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보면 이따금, 뜬금없이 “도(道)에 관심이 있으세요?”라는 질문을 던지는 일단의 무리들을 만난다. 글쎄 먹고살기도 바쁜데, 도라니……. 손때 묻은 불경의 한 모퉁이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평상심(平常心)이 곧 도(道)”라고. 지난 1990년대 중후반, 대한민국에는 ‘인도(India)’바람이 불었다. 그곳을 다녀왔거나 가고자 하는 이들이 다투어 내 놓은 책들이 바로 ‘인도 기행물’들이었다. 너무 많아서 그 예를 들기도 버거울 만큼이나 많았다. 속된 말로 ‘개나 소나’ 다 인도를 말했다. 왜일까. 왜 그 당시 우리들은 ‘인도’를 갈구했을까. 세기말이어서? 아니면 먹고살만해지니까 갑자기 ‘깨달음’에 대한 욕구가 솟구쳐서? 정답은 ‘나도 모른다’이다. 그걸 알면 나는 벌써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을 것이다. ‘깨달음’, ‘도’, ‘명상’, ‘신비’ 따위의 낱말과 짝하여 인도(India)보다 더 맞춤한 말이 있을까? 그런데 이런 생각도 사실은 ‘파블로프의 개’와 다를 바 없다. 다분히 ‘조건반사’의 성격이 짙다. 아니라고 한다면 당신은 신문이나 방송을 전혀 보지 않는 ‘도인(道人)’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중편소설 <인도로 간 예수>의 작가 송기원은 아주 낡은 수법으로 대부분 사람들의 길들여진 사고를 자극한다. 제목부터가 그렇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더욱이 인도로 간 사람이 다름 아닌 ‘예수’라니, 일부 편협한 종교인들에게는 묘한 상상력까지 발동하게 함직하다. 추측건대 이 소설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으레 이런 상상부터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인도에 간 것일까, 갔으니까 유명한 소설가가 작품으로 썼겠지’라고 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송기원은 순진한 독자의 소박한 기대마저 저버린다. 간신히 예수와 인도를 ‘구도자’와 ‘깨달음의 경계’로 ‘은유’하는 데는 성공하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의 연결고리 이상의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 I wish you a merry christmas 아 참, 미리 밝히건대 이 소설 <인도로 간 예수>는 제목이 풍기는 것과 같은 의미의 불교적 내용은 아니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선(仙)소설’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송기원은 제목뿐 아니라 소설의 전개 과정에서 상당 부분 불교적 상상력에 기댄다. 이 소설의 구성은 매우 간단하다. 작중 화자(話者)인 ‘나(화가)’와 자칭 도사인 ‘청도’는 우연히(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미 예정되어 있는’) 고속버스 안에서 만난다. 그 다음부터는 ‘나’와 ‘청도’의 입을 빌려 이 소설의 얼개를 간추려 볼 수 있다. 예수에게 인도는 고유명사가 아닌, 추상명사일 수도 있다고 작가는 주장한다. 허나 그것은 현대화된 세계 속에서의 사고방식 중의 하나로 인정받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예수가 살아가던 그 시대로 시점과 관점을 환원시켜 본다면,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인도(India)라는 곳이 당대나 지금이나 인류의 정신적인 메카 구실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성인(聖人)에게 조차 그러했을 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극히 편벽한 발상이다. 나도 물론 알고 있다. 소설이라는 것이 단순히 사건의 나열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있을 법한’ 일을 ‘있을 법한 말투’로 전개해 나간다는 사실을. 허나 하나의 종교적 현상을 형상화할 때는 그 종교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가 밑바탕 되어야 한다. 허나 이 작품은 ‘인도(India)’와 ‘예수’라는 상징적 이미지를 억지로 연결한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예수가 인도(India)에 갔건 안 갔건, 그것은 하나도 중요한 사건이 될 수 없다. 물론 ‘안티 기독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의 좋은 소재가 되겠지만.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작품은 말장난 같은, 하지만 재치 있는 문장에 의지하여 소설가라면 당연히 갖춰야 할 ‘글 솜씨’로 버텨 나간다. 그러나 도입부는 그렇지 않다. 중편 소설 특유의 긴장과 절제, 충실한 상황 묘사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나’의 ‘나’에 대한 문제의식은 비장하다. 그리고 그 원인을 찾아가는 나의 성찰 또한 진지하다. 이윽고 ‘나’는, “이 시대나 사회에 대한 남다른 도덕력과 희생심 없이 빠져든 ‘민중 이데올로기’가 원인”이었음을 고백한다. 이른바 ‘민중이데올로기’라는 것이 나에게 위선과 허위라는 굴레를 덧씌웠다는 것이다. ■ 민중이데올로기의 진실 ‘민중이데올로기’, 언제쯤인가 보수(사실은 수구) 진영으로 투항하는 작가들의 입에서 제법 유행했던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을 써먹은 사람들치고 도덕적으로 치명적인 문제가 없는 사람을 나는 알지 못한다. ‘민중이데올로기’라는 말은 낱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민중’이라는 말과 ‘이데올로기’라는 거대한 무게를 지닌 두 개의 말이 상호 충돌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민중’이라는 말부터 하나의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한 사회의 공기(Air) 역할을 자임하는 것이 문학이라면, 그 문학을 하는 문학가들은 이미 공인(公人)이다. 따라서 하나의 문장을 만들고 다듬을 때는 자신의 정치적 혹은 문화적 이념과 일치하는 것을 골라 써야 한다. 허나 이 작품의 곳곳에는 송기원이라는 탁월했던 작가를 의심케 하는 것들이 숨어 있다. 예술가의 작품이 힘을 잃고 생명력을 잃는 원인이 어찌 ‘민중’에게 있을 수 있는가. 문학예술의 힘을 잃게 하는 것은 하나의 이념이나 신념의 약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예술인 자신의 방탕함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땀 흘려 노동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노동자의 이야기를 쓰면 그 작품은 이미 ‘죽은’ 작품이며, 동원되는 비유는 ‘사(死)비유’인 것이다. 도(道)라는 것에 대하여 진지한 고민을 하는 것이 일상화되지 않은 사람이 도(道)를 말하고, 인도(India)라는 철학적 수사에 쉽게 현혹되는 사람이 인도(India)를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정담(情談) 수준일 뿐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다시 읽는 이유 간단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온 이유를 알고 싶어서다. 그런데 왜 하필 송기원의 <인도로 간 예수>냐고? 선교성 짙은 책들을 제외한다면, 그나마 이 작품이 비교적 건강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도’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소설의 긴장은 무너진다. 자칭 도사들이 사는 지리산 어디쯤인가인 ‘인도’에서 ‘나’는 가부좌를 한 채 공중으로 튕겨 오르는 경지에 이른다. 그것도 석 달 만에. 드디어 나는 ‘내 자신을 그릴 수’ 있게 된다. 나는 이런 ‘나(작중 화자)’의 변신을,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갑자기 나타난 산신령에게서 건네받은 환약을 먹고는 구름을 타고 올랐다는 얘기와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작가는 아마도 이런 공박을 예상했던지 몇 군데 방어용 ‘지뢰’를 묻어 놓긴 했다. 초능력이니 신통술이니 도력이니 하는 것들을 ‘해찰’이라 말해 두는 둥. 어떻든 이 소설의 중반 이후는 선도(仙道)에 모든 것을 바친다. 소설가는 없다. 선도에 충실한 전도사만 있을 뿐. 그 모습은 마치 공연 중에 무대로 뛰어들어 연기 지도를 하는 연출자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다. ■ 의(義)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우리 시대의 예수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시인 정호승의 표현대로 그는 아마도 ‘강간범의 얼굴’로 ‘뺑기통’ 옆에 쭈그리고 있을지도 모르며, 달동네 재개발지구의 걸인의 모습으로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지난 2004년 겨울처럼 여의도의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국가보안법 철폐”를 외치며 단식을 하는 사람들의 처절한 눈빛 속에 거(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어디에 어떤 얼굴로 있든, 그는 아마도 많이 아플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고문하고, 아이 앞에서 그 어미를 폭행했던 세월, 그 세월이 바로 예수의 생애 내내 그를 괴롭힌 자들의 그것과 다를 게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사랑’이라고들 한다. 틀린 말이다. 그의 가르침은 ‘정의(正義)’다. ‘불신 지옥, 믿음 천국’ 따위의 헛소리는 개한테나 줘라. 예수는 분명히 말했다. ‘믿기만 한다 하여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고 말이다. 예수를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그 제사장들은 지금도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말한다. “이 빨갱이들아”라고. ‘봉사’라는 허울 좋은 슬로건 아래 ‘공격적 선교’를 보낸 대형 교회의 목사는 자신이 보낸 젊은 목사의 죽음을 두고, “수백 명 아니 수천 명의 순교자가 나와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또 우리 교단의 거물 중 거물인 김홍도 목사는 일전에 인도네시아를 덮친 ‘쓰나미’를 두고,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벌”이라고 했다가, 교단 내에서조차 ‘또라이’ 취급을 받았다. 다시 오늘,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19명의 ‘어린 양’들은 “하느님께 감사한다”고 했다. “언론에도 감사드린다”고도 했다. 나 역시 한 명의 기자지만, 참 해도 너무한다. 그들이 풀려나기까지 단 하루도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생한 이들은 바로 외교통상부의 공무원들이다. 진정한 감사는 그들에게 드려야 한다. 또 하나, 언론은 이번 사태에서 무슨 기여를 했는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중계방송식 보도와 개신교 눈치 보기에 급급해 문제의 본질인 ‘공격적 선교’ 혹은 ‘막가파 식 선교’에는 애써 눈 감고 있지 않았는가.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트리의 찬란한 조명에 넋이 나갈 뿐, 예수 그리스도가 들고 왔던 ‘평화의 칼’과 ‘정의의 방패’를 알지 못한다. 이제 그 칼과 방패로 자신들을 비판하는 모든 이들을 ‘사탄’이라는 말로 규정짓는데 익숙한 ‘뇌 없는’ 무리들을 내리쳐야 한다. 그것도 지금 당장. <유성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