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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처녀막에 집착해왔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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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5호 ⁄ 2007.09.17 11:43:26

지난 2004년 책 한 권을 기증받은 적이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작가로부터 말이다. 당연히 이름도 처음 들어보았다. 한경아. 그리고 그녀의 장편 소설 <늘(시와 사회)>, 책의 겉표지에는 그녀의 사진이 있다. 상당한 미인이다. 그 사진 한 장만으로도 남정네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하다. 책을 펼쳐 보았다. 1977년 생. 서울산업대학교 금속공예과 졸업. 숙명여자대학교 디자인대학원 장신구디자인 전공. 보석전문잡지 ‘귀금속과 보석’, <주얼리신문> 기자. 작가의 약력이다. 이 약력만으로는 한경아라는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물론 알 수 없다. 책을 읽는 수밖에. 책읽기의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 소설의 주제와 소재를 책을 전해준 사람으로부터 미리 들었던 까닭이다. ‘미혼모’, ‘낙태’, ‘성(性).’ 여성작가의 성장기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와 주제들이다. 우리 모두가 살아가면서 한 번씩은 부딪치지만, 그러나 동시에 깊이 고민하지 않는 것들이다. 세월이 날카로워지고 그 날이 예리해질수록 우리는 한 두 개씩의 상처를 지니게 된다. 그 상처는 이따금은 우리에게 ‘역설의 힘’을 주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 사람의 영혼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시간의 상처를 말이다. 그리고 그 상처는 그 사람의 남은 생을 규정짓기도 한다. 하나의 명제가 아닌, 그 모든 한계의 총합으로. ■내 젖은 눈을 들어 세상에게 보여줄 때 ‘세계 최대의 고아수출국.’ 우리는 얼마 전까지 이런 비아냥을 들으며 살았다. 피 가름이 유독 억센 땅, 한반도. 남과 북으로 나누어진 것만으로도 모자라 동과 서로 갈리고, 다시 내 핏줄과 남의 씨를 악착같이 따지는 무궁화 3천리 화려강산에 우리의 몸과 영혼이 거(居)하고 있다. 버려지는 아이들에게 얽힌 그 서글프고 억울하며 노엽거나 가여운 사연들을 우리는 종종 만난다. ‘휴먼 다큐’ 혹은 ‘인간극장’ 류의 이름으로 말이다. 그 세월들을 보면서 우리는 눈물을 흘린다. 가끔은 후원전화도 돌린다. 그러나 그뿐이다. 우리 자신이 그 아이들을 ‘데리고 살’ 준비와 의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버려지는 아이들의 누구인지도 모를 엄마와 아빠를 비난한다. “인간이 어째 그럴 수 있느냐”고. 핏대를 세우고, 우리 자신을 모두 순결과 순정의 화신으로 형상화한다. 그러나 막상 그 일이 우리에게 닥치면 아주 많은 경우, 별 고민도 없이 태아 살해를 결행한다. 그것은 명백한 ‘살인’임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을 하는 것일까. 기본적으로 우리는 ‘순결강박증’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먹고 살기가 팍팍한 기층 민중들에게는 ‘먹고 살만한 사람들’과 같은 순결강박증이 있을 리가 없다.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오늘을 어떻게 무사히 넘길 것인가 하는 절대적인 삶의 목적이 있을 뿐이다. 교과서와 학교에서, 그리고 더 넓은 세상에서, 우리들에게 ‘정신적 순결’ 혹은 ‘정신의 처녀막’을 요구하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강제하는 그 ‘순결’은 그러나, 실체적으로는 무의미하다. 정신이 아닌 육체의 경우, 그 혐의는 더욱 짙어진다. 돈 몇 푼이면 간단하게 ‘재생’되는 처녀막에 왜 우리는 집착해왔던가. 우리로 하여금 순결에 천착하도록 만든 것은 우리의 뒤틀린 역사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들만의 ‘정보 공유’, 바로 이것이다. 스너프 필름을 즐기는 자들일수록 아래 계층 혹은 계급에게 ‘순결 이데올로기’를 주입한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깨끗한 척 보이게 만드는 가장 손쉽고 저렴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서 말 걸기 언젠가 TV에서 미혼모들을 보듬어 안고 살아가는 수녀들의 일상을 본 적이 있다. 한 해에도 수도 없이 생겨나는 미혼모들은 그 고통과 번민과 눈물과 멸시와 악다구니를 홀로 감내할 수밖에 없다. 적어도 지금의 구조 하에서는 그러한 ‘고통의 변주곡’을 그치게 할 수 있는 방식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 다큐에서 잊히지 않는 장면이 한 컷 있다. 아이들을 입양기관으로 보내기 전날 밤, 엄마들과 아기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엄마들은 모두 고운 한복을 입고 있다. 아기들은 왜 자신들이 거기 있는지 당연히 모른다. 간소한 의식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품고 잘 자신의 핏줄을 안고 엄마들은 촛불을 든다. 그리고 아기들에게 노래를 불러준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비록 그것이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체온 나누기’가 될지라도 그들은 모두 행복하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말이다. 내 망막에 꽂힌 장면은 바로 아기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촛불의 그림자였다. 우리는 흔히 말한다. ‘이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고. 과연 그럴까. 한경아의 장편소설 <늘>은 나에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대한민국이 그 아이들의 눈망울을 감당해내고 있는지를 물었다. ‘소설’이라는 허구의 형식에다 ‘현실’이라는 살가움을 얹어서. 그리고 또 내게 말을 걸어왔다. 당신은 과연 당신의 문학에서 그 아이들을 노래해본 적이 있느냐고. 대답은 ‘없다’이다. 읽는 내내 나는 그 사실이 부끄럽고 한심했다. 적어도 문학이라는 것을 통해 세상을 환하게 뒤흔들고 싶다는 자가 어둡고 구석진 곳의 아이들을 외면해왔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한경아 장편소설 <늘>은 결코 만만히 읽을 수 있는, 또 그런 방식으로 읽어서는 안 되는 작품이었다. ■그래서 꿈은 꿈, 그래도 꿈은 꿈 ‘성(性)’을 말할 때마다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몸을 사린다.’ 매일 매일의 일상에서 만나면서도 무언가 어색한 그 무엇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껴안고 있는 모든 금기 중 대부분이 성(性)에 관련된 것들이다. 화나거나 지나치게 즐거울 때 애용하는 욕 또한 대부분이 성적인 것들로 채워져 있다. ‘훔쳐보기’와 ‘몰카’로 상징되는 일련의 에로티시즘은 우리 자신이 예수나 석가 급의 성인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는 이상,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기초적인 욕구이자, 욕망이다. 한경아 장편소설 <늘>은 바로 이러한 우리들의 위선에 대해 시원하게 뺨을 갈기고 있다. 나 역시 그 매서운 손길에 한 대 맞았다. 아직도 내 뺨에는 작가의 영혼으로부터 나온 붉은 손자국이 있다. 솔직히 말하고 공론화하기에는 뭔가 ‘창피하다’고 느끼는 것이 성이다. 굳이 ‘남녀칠세부동석’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춘기 이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과 이성의 육체에 대해 호기심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한다. 자위행위는 그러한 욕망을 해우소에서 건져주는 방법 중의 하나다. 그렇다면 섹스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우리를 욕망의 하수구에서 탈출시키는 ‘좋은 벗’이다. 그런데 왜 그리 많은 ‘섹스 중독증’ 환자가 존재하는가. 미국의 트렌티 드라마를 보면 그 원인이 조금이나마 보인다. 어느 정도의 경제적 안정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의 길이 있다. 자신의 이데아를 실현하기 위해 정신적 혹은 육체적으로 헌신하는 것과, 육체의 요구에 철저하게 복무하는 것. 이 두 가지의 길 중에 ‘섹스 중독증’ 환자들은 두 번째의 경우에 들어간다. 물론 ‘먹고사니즘’이 해결되지 않은 사람들 중에도 ‘섹스 중독증 환자’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숫자는 미미하다. 우리 사회 역시 그러하다. 신문지면에 지나치게 자주 등장하는 성 관련 범죄 역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혼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성교육의 중요성을 침 튀기며 말하면서도 우리의 아이들에게는 ‘차마’ 성을 이야기하지 못한다. 그것을 입에 담는 순간 우리 자신이 ‘치한’이나 ‘색골’ 쯤으로 여겨질까 두려운 것이다. 한경아 장편소설 <늘>을 읽다 보면 일반적인 사회 통념의 관점에서 당혹스러울 수도 있는 장면이 몇 번 나온다. 미성년자들의 섹스를 묘사한 장면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장면은 차라리 한 점의 잘 그려진 풍경화처럼 보인다. 마치 이외수가 <들개>에서 주인공과 애인 간의 성행위 장면을 하나의 시처럼 그려놓은 것처럼. ■그대, 부재를 위한 메모 한경아가 ‘문학’, 구체적으로는 ‘소설 쓰기’를 언제 왜 시작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문학을 하는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또한 그 첫 발자국이 그 작가의 작품의 품성이나, 행로를 강제하지는 못한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하루하루의 일상을 모두 고백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시는 은유와 비유, 상징과 수미상관 등의 방법으로 ‘은근슬쩍’ 시인의 마음을 숨기기도 하지만, 소설은 작가 자신의 심성과 내면을 고스란히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박상륭처럼 ‘일신우일신’을 떠오르게 하는 작가도 있지만. 한경아의 문학세계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이 세상을 껴안는 ‘첫 경험’과 첫날밤의 ‘경이로움’이 ‘늘’에는 잘 드러나 있다. 소설의 처음과 책장을 넘기면 보이는 작가의 착한 눈매와 결 고운 목소리로 외롭고 낮고 쓸쓸한 이들에게 쉬어갈 수 있는 그늘이 되어주기를 소망해 본다. 간절히. <유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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