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 치고 미술에 문외한이 아닌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말하고 나니 당연한 말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 문장이 되어 버렸는데, 미술에 문외한으로서 우리가 현대미술에 대해 느끼는 거리감과 낯설음은 쉽게 가셔지지 않는다는 점에는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역시 문외한인 필자에게 우연히 미술과 만나 조금은 친한 척 할 수 있게 되는 계기가 있었는데, 벌써 여러해 전인 2001년 삼성본관 옆 로댕갤러리에서 있었던 <재불중국작가 왕두 : 일회용 현실展>이 그것이었다. 물론 이 전시회를 스스로 찾아간 것은 아니었고, 관람을 위해 상경한 한 친구의 서울나들이를 길잡이 해주게 되면서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서울역에서 슬슬 걸어와도 되는 거리를 길잡이 해달라고 했던 그 친구가 아무래도 내게 미술에 대한 뭔가를 보여주려고 일을 꾸몄던 것은 아닐까 의심도 해본다. 평소 미술에 별로 관심도 없었고, 잘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하려 노력해 본 적도 없었던 필자는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낯설기만 했던 고급갤러리에 첫발을 들여놓게 되었던 것이다. 낯설음은 곧 화려하고 우람한 전시물들의 위용과 특이함에 더욱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나는 그저 친구를 안내했으니 됐다고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전시물들을 둘러보려 애썼다. 거기서 나는 2차원과 3차원이 상호 왜곡되어 교차되는 왕두의 표현기법에 낯설음과 함께 신선함을 느꼈고, 왜 저런 작품을 만들어냈을까 호기심이 생겨났다. 호기심을 느꼈다는 것 자체가, 미술을 향한 다가섬의 첫번째 조건이자 실천행위가 아니었을까? 왕두의 ‘일회용 현실展’의 작품들에 사용된 표현기법은 인쇄매체에 담긴 2차원 이미지들을 다시 3차원으로 재구성하되, 2차원에서 왜곡된 입체감을 그대로 3차원에 옮김으로써 실물과는 다른 기괴한 비율의 조각을 만들어내는 작업이었다.
그러한 기괴한 비율의 입체들을 바라볼 때 누구나 처음 느끼는 것은 ‘실물과 다르다’는 느낌이었을 것이고, ‘왜 실물과 다른 조각들을 만들어냈을까?’라는 의아함을 느끼게 된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을 이해하기 시작한 첫 번째 만남은 매우 일사천리로 이뤄진 감이 있다. 아마도 좋은 인연이었기 때문이리라. 테마는 ‘일회용 현실’ 즉, 종이잡지 속에 실린 사진과 이야기들이 실제의 삶과 생활을 전달해 주지만, 그 잡지를 덮는 순간 종이는 가볍고 약한 물질로 돌아갈 뿐이라는 것의 허무함을 극복하려는 작가의 의지 또는 제안이었다. 우리들은 삶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넘쳐나는 정보들 속에서 그저 가볍게 훑어보고 잠시 감동하고 덮어버릴 뿐이었다. 그리고 잊혀지는 순간에 그것들은 나의 현실과는 무관한 이야기들로 돌아간다. 그래서 일회용 현실이라는 테마는 작가가 우리들에게 잊혀지지 않았으면 하는 이야기와 이미지를 그 연약하고 가벼운 종이 속에서 다시 불러내어, 새로운 입체감으로, 그러나 역시 왜곡된 2차원의 비율을 유지한 채 되살려 내는 노력으로 구현되었다. 이러한 나름의 감상을 물론 당시에는 정리된 표현으로 다듬어낼 수 없었다. 막연하게 느낌으로, 그리고 머릿속에서 그런 표현들이 뒤죽박죽된 채, 미술작품이 내게 준 어떤 작은 혼란과 호기심의 발동을 불쾌하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었을 뿐이다. 작품들의 사진을 찍어 보고, 바닥에 쓰레기처럼 무질서하게 깔려있던 잡지기사 프린트들을 하나씩 주워 보며, 조각 작품의 이야기를 찾아내고, 그러면서, 작가가 의도했던 이야기와 기억해주기 바랬던 메시지들을 하나씩 만나가게 된 것이다. 관람을 마치고 나온 다음 차 한 잔을 나누면서 나는 비로소 조금은 정리된 표현으로 감상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미술이란 참 재밌는 작업이구나! 사라져 버릴 종이 속 이야기들을 기괴한 방식으로 불러와 잊혀지지 않게 만들어내다니. 나름대로 파워도 있는데!” 나의 이런 이야기에 친구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너, 미술을 좀 아는구나?” 그렇게 대답해 주었다. 과찬이었지만, 그날의 미술관 나들이는 단순한 길잡이역할에 그치지 않는 보람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필자는 감히 ‘나는 미술을 좀 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미술관 방문이 더 잦아진 것도 아니고 체계적인 감상을 시도해 본 적도 없다. 다만, 나의 눈길에 머무는 수많은 이미지들과 대상들을 이전과는 다른 눈길로 보게 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말하자면 미술에 관해 실눈 정도는 뜬 것은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어떤 작품을 만나든 그 작품들이 내게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게 되더라는 것이다. 어떤 작품에든 이야기가 담겨 있다. 때로는 침묵으로 떡하니 버티고 있는 작품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너무 어지럽고 시끄러운 이야기들이 혼돈처럼 발산되는 작품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미술작품은 주로 비쥬얼로 표현되지만,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귀를 열고 다가서야 한다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작가의 의도를 알아보려는 호기심과 약간의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아무래도 어렵다고 느껴지시는가? 그렇다면 그냥, 가만히 다가가 보기만이라도 하시라. 그냥 느껴지는 대로 느끼면 된다. 작가의 의도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이미 세상에 나온 작품은 새롭게 삶을 시작한 아기처럼, 스스로 세상과 대화하고 부대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범접하기 두려워하거나 공연히 피해가지만 않는다면, 이미 당신은 미술과 대화하고 이해할 수 있는 자격을 충분히 가진 것이다. -이병철 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