 평화롭게 쉼을 누리는 모습을 더 보여주는 방식으로 고정관념을 전복시키고자 했다”고 말했다.

폴리카보네이트를 캔버스로 활용한 작품. 사진=김금영 기자

여기엔 비단 흑인 여성뿐 아니라 한 작가로서 작업 세계를 꾸준히 이어나가고자 하는 저항 의식도 담겼다. 포레스터는 “작가는 미술시장에서 끊임없이 작품 생산 압박을 받는다. 그렇게 작품을 완성하면 내 작업 세계를 이해시켜야 한다는 압박과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너무 압박만 받으면 자유로운 창작 세계가 오히려 제한될 수 있다”며 “이때 중요한 게 회복이다. 우리의 삶은 계속되기에 압박뿐 아니라 쉼이 있어야 보다 생각이 열리고 성숙해질 수 있다. 그래서 평화로운 쉼은 작가에게도 필수 불가결하다”고 말했다.

자유의 공간에서 인물들은 거의 누드로 등장한다. 이는 구속받지 않는 온전한 자유의 상태를 상징한다는 설명이다. 인물들은 작가의 친구, 전문 모델, 주변 지인 등 실제 모티브가 된 대상이 존재하지만, 표정을 볼 수 있는 얼굴엔 여백이 자리한다. 이 또한 한계를 두지 않기 위함이다.

작가는 “코로나19 시기엔 모델을 만나기 힘든 상황이라 내 스스로의 모습을 화면에 그리기도 했는데, 이를 자화상이라 생각하진 않았다”며 “어느 특정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나 자신을 대입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상태의 인물을 화면에 그려 다양한 상상의 여지를 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를 위해 미란다 포레스터가 시도한 대형 작업. 사진=김금영 기자

화면 속 인물들은 몇 년에 걸쳐 다시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전에 등장했던 것과 완전히 똑같진 않다. 작가는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삶의 단계를 거치는데, 이때 나타나는 변화를 수용하면서 살아간다”며 “정체성은 결코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리고 이 변화를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눈에 띄는 건 일광욕을 즐기거나, 문턱에 서 있는 인물의 모습이다. 이 인물들 모두 한 경계에 국한되지 않은 자유로운 상태라는 점이 동일하다. 작가는 “일광욕을 할 땐 따뜻한 태양을 즐기는 기쁨도 있지만, 동시에 피부가 그을릴 수 있는 리스크가 공존한다. 문턱은 안과 밖을 이어주는 경계의 공간이다”라며 “이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엔 단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양가적인 측면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미란다 포레스터는 특정 개인이 아닌 누구나 자신을 대입해볼 수 있는 인물들을 화면에 그린다. 사진=김금영 기자

이처럼 작가는 특정 한계에 갇히지 않고 자유로운 표현과 상상의 여지를 지향하는데, 이는 작가가 사용한 재료에서도 엿보인다. 작가는 전통 캔버스뿐 아니라 폴리카보네이트도 캔버스로 사용했다. 폴리카보네이트의 특성상 물감이 칠해지지 않은 부분은 뒷부분이 투명하게 보여 현실과 회화, 안과 밖의 경계가 흐려진다.

작가는 “다양한 재료에 관심을 갖고 실험, 탐구하고 있다. 폴리카보네이트의 경우 스튜디오 일부를 작업물로 가져와보고 싶어 작업을 시도했다. 현재도 캔버스와 폴리카보네이트 모두를 활용하고 있다”며 “최근엔 ‘소재가 같더라도 접근 방식에 따라 작업 세계가 넓어질 수 있다’고 느껴 보다 자유롭게 작업해보자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란다 포레스터가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사진=김금영 기자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물(bodies of water)’을 주제로 한 작가의 신작들을 볼 수 있다. 이번 전시명에 드러나기도 한다. 작가는 “고정되지 않은 형태의 물은 일상 속 무수한 변화의 공간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물속에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는 다수의 인물들을 화면에 그렸다”고 말했다.

마치 신전처럼 보이기도 하는 공간 속 스마트폰, 시계 등 시대를 유추할 수 있는 오브제들을 배제하고 오롯이 인물들만 그려 넣은 화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상상의 나래를 적극 펼칠 수 있게 이끈다.

파운드리 서울 측은 “작가의 작품 속 인물들은 여가와 휴식, 돌봄의 장면 속에서 평온함과 해방감을 동시에 보여주며, 작가는 관람자가 그 안에서 스스로를 투영하도록 제안한다”며 “인물과 공간이 물처럼 유동하는 화면은 자유와 포용, 공동체의 가능성을 찬미하며, 다양한 정체성이 교차하는 서울이라는 도시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고 밝혔다.

‘소멸’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한정은의 감정들

한정은 작가의 작품이 설치된 모습. 사진=김금영 기자

환한 화이트의 공간이었던 포레스터의 공간에서 여유로운 쉼을 맞봤다면 이와 대비되는 블랙 공간의 한정은의 공간은 차분한 분위기로 또 다른 평온함을 준다. 마치 낮을 지나 밤의 세계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다.

한정은은 ‘배니싱 포인트(Vanishing Point)’전을 마련했다. 이번 전시에서 그가 주목한 건 소멸과 상실의 이야기다. 얼음, 물, 빛 등은 물리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사라진다. 사라지는 과정에서는 허탈감, 박탈감도 있지만, 이를 기억하고자 하는 따뜻한 여운도 공존할 터다. 작가는 이 정서적 여운을 섬세하게 포착해 작업으로 표현한다.

한정은 작가는 소멸의 과정과 이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작업으로 보여준다. 사진=김금영 기자

작가는 “우리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 이 작은 핸드폰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정보를 매일 접한다. 그 정보는 끊임없이 생산되고 소비된다. 이렇듯 우리는 매일매일 소멸의 과정을 접하고 있다”며 “그런데 그렇게 무수한 소멸을 겪으면서 감정도 무뎌지고 있는 건 아닐까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기념비적 형상이 사라진 이후,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며, 어떤 감정을 지켜야 하는가’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어두운 공간 속 작가의 작품은 밤하늘에 뜬 별처럼 공간을 은은하게 밝힌다. 그 모습에선 숭고함까지 느껴진다. 특히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빛’은 단순한 시각 효과를 넘어, 존재와 감정이 머물렀던 자리를 더듬는 감각의 흔적으로 작동한다.

어두운 공간 속 한정은 작가의 작품은 밤하늘에 뜬 별처럼 공간을 은은하게 밝힌다. 사진=김금영 기자

에어브러시로 얇게 쌓아 올린 층은 금세 사라질 듯한 감정의 결을 드러내는 동시에, 스쳐 지나가는 순간을 붙잡으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그렇게 구성된 화면은 눈에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시간과 정서를 화면 위에서 천천히 머무르게 한다.

 

파운드리 서울 측은 “작가의 회화적 접근은 무분별하고 빠르게 소비되는 동시대 시각문화에서 오히려 ‘서서히 사라지는 것’에 시선을 두려는 태도에서 비롯한다”며 “작가에게 작업은 피상적인 재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찬미하고, 소멸의 과정을 포용하며, 그 여운을 되새기는 일종의 수행”이라고 밝혔다.

한정은 작가가 작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김금영 기자

이처럼 작가는 소멸의 과정에서 느끼는 모든 감정들을 온전히 느끼고, 이를 회피하지 않고자 한다. 작가는 “나 또한 인생을 살면서 큰 상실의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이때 느끼는 감정에 오래 머무르는 사람이었는데 주변에서 ‘별 거 아니다’, ‘괜찮아진다’ 이야기할 때 ‘왜 빨리 괜찮아져야하지?’ 의문이 들며 ‘이 감정들을 오롯이 느껴도, 천천히 받아들여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끊임없이 이별하며 살아가는 인생 속 우리는 어떻게 상실을 마주하고 해소하고 있는지 돌아보고 싶다”며 “유한한 세계에서 존재의 영원을 바라는 게 아니라 소멸을 숭고하게 수용하고, 충분히 기억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파운드리 서울, 국내외 유망 작가에 주목

파운드리 서울 외부 전경. 사진=김금영 기자

평온함이 깃든 두 작가의 또 다른 공통점은 국내에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유망 작가라는 것이다. 포레스터는 이번 전시를 통해 아시아 첫 개인전을 가졌고, 한정은은 1998년생의 젊은 작가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포레스터는 런던의 브라이튼 대학교에서 순수 예술 회화 학사를 졸업했다. 시카고의 마리안 이브라힘 갤러리, 런던의 티와니 컨템포러리와 갓츠 갤러리에서의 개인전과 더불어 유닛 런던, 런던의 빅토리아 미로 갤러리, 리버풀의 워커 아트 갤러리, 뉴욕 카스민 갤러리, 모로코 현대미술관, 런던의 질리언 제이슨 갤러리, 사치 갤러리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하며 유럽과 북미에서 다양하게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또한 작가의 작품은 소호하우스 컬렉션, 영국 예술위원회 컬렉션 등에 소장돼 있으다.

한정은은 세종대학교 회화과 학사 졸업 후 동 대학원에서 한국화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시드니 어 싱글 피스 갤러리, 서울 예술공간+의식주, 아트숨비, 서울 무음산방 등에서 개인전을 선보였고, 서울 3Q, 부산 갤러리플레이리스트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하면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각 언어를 구축하고 있다. 또한 2023년 은평문화재단에서 선정한 신진 청년작가 공모 지원사업 ‘사이’에 선정된 바 있다

2021년 6월 개관한 파운드리 서울은 전시와 출판물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국내외 아티스트들을 소개하고 동시대 미술의 담론을 이끌어가는 것을 목표로 두고 있다. 실제로 앞서 베를린 기반의 아티스트 헤닝 스트라스브루거를 국내에 처음 소개한 개관전 이후 율리아 아이오실존, 파샤드 파르잔키아, 페르난다 갈바오, 한지형, 장종완, 미에 올리세 키에르고르, 윤미류, 오묘초, 에피 완이 리, 아나스타샤 코마를 포함한 다양한 국내외 젊은 예술가들의 신작을 소개해 왔다.

윤정원 이사는 “파운드리 서울은 실험적이고 다양한 매체를 다루는 동시대 작가를 발굴하고, 그들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며 “이번 전시는 개관 이후 국내외 유망작가를 소개하는 13번째 자리다. 자유롭고 평화로운 작가들의 작업을 한껏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포레스터는 “파운드리 서울로부터 전시 제안을 받고 나 또한 기대가 컸다. 서울을 비롯해 아시아에서 전시를 가진 동료 아티스트에게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파운드리와 전시를 위해 접촉, 소통했다”며 “특히 전시 공간이 넓어서 이번 전시에서 대작에 도전할 수 있어 좋았다. 이번 전시를 통해 아시아 관객을 만날 수 있어 기쁘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나도 궁금하다”고 말했다. 전시는 파운드리 서울에서 10월 4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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