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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루이 다비드, ‘권력의 해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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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4호 ⁄ 2007.09.10 13:43:24

‘권력의 해바라기’라는 표현을 생각하면 문민정부 이전에 단 한 번도 권력을 비판해 본적이 없는 <조선일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조선일보>가 박정희와 전두환을 찬양한 것은 몹시도 속을 매스껍게 하지만 모순되게도 나는 <조선일보>의 정기구독자다. 단지 <조선일보>를 구독한다는 이유만으로 동지(?)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래도 난 조선일보를 비판적으로 즐기며 보고 있으니 걱정 말았으면 좋겠다. 그들의 주머니를 채워주고 있는 점은 할 말이 없지만. 오늘은 200년 전에 활동하던 프랑스의 해바라기 예술가에 대한 메모를 하려 한다.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는 파리출신(1748.8.30)으로 고전주의 미술의 대표주자다.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의 세월에 로마에 머무르며 고전미술을 연구했다. 그러한 배경에서 탄생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Oath of the Horatii-1784)’라는 작품은 당시 프랑스 사회에 불어 닥치던 애국사상을 고취시키는데 큰 기여를 한 작품이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1784) 결투를 떠나는 세 형제에게 아버지가 맨 손으로 칼날을 잡고 전해주면서 다짐을 받고 있다. 아버지 뒤로 남겨진 가족들의 고민과 고통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형제들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있다. 이 작품은 로마제국이 호라티우스 삼형제를 보내 전쟁을 피하기 위한 고대 로마의 이야기를 표현하고 있다. 이들 삼형제가 적국의 군인과 대결하여 최후에 남은 용사의 나라가 승리하는 것으로 합의한 일을 소재로 하고 있다. 더욱이 이 중에 한 형제의 아내가 적국의 여자다. 로마에서 돌아와 루브르궁전에서 이 작품을 선보인 자크 루이 다비드는 6만여 명의 프랑스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군주제 속에서 부패할 대로 부패한 왕족과 귀족들의 천국 프랑스에서 민중들의 애국심을 충분히 고취시키고도 남을 작품이었던 것이다. 루이16세가 지배하던 당시 프랑스는 미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느라 엄청난 비용을 감수해야 했으니 평민들의 세금부담도 어마어마했다. 황당하게도 귀족들은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하니 평민들의 불만의 목소리는 슬슬 높아져만 갔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변화와 개혁의 필요성을 충분히 인식한 자크 루이 다비드는 의식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한다. 다음 작품 속에 등장하는 두 사람 또한 그와 가까운 부부인데, 프랑스의 화학자로 낡은 화학술어를 버리고 새로운 ‘화학명명법’을 만들어 출판했고, 현재 사용되는 화학술어의 기초를 확립한 ‘라부아지에(Lavoisier, Antoine Laurent, 1743~1794)와 그의 아내 마리아’다.

■라부아지에 부부의 초상화 (1788) 이후 1789년 프랑스에는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격변기를 맞는다. 당시 평민대표 중에 문제적 인간이 있었으니 막시밀리안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F. M. I. de Robespierre, 1758.5.6~1794.7.28)이다. 1789년6월20일 비가 내리는 중에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평민대표와 성직자의 국민의회가 루이16세의 명령에 따라 회의장에서 쫓겨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리하여 인근의 테니스코트에서 모임을 개최하는데, 이 자리에서 국왕의 허락 없이 평민과 귀족, 성직자들이 최초로 한데 어울려 힘을 합칠 것을 서약하는 일대 사건이 일어난다.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 현장을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이 바로 이것이다.

■테니스 코트의 서약 (1789) 로베스 피에르는 자코뱅당의 지도자로 활약하였고 파리코뮌의 대표로 추대되었으며 국민공회에 1위로 당선되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당시 자코뱅 당원으로서 혁신 측에 가담하여 활동하고, 로베스 피에르로 주도되는 새로운 독재의 공포정치가 거침 없이 진행되었다. ‘피의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민중들은 굶주리고 계속 고통을 당한다. 시민들은 들고 일어나 루이16세와 마리 앙뚜와네뜨를 죽이라고 들고 일어서는 등 프랑스의 혁명은 거침없이 고통 속에 진행된다. 의회에서의 투표에 따라 1793년1월20일 루이16세가 처형된다. 자크 루이 다비드도 그가 추종하던 루이16세를 외면하고 그의 처형에 동의를 하게 되며, 의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의 우상이던 로베스 피에르와 마라가 나란히 앉아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적극적으로 혁명에 가담하지만 수많은 동지와 적들이 마녀사냥 하듯이 단두대에서 사라져 가는데, 한때 다비드와 가까웠던 라부아지에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등 정국은 점점 불안해진다.

■마라의 죽음 (1793) 그러던 와중에 공포정치의 한 축을 이루던 급진파 마라의 행동을 도무지 참지 못한 샤를로트 코르데라는 스물다섯 살 처녀의 손에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혁명동지가 참다못해 그를 살해한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제대로 보는 눈이 멀어 있던 공포정치의 핵심들은 이 사건에서 다시 한 번 다비드의 역할을 강조하게 된다. 다비드는 마라를 마치 성자를 그리듯 표현한다. 지독한 피부병으로 평소에 욕조에 누워 죽음의 명단을 작성하곤 하던 마라의 모습을 몹시 성스럽고 영웅적인 걸작을 만들어 왜곡된 미를 추구한 것이다.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무수한 사람들을 단두대에 올렸던 악마와 같던 그의 행동이 이다지도 숭고한 그림으로 되살아나다니, 마치 <조선일보>가 우리 국민들에게 엉터리 왜곡된 정보를 전달하듯이. 마라가 떠난 3년 뒤에 마리 앙뚜아네뜨 여왕도 처형당한다. 이미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던 다비드에게 이러한 일은 이미 무감각해져 있었다. 그러한 그에게 아내가 불만을 표시하고, 이들은 이혼까지 하게 된다. 더구나 치안을 책임지는 집행관의 자리에 올라 시민의 처형을 결정하는 학살극의 공모자가 된다. 혁명정부를 찬미하는 수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다. 사필귀정이라, 또 한 명의 공포정치 핵심인사인 로베스 피에르가 실각하자 투옥되었다. 로베스 피에르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자 거짓으로 감동을 전하던 실력 있는 화가 다비드의 시대는 끝나는 듯 싶었다. 1805년, 그는 부활한다. 나폴레옹의 황제 등극과 함께. 한 번 권력의 맛에 길들여져 있던 그는 나폴레옹에게 중용되어 제국의 공식화가로 추대되어 다시 한 번 권력의 해바라기의 삶을 살아간다. 후에 나폴레옹이 쫓겨나자 그의 추종자들 상당수가 용서 받았지만 조국 프랑스는 그를 용서하지 않았고 다비드는 벨기에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예술도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는 것이고, 자크 루이 다비드가 바로 그런 삶을 살았던 것이다. 오늘날 이 땅의 조선일보가 언론이란 이름으로 막 살듯이. <안중찬 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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