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식⁄ 2026.03.06 09:41:23
1970년대 2차례에 걸친 석유파동은 급성장하던 개발도상국 대한민국의 경제를 한 순간에 멈춰서게 만들었다. 그 위기의 순간, 중동을 오가며 석유 공급의 물꼬를 튼 경제인이 바로 고(故) 최종현 SK그룹 2대 회장이다. 당시 최 회장은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자원빈국 대한민국을 ‘무자원 산유국’으로 만들겠다는 꿈을 제시했다. 이후 SK그룹은 북예멘, 베트남, 페루 등에서 잇따라 석유 개발에 성공하며 최 회장의 꿈을 현실로 만들었고, 최근에는 석유를 넘어 LNG(액화천연가스) 분야에서도 성공 신화를 쓰고 있다.
지난 2월 23일 LNG를 가득 적재한 거대 수송선 한 척이 충남 보령 LNG 터미널에 입항했다. 얼핏 보면 한적한 지방 항구에 화물선 한 대가 도착했을 뿐이지만, 현장의 SK이노베이션 E&S 임직원들의 감회는 남달랐다.
이 화물선에는 서울에서 남쪽으로 약 4500km 떨어진 호주 북부 해안에 위치한 바로사(Barossa) 가스전 심해 지층에서 채굴한 천연가스가 실려있었기 때문이다. 이 가스는 첨단 시추 설비를 통해 뽑아올려진 후, 해저 파이프라인을 통해 호주 북부 다윈(Darwin)의 LNG 터미널에 도착, 정제와 급속 냉각 과정을 거치고, 다시 거대한 LNG 수송선에 실려 약 10일 간의 긴 항해를 거친 끝에야 목적지인 대한민국에 도달할 수 있었다. SK이노베이션의 사내독립기업(CIC)인 SK이노베이션 E&S가 지난 2012년 투자를 결정한 이후 14년간 이어온 장기 프로젝트가 마침내 성공의 결실을 내놓는 순간이었다.
이는 국내 민간 기업이 해외 가스전 탐사·개발·생산·액화·수송·도입까지 전 밸류체인을 독자적으로 완수한 최초 사례이기도 하다. 그간 국내 기업들의 해외 자원 개발은 단순 구매 후 수입 수준에 머물러 있었지만, 이번 바로사 가스전 프로젝트은 지분을 확보하고, 탐사·개발 단계부터 참여한 사업이어서, 생산(업스트림, Upstream), 액화·수송·기화(미드스트림, Midstream), 발전(다운스트림, Downstream)에 이르는 LNG 밸류체인을 완성한 특별한 사업으로 기록됐다.
SK이노베이션 E&S에 따르면, 바로사 가스전은 향후 20년간 매년 약 130만 톤, 총 2600만 톤의 LNG를 안정적으로 국내에 공급하게 된다. 이는 한국 전체 연간 LNG 수입량의 약 3%에 해당하는 규모다. 최근 글로벌 지정학적 불안으로 국제 가스 가격의 변동성이 극심해진 상황이어서, 해외 가스전 지분을 직접 확보해 생산한 LNG를 장기적으로 들여오게 될 이번 사업은 국가 에너지 안보 강화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호주 북부 티모르 해상에서 생산되는 바로사 LNG는 한국까지 운송 기간이 약8~10일에 불과해 중동(약 18~20일), 미국 걸프만(파나마 운하 경유 시 약 25~30일) 대비 공급 안정성과 가격 경쟁력이 월등하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브라운필드’ 전략으로 효율 극대화… 연 매출 1조 원 이상 경제 가치
바로사 가스전은 호주 북부의 다윈(Darwin)에서 북서쪽으로 약 285km 떨어진 티모르해 해상(수심 130~350m)에 위치한 대형 가스·콘덴세이트 광구다. 2005년 미국의 석유·천연가스 채굴기업 코노코필립스(ConocoPhillips)가 발견했고, 2019년 호주 에너지기업 산토스(Santos)가 운영권을 전량 인수하며 본격 개발에 나섰다.
매장량은 약 3.8억 배럴유환산(boe) 규모로 평가되며, 연간 LNG 생산능력은 350~370만 톤(3.7 MTPA), 콘덴세이트(LNG 채굴 시 부산물로 생산되는 휘발성 액체탄화수소)는 일일 약 1만1000 배럴 수준이다.
지분 구조는 운영사 산토스(50%), SK이노베이션 E&S(37.5%), 일본 JERA(12.5%)로 구성됐다. SK이노베이션 E&S는 2012년부터 탐사·매장량 평가 단계에 참여해왔으며, 2021년 3월 최종투자결정(FID)을 계기로 본격 투자에 돌입했다. 총 투자 규모는 초기 예상 37억 달러에서 인플레이션, 공사 지연, 규제 강화 등으로 46억~58억 호주달러까지 확대됐다. SK이노베이션 E&S의 투자액은 약 14억~16억 달러(한화 약 2조 원)로 추산된다.
개발 방식의 핵심은 ‘브라운필드(Brownfield)’ 모델이다. ‘브라운필드’란 이미 운영 중인 기존 인프라를 활용해 사업을 확장하는 전략을 말한다. SK이노베이션 E&S는 신규 액화플랜트를 건설하지 않고 기존 다윈 LNG 터미널(2006년 가동)을 개·보수해 활용하는 방식으로, 초기 투자비를 수십억 달러 절감하고 시운전 리스크를 최소화했다.
환경 규제와 원주민 소송 이겨낸 ‘K-에너지’ 집념
업계에 따르면, 이번 바로사 가스전 프로젝트의 가장 큰 난관은 환경·사회적 갈등이었다. 가스 내 이산화탄소(CO₂) 함량이 16~20%로 호주 가스전 중 최고 수준이어서 ‘탄소 폭탄’ 논란이 일었고, 2023년 시행된 세이프가드 메카니즘(Safeguard Mechanism) 규제로 배출량 실질 제로화가 요구됐다. 연간 10만 톤 이상의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대규모 산업 시설(약 215개 기업)에 배출 상한선을 설정하고, 2030년까지 매년 4.9%씩 배출량을 강제 감축하도록 하는 호주 당국의 환경 규제 정책이었다.
현지 원주민 커뮤니티와의 충돌도 심각했다. 파이프라인이 원주민들의 생활 터전을 통과하고, 희귀 거북 서식지 및 문화유산에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2022년 소송에서 호주 연방법원이 해안석유환경청의 승인을 무효화하며 시추가 중단됐다. 이후로도 계속 법적 공방이 이어졌고, 국내에서도 한국 수출입은행·무역보험공사의 7억 호주달러 금융 지원에 소송이 제기되는 등 반대 여론이 거셌다.
결국 산토스와 SK이노베이션 E&S는 문화유산 조사 강화, 환경계획 수정, 추가 협의 등을 통해 2024년 최종 승인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은 해외 자원개발의 현실적 어려움을 보여주면서도, SK이노베이션 E&S가 국제적 규제를 해결하고,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의 갈등도 관리할 수 있음을 입증한 사례로 평가된다.
타임라인을 살펴보면 프로젝트의 장기성과 난이도를 실감할 수 있다. 2012년 SK이노베이션 E&S 투자 시작 → 2018년 호주 해안석유환경청(NOPSEMA) 초기 환경계획 승인 → 2019년 산토스, 코노코필립스 지분 인수 → 2021년 최종투자결정(FID) 선언 → 2022~2024년 원주민 소송 등으로 지연 → 2025년 9월 20~22일 FPSO(부유식 생산·저장·하역 설비) 첫 가스 유입 → 2026년 1월 일본행 첫 카고 선적 → 2월 23일 한국 보령 첫 입항.
다행히 바로사 가스전의 경제적 가치는 높은 수준으로 평가된다. 현재 아시아 현물 가격(JKM) 기준 톤당 약 587달러로 계산하면 SK이노베이션 E&S 지분 물량(연 130만 톤)의 연간 매출 기여는 약 7.6억 달러(한화 1조 원 이상)에 달할 전망이다. 여기에 더해 SK그룹이 직접 운영에 참여하는 보령 LNG 터미널을 통해 기화·판매 마진까지 확보하므로 수익성은 더욱 높아진다.
LNG 징검다리 삼아 ‘넷제로’ 시대로… 글로벌 에너지 시장 선도
이번 바로사 가스전 개발의 성공으로, SK이노베이션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민간 1위 종합 에너지 기업으로서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할 계획이다. 특히 LNG를 화석연료에서 재생에너지로의 전환기 ‘브릿지 에너지’로 활용하며, 탄소중립 LNG 공급 확대와 CCS(탄소 포집 및 저장) 연계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최근 SK이노베이션은 총사업비 약 3조 원 규모의 베트남 응에안성 1500MW급 LNG 발전 프로젝트 사업자로도 선정됐으며, LNG 밸류체인 모델 수출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LNG를 통해 안정적 현금 흐름을 확보하면서 재생에너지·배터리·수소 등 넷제로 포트폴리오로의 전환을 가속화할 방침이다.
특히 이번 바로사 프로젝트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글로벌 공급망 재편 국면에서 한국의 에너지 다변화 전략에 결정적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호주산 LNG 비중이 늘면서 긴장이 격화되는 중동과 미국의 의존도를 낮출 수 있고, 가격 변동성과 지정학 리스크를 분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종수 SK이노베이션 E&S 사장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한 SK의 집념과 도전 정신이 오늘날 대한민국 에너지 안보 확립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불확실한 국제 에너지 시장 속에서 자원개발 노력을 지속해 국가 경제 발전과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망 구축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문화경제 정의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