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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왕곡마을’

수백년 세월 간직한 초가 담벼락 벌집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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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호 ⁄ 2007.07.03 14:53:33

흔히 전통마을이라고 하면 조선시대나 그 이전의 옛 집들이 모인 마을을 말한다. 대게 이 마을들은 도심과 다소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마을 지세가 평범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또한 수 백년의 세월 속에서도 옛 전통과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며 처음 마을을 개척한 분들의 후손이 여전히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초가집과 기와집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전통마을에는 예스런 자취가 넘쳐나며, 마을 곳곳에는 옛 사람들의 방향이 곱게 피어 있는 것이다.

동해안 변에도 이런 전통마을이 몇 곳 있다. 경북 영덕군에 가면 괴시리 전통마을과 인랑리 전통마을이 있으며 울주군에 가면 오기를 테마로 한 전통마을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남한의 최북단인 강원 고성군에도 전통마을이 하나 있다. 바로 '왕곡마을'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지난 1988년 우리나라 전통건조물 보존지구 제 1호로 지정된 마을이다. ■ 한적·조용한 길,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속초에서 통일전망대 방향으로 차를 계속 몰면 전망대에 가기 전 40km 지점에 우측으로 왕곡마을이란 표지판이 보이고 민속마을이란 부제가 첨부되어 적혀있다. 기세 좋게 핸들을 우측으로 꺾은 후 굴다리를 통해 약 1.5km를 운행해보라. 그러면 한적하면서도 조용한 신작로가 나타나는데 한눈에 보아도 범상치 않은 어떤 마을의 기운이 느껴질 것이다. 마을로 향하는 길 자체가 오지인데다가 첩첩산중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이곳이 강릉 함씨와 강릉 최씨의 집성촌이며 우리나라 북방 가옥의 원형이 잘 보존된 마을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안내판 바로 뒤에는 수 백 년은 족히 됨직한 아름드리 노송이 은은한 솔향을 풍기며 당당하면서도 부드러운 모습으로 서 있다. 눈을 감고 조용히 솔 향을 음미하니 1.5km 떨어진 바닷가의 내음이 코끝에 스쳤다. 천천히 차를 몰아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니 마을 한가운데로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개천가에는 코스모스가 바람에 한들거리고 있었고, 초록으로 물들여진 한 마리 여치가 한적함을 즐기고 있었다. 물은 따사로운 햇살을 받아 은린처럼 반짝이고 있었고 맞은편의 마당가에 는 섭다리 하나가 귀여운 자태로 서 있다. 좀 아쉬운 것은 개천가를 시멘트로 네모반듯하게 조성한 점이었다. 그냥 자연 그대로, 돌과 풀이 뒤엉켜 있는 개천가였더라면 마을 전체의 분위기와 무척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뒤뱃재·골무산·갯가산·밧도산·순방골 다섯 봉우리로 둘러싸인곳 뒤뱃재, 골무산, 갯가산, 밧도산, 순방골 등 다섯 봉우리로 둘러싸인 왕곡마을은 우리네 산천의 여느 마을처럼 포근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을 준다. 다섯 봉우리의 엄호를 받은 덕분인지 6·25 때도 마을의 집들은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단다. 폭탄 3발이 마을에 떨어졌지만 모두 불발탄이어서 화를 면했는데, 다섯 개의 준령들이 마을을 지켜준 덕이라고 노인들은 믿고 있다. 왕곡마을에서 휴전선까지는 불과 40km 정도인데 말이다. 왕곡마을은 전통마을로 지정받기 전까지는 오지 중의 오지여서 외부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마을 앞에는 송지호가 가로 막고 있는데다 바닷가의 공현진 마을에서 왕곡마을로 들어오는 고갯길은 하도 험해서 우마차도 오르기 힘들 정도였다는 것이다. 이런 오지에 마을이 형성된 것은 여말 선초의 상황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예전 강릉 함씨 중에 함부림과 함부열 형제가 있었는데, 형인 부림은 이성계의 편에 붙었고 동생인 부열은 공양왕에게 충절을 바친 현인이었다. 그래서 조선이 개국한 후 부열의 후손들이 관의 탄압을 피해 오지인 왕곡마을로 숨어들었다는 것이다. 후손들은 외부와 단절된 채 마을을 개척하였고 명당인 마을은 여러 차례의 전화와 화마를 용케 피했다는 것이다. ■ 자연스레 숨을 쉬도록 만든 정겨운 초가집 임진왜란이나 6·25는 말할 것도 없고, 지난 1996년 발생한 고성산불에서도 마을은 한 터럭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왕곡마을의 한 가운데에는 우물이 없다는 사실이다. 마을의 형상이 물에 떠있는 배인지라 가운데에 구멍을 뚫으면 배가 가라앉는다는 믿음 때문이다.

현재 왕곡마을에는 기와집 20채를 포함하여 초가집과 나머지 집을 합쳐 50여 호가 형성되어 있다. 전통 한옥마을로 지정된 후 낡은 옛집을 보수하는 공사를 한 탓에 기와집과 초가집들은 산뜻한 맛을 풍겼다. 그런데 마을의 한 가운데에 가니 개천가 옆에 자리 잡고 있는 방앗간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일제 시대에 건립된 듯한 방앗간은 물레식이 아닌 기계식이었는데, 낡고 녹슨 기계들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아련한 유년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 방앗간 맞은편 개천다리를 지나면 복구된 초가집들이 몇 채 보인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그 원형이 거의 남아 있지 않는 초가집. 이 초가집이 또 어떤 집인가? 천연 지붕 방수재인 볏짚을 여러 겹 쌓아 빗물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집이다. ■ 옛 흔적·풍습 향기속 다섯 준령의 미소 스며들고 통풍이 잘되는 구조인지라 여름에는 에어컨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시원하며, 겨울에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따뜻함을 안겨주는 집. 그뿐인가. 황토로 벽을 발라 해충의 접근을 차단하고, 세월이 지나면 자연스레 황토벽이 갈라져 늘 숨을 쉬도록 만든 집이 바로 초가집인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왕곡마을이 원형을 잘 보존한 이유가 새마을 운동의 영향을 받지 않아서라고 한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라는 새마을운동 노래 가사를 기억하는지... 지금은 원형을 보존한 초가집이 민속 문화재로까지 격상되고 있는데, 박정희의 눈에는 초가집이 조국 근대화의 지대한 장애로 보였던 모양이다. 민중의 정서가 살아 있는 초가집을 없애자고 직접 가사를 지어 독려까지 했으니 말이다. 다행히도 왕곡마을은 다섯 준령과 마을의 훌륭한 지세 덕택인지 새마을 운동이라는 화마를 피해갔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옛 전통 한옥의 모습을 훌륭히 보여주고 있으니 참으로 다행이고 또 다행이라고 하겠다. 왕곡마을 가옥의 특징은 마구간(혹은 외양간)을 부엌과 덧붙여 집 전체 형태가 ‘ㄱ’자가 되게 한 점이다. 춥고 긴 겨울을 마소가 잘 견디라고 따뜻한 부엌 옆에 붙여놓은 생존의 지혜가 돋보이는 구조인 것이다. 안동 하회마을의 전통 한옥이 규모가 큰데 반해 왕곡마을의 한옥은 20~30평 정도로 소규모라 작고 소박한 느낌을 준다. 하회마을에서 느껴지는 엄격함과 통제감이 없어 아주 정겹고 편안한 느낌, 민초들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향내가 솔솔 풍겨온다. 기와집이 많은 이유는 마을 옆에 기와 굽는 공장이 있어 싼값에 공급받아서라고 한다.

다섯 개의 준령이 만들어낸 분지로 둘러싸인 왕곡마을. 해월 최시형 선생이 간악한 일본군과 관군의 눈을 피해 잠시 도피생활을 할 정도로 오지였던 왕곡마을. 이 왕곡마을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개별 기와집의 형상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마을 전체의 분위기와 마을을 둘러싼 주변 환경, 그리고 집들의 배치를 잘 보아야 한다. 또한 단순히 밖에서 이 마을들을 보지 말고 때로는 집의 툇마루에 앉아 고즈넉하게 흘러가는 구름과 바람을 살펴봐야 한다. 그러면 옛 흔적과 풍습의 향기가 느껴지며 다섯 준령의 미소가 그대들의 가슴에 조용히 스며들 것이다. -김대갑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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