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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을 그들만의 영역으로 내버려두지 말라

동원호 취재 김영미 피디의 강연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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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1호 ⁄ 2007.07.03 10:58:23

참 눈에 띄지 않았다. 강연 전 눈치 챌만한 강연자의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았고, 청중사이에서 불쑥 등장하여 강연전과 시작의 경계지점도 알아채지 못하게 할 만큼 그는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본인도 그런 자신을 인정했는데, 선생님도 자신을 잘 못알아 보셨다고 한다. 심지어 학교 때 친구들은 그를 ‘여고괴담’이라며 부른다고 한다. 30세까지 잘하는 것이라곤 설거지밖에 없던 여자였다. 학교 때도 남들보다 두드러지지도 않았고 딱 중간만 했다고 한다. 찾아보니 남편과 이혼 후 우울증도 앓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그가 어떻게 유명한 분쟁지역 취재 전문기자가 된 것일까? 그는 2000년 동티모르 다큐멘터를 통해서 취재 전문피디의 길로 들어섰다. 그가 동티모르로 가게 된 것은 요즘 ‘죄민수’의 유행어처럼 ‘아무 이유 없는’ 행동이었다. 그저 외국이라는 곳을 가보고 싶었고 당시 언론에서 한창 동티모르 문제로 시끄럽길래 자연스럽게 동티모르라는 목적지가 정해졌다고 한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인데, 그의 회상에 의하면 외국과 미국을 약간 동일시 한 것 같다고 한다. 위험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뭔가 다른 세상이 있을 거라 기대했던 것이다. ‘설거지 잘한다’는 칭찬에 만족하던 그였다. 동티모르로 떠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그는 이제 세상에 던져지게 된 것이다. 모든 준비를 다하고 공항에 갔더니 공항관계자가 기가 막혀 하며 여권을 가져오라고 하더란다. 그래서 관공서에서 여권을 끊고 며칠을 기다렸다 다시 갔다. 이런 식의 던져지며 시행착오를 거치는 과정을 그는 매 단계마다 거쳤고 우여곡절 끝에 동티모르에 들어가게 되었다. 거기에서 1년을 살았다. 동티모르 아저씨의 집에서 살면서 말도 배우고 그들과 친해졌다. 함께 먹고 자고 놀고 일하며 그들의 모습을 가져간 카메라에 담았다. 전투가 벌어지면 같이 동굴로 피신을 가고 그런 모습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우연히 호주방송국의 현지 상주 직원으로 취업도 하게 되었고, 자신이 기거하는 아저씨집의 생활비까지 떠맡는 가장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자신이 찍은 테이프를 들고 방송국을 찾아갔다. 그것도 스스로의 계산은 아니었다. 한국방송국에 팔아보라는 호주스태프의 충고 덕분이었다. 방송국 수위에게 방송테이프를 상담하는 등 한국에서도 계속된 던져짐을 거치며 동티모르 테이프는 시청자의 주목을 받으며 방송되었고, 이후부터 그는 취재전문 피디가 되었다. 보통사람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과정들을 들으며 그의 취재기보다 김영미 피디(이하 김 피디)라는 사람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에게 물었다. “동티모르에 가지 않았더라도 지금처럼 한 분야에 일가를 이룰 수 있었다고 생각하나? 혹시 자신 안에 내재된 어떤 잠재력이나 자질 같은 것은 느끼지 못했나?” 즉각 답이 나왔다.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전 남편이나 어머님이 자신의 현재 모습을 신기해 죽겠다는 듯이 본다는 부연설명도 했다. 허탈한 대답이었다. 지금의 결과가 순전히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니. 내게도 자극을 주는 그의 통쾌한 인생이 그저 우연이라고 믿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후에 이야기를 풀어주면서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주었다. ■ “소외에 대한 관심은 내 자신이 약자 출신이기 때문” 이라크에서 휴대위성전화를 60초 통화에 15달러에 파는 요르단상인을 카메라에 담았다고 한다. 수많은 이라크인이 가족들에게 생존 사실을 알리기 위해 그 요르단상인의 주위로 몰려들었고 번호표까지 나눠줄 정도로 장사진이었다. 이라크인들이 60초간 떠든 것은 사람 이름이었다고 한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이름을 친척에게 불러주는 것이었다. 누구, 누구, 누구 하며 계속 이름들만 이어지는 통화였다. 그러다 60초가 끝나면 요르단 상인은 매정하게 전화를 뺐어버렸다. 그러면 이라크인들은 그 전화를 안 뺐기고 살아있는 사람의 이름을 마저 불러주려고 안간힘을 다해 전화기를 붙들었다. 이름이 안 불려지면 죽은 것으로 알려지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힘든 사람들은 가족들의 이름을 써 붙여 방송 카메라마다 대고 흔들었다. 김 피디가 찍을 수 없다며 종이를 치워달라고 부탁하고, 한국의 방송이라 가족들이 볼 수 없다고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가족들은 그래도 어딘가에서 누군가 보고 전해줄 수 있다며 막무가내로 종이를 갖다 댔다. 조산아를 찍기도 했다. 미군의 폭격 소리 때문에 이라크에 수많은 조산아가 태어났는데, 6개월만엔가 태어난 ‘네다’라는 아이를 찍었다. 전기가 안 들어와서 부모가 직접 발전기를 들고 왔고 그렇게 생명을 이어가는 조산아들이 병원 마당에 그대로 널려 있었다. 그 조그만 애기는 웃기도 했다. 배고프면 살짝 떠는데 엄마만이 그것을 알고 티스푼으로 짜놓은 우유를 떠먹였다. 움직이지 못해 등이 썩어 들어가 엄마가 수시로 아기를 이리저리 뒤척여 주어야 했다. 그렇게 한 달을 살다가 ‘네다’는 죽었다. 살아있는 가족의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요르단 상인의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모습, 한 달간 생존한 조산아 ‘네다’, 이런 모습들은 김 피디만이 찍은 이라크의 모습이었다. 모두들 위풍당당한 미군의 모습과 전투를 담기 바쁠 때 김 피디는 이러한 절박한 사람들의 삶을 담았다. ‘네다’의 이야기는 일본에 방송되어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고 그해 김 피디는 일본에서 상까지 받았다. 김 피디는 이런 장면들을 담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바로 사회적 약자 출신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설거지를 잘한다는 칭찬에 만족하고, 비행기도 탈줄 몰랐던 그는 분명한 약자였다. 스스로 시장에서 물가 걱정하고 애들이 혹시나 학원에서 배고플까 빵을 챙겨주며 살았기 때문에 보통사람들이 전화기에 매달리고 인큐베이터에 버둥거리는 조산아의 그 모습들을 지나칠 수 가 없었던 것이다. ■ 약자적 삶을 힘들어하지 않기 때문에 약자적 시각의 작품을 만든다 김 피디는 외국 분쟁지역에 가면 친구들이 많다고 한다. 취재비가 없을 때 돈까지 빌려줄 정도로 친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런 말을 하는 김 피디의 모습은 행복한 표정이었다. 오지에 가까운 동티모르에서 1년을 처음 보는 사람 집에서 살아온 김 피디. 약자적 시각과 함께 약자적 삶도 꺼려하지 않는 김 피디를 누가 싫어하겠는가. 삶이 단절되면 시각도 단절된다. 지금도 김 피디가 약자적 시각의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약자적 삶을 힘들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김 피디가 독특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이유다. 지난번 특종을 잡았던 동원호 선원 인터뷰도 사회적 약자인 동원호 가족들이 아버지와 아들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릴까 하는 그런 심정을 헤아려 했던 취재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취재에 격렬히 반대한 외교부의 대응도 이해한다고 한다. “그 분들 나름대로 입장도 있을 것”이라고 한다. “나만 옳다고 생각할 것은 아니고 서로가 다를 수밖에 없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풀어나가야 될 문제”라고 말했다. 김 피디는 “방송국 등에 많은 유학파 등 쟁쟁한 사람들이 있지만 실제로 차별적인 작품은 많지 않다”고 한다. “일단 그 분들 삶 자체에도 한계가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일반인이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작은 일상에서 차별적 시각의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내 생각도 그렇다 만약 일반 대중이 저널리즘을 좀 더 쉽게 생각하고 대한다면 시각도 넓어져서 저널리즘의 폭은 엄청나게 다양해질 것이다. 지금의 저널리즘은 우리 사회 일부의 시각만을 반영한 엄청나게 협소한 저널리즘일지 모른다. 그것은 김 피디처럼 약자적 삶과 시각을 간직한 채 주류 저널리즘 영역에 들어간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김피디의 강연에서 내가 들은 명령은 이것이다. “저널리즘을 그들만의 영역으로 내버려 두지 말라. 당신들의 시각과 삶을 반영한 저널리즘을 만들라.” -김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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