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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인터뷰] 외길 인생 50년, 보령제약그룹 김승호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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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7호 ⁄ 2007.12.17 15:39:48

■회장님의 근황이 궁금합니다. 주로 스케줄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매일 아침 7시 30분에 출근해서 경영진과 함께 회의를 하며 일과를 시작합니다. 점심, 저녁에는 주로 손님들을 만나 식사를 하고, 하루 하루가 눈 코 뜰새 없이 바쁩니다. 최근에는 복지재단 설립 건으로 여러 가지를 검토하고 구상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생각해온 일을 실천에 옮기는 만큼 철저하게 준비해야죠. ■얼마 전 보령제약그룹이 창업 50주년을 맞았습니다. 반 세기라는 긴 시간 동안 한 그룹을 이끌어 오신 장본인으로서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종로 5가의 작은 약국이 반 세기를 거치며 중견 그룹으로 성장했으니 감회가 남다릅니다. 사업을 시작할 때 사실 이렇게 50년을 이어올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저 좋은 약을 만들어 아픈 사람을 낫게 하겠다’는 생각으로 열정을 갖고 일했을 뿐입니다. 저 혼자의 힘만으로는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겁니다. 저와 함께 해준 보령의 모든 임직원들, 그리고 음으로 양으로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 무엇보다 보령을 사랑해주신 국민 여러분들의 성원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약과의 인연은 어떻게 맺게 되셨는지요. 약은 저에게 필연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고향 보령에서 집안 형님이 하던 약방을 놀이터처럼 드나들며 접한 약은 신기함 그 자체였습니다. 볼품없고 조악한 약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런 약들이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니 경외감마저 들었습니다. 약국을 창업할 때, 제약업에 진출할 때에도 ‘좋은 약을 만들어 아픈 사람을 낫게 하겠다’는 어린 시절의 결심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국민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학교를 다니며 거처로 정한 곳이 집안 형님이 운영하던 약국(홍성약국)이었습니다. 수업이 끝나면 달려가서 틈틈이 일을 거들었습니다. 어린 시절 대창약방이 약에 대한 호기심을 일깨워 줬다면, 사춘기를 보낸 홍성약국은 내게 약에 대한 의미를 일깨워 준 곳이었습니다. ■보령약국으로 시작해 7개의 계열사를 가진 보령제약그룹이 되기까지, 지난 50년 동안의 경험을 간략하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1957년에 신혼집을 판 돈 3백만 환으로 보령약국을 창업해 5년 만에 전국최대의 소매약국으로 성장했습니다. 1963년에 부산에 있는 동영제약을 인수하며 제약업에 진출하게 됐지요. 당시 생약제제에 눈을 돌려 일본의 유명 제약사인 용각산(류카쿠산)사와 기술제휴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제대로 된 설비조차 없던 신생 제약사였기에 협상과정은 무척 힘들었지만, 끈질기게 설득해 결국에는 기술제휴를 이끌어냈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용각산은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며 보령제약이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이후 구심, 기응환 등의 생약제제가 잇달아 성공을 거두었고, 70년대 들어서는 겔포스가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보령제약의 역사를 얘기할 때 용각산과 겔포스가 빠지지 않는 이유가 보령의 오늘을 만든 대표적인 제품이기 때문입니다. 제약업계 후발주자로 출발해 성공을 거두었지만, 저는 제약업의 성공에만 안주하지 않고 현재의 보령메디앙스인 보령장업을 설립했습니다. 당시 제약회사가 다른 사업을 한다는 것을 회의적인 시선으로 보는 사람도 많았지만, 임상의과학적인 유아용품을 만든다는 점에서 우리의 역량을 활용할 수 있었고,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분야이기 때문에 과감하게 도전을 했습니다. 지금의 토탈 헬스케어 그룹의 시작이었던 셈이죠. 이후 보령바이오파마, ㈜보령, 보령수앤수, 킴즈컴, 비알네트콤 등 총 7개의 계열사를 갖춘 토탈 헬스케어 그룹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50년 동안 위기나 어려운 일은 없었습니까? 77년 경기도 안양공장 수해였습니다. 하루에 450㎜의 비가 쏟아져 새로 지은 공장이 완전 침수됐습니다. 주변에서는 ‘재기불능’, ‘완전복구하려면 최소한 1년은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거래처와 주변 사람들의 도움, 전 임직원의 합심으로 극복해 4개월 만에 공장이 가동되기 시작했고, 그 해 매출이 오히려 30%나 늘어났습니다. 그야말로 폐허에서 일군 기적이었습니다. ■회장님은 우리나라 제약산업 발전 과정을 쭉 지켜본 산 증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50년 전 우리나라의 제약산업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우리나라의 산업이 근대화되기 시작한 것이 40~50년 전의 일이니까, 당시는 제약업뿐 아니라 모든 산업이 어려웠습니다. 금융체계가 미비하니 자금조달도 힘들고, 기술수준도 고만고만하니 어깨너머로 배우려 해도 그럴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무언가 물건을 만들어 팔려면 원료를 들여오고, 그 원료를 가공할 설비가 필요하고, 그 설비를 설치할 공장이 필요한데, 이런 기초적인 기반을 갖추기가 어려웠습니다. 60년대 들어서며 박정희 정권의 산업화 정책으로 제약업체도 많이 생기면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인기 있는 제품이 활성 비타민 종류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제약사마다 신약개발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었던데 반해,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았습니다. 치밀한 준비 없이 신약개발에 뛰어들었다가 문닫은 제약사가 비일비재했습니다.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외국 제약사와의 기술제휴였고, 보령제약 역시 그랬습니다. 기술제휴로 탄생한 제품이 용각산과 겔포스였습니다. ■회장님께서 우리나라 제약산업 발전에 기여하신 점이 많으리라고 봅니다. 어떤 점을 들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제가 제약산업 발전에 기여를 했다면, 특별히 어떤 업적보다는 많은 후배 제약인들에게 제약인의 자세나 정신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합니다. 가진 것 없이 시작했지만 늘 최선을 다해 성실히 일했고, 작은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늘 도전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제약인은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일을 하기 때문에 남다른 사명감이 필요합니다. 항상 모두가 건강하게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 왔습니다. ■회장님께서는 자수성가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평범한 사람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기업의 CEO가 되기까지 자신만의 ‘가치관’ 또는 ‘원칙’이 있었을 거라 생각됩니다. 무엇입니까? 주변에서 ‘성공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곤 하는데, 그러면 저는 ‘성실, 신뢰’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뭔가 대단한 비결을 기대했던 사람은 김 빠진다는 듯한 반응입니다. 성실, 신뢰, 이런 덕목들은 누구나 알고 있는 평범한 진리이지만, 제대로 지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진리를 실천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우스갯소리로 ‘채소가게보다 약국이 문을 오래 열어야 하는 이유’를 이야기해죠. 당장 채소 못 먹어서 큰일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당장 필요한 약을 못 쓰는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보령약국 개업초기, 약을 찾다가 없으면 힘 빠진 모습으로 돌아서는 손님의 모습이 그렇게 가슴 아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없지만 내일까지 반드시 구해다 놓겠다’고 약속 하고는 자전거를 타고 서울시내를 다 돌아다녀 구하고야 말았습니다. 다음날 다시 찾아와 그 약을 받아가는 손님들의 환한 얼굴을 보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손님이 찾는 약을 공급하기 위해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그 근처에서 가장 일찍 문을 열고 가장 늦게 문 닫았습니다. 약을 팔아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라, 약을 찾는 고객을 헛걸음하게 하기 싫었기 때문죠. 그러한 노력이 고객의 신뢰로 이어졌고 ‘종로 행인 다섯 중 하나는 보령약국 손님’이라는 소리가 있을 정도로 약국은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장사가 아무리 잘 돼도 ‘없는 약이 없는 약국을 만든다’,‘좋은 약을 싸게 공급한다’는 저의 마음은 한결 같았습니다. 제약업에 진출한 이유도 좋은 약을 직접 만들어 아픈 사람을 낫게 하고 싶다는 소박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이 땅에 사는 누구라도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더불어 살 권리가 있습니다. ‘인류건강을 위한 공존공영’은 창업이념이자 제가 늘 가슴속에 새기고 있는 철학입니다. 이는 제가 제약업계에 진출한 계기였고, 지금까지도 늘 가슴에 품고 있는 생각입니다. 구멍가게를 하든 대기업을 경영하든 성공의 열쇠는 똑같습니다. 성실과 신뢰, 그리고 자기 업(業)에 대한 사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겔포스·용각산 등 스테디셀러 제약품을 굉장히 많이 만들어 내셨습니다. 제약품을 히트시킨 가장 큰 비결은 무엇입니까? 시대의 흐름을 잘 읽어야죠. 용각산의 예를 볼까요 당시 우리나라는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공해로 인한 질환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서양 약을 선호하는 분위기였지만, 가슴속 한편에는 생약제제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었습니다. 이 틈새를 공략한 것이 용각산이었죠. 겔포스 역시 당시 급속한 산업화로 시간을 쪼개 가며 일하던 시절이어서 불규칙한 식사와 과음 등으로 위장병 환자들이 많이 생겼는데, 바쁜 사람들이 일일이 약을 챙겨 먹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겔 타입의 강력한 위벽 보호효과에다 복용이 간편하게 소포장을 해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것이 성공요인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광고비도 파격적일 정도로 집행했는데, 공격적인 광고전략도 한 몫을 했죠. ■최근에는 어떤 약을 개발 중인지 귀띔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혈압 치료제 신약을 개발 중에 있습니다. 벌써 10년이 넘어 지금 막바지에 왔습니다. 전문적인 용어로 ARB 계열 치료제라 하는데, 현재 많이 사용되고 있는 CCB 치료제를 대체할 차세대 치료제라 할 수 있습니다. 기존제품에 비해 약효를 강화하고 부작용은 대폭 낮췄습니다. 현재 ARB 계열 치료제는 모두 외국 제품인데, 2009년쯤 저희가 시판하게 되면 국내로서는 첫 번째, 세계적으로는 여덟 번째이며, 시장 잠재력이 아주 높습니다. 제품이 시판하면 보령의 차세대 원동력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오늘날의 보령이 있기까지 가족들의 도움도 컸을 텐데요. 가족이야기도 좀 들려 주시죠. 우리 가족도 나만의 가족이 아니라 보령의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죠. 제가 딸이 넷인데, 첫째와 막내가 보령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첫째딸은 지금 그룹의 부회장을 맡고 있고, 막내딸은 보령메디앙스의 부사장을 맡고 있습니다. 아내가 떠난 지 1년이 조금 넘었는데, 아내를 빼놓고는 보령제약의 역사를 얘기할 수가 없어요. 결혼한 다음해 제가 사업을 하겠다며 사업자금을 마련하려고 신혼집을 팔았는데, 아내는 한마디 불평도 없이 저를 믿고 응원해 줬습니다. 사업을 시작하고는 갓 낳은 어린 딸을 업고서 하루 종일 약국 일을 돕고, 밤이 늦어서야 빈 그릇들을 머리에 이고 혼자 집으로 돌아가기를 몇 해를 했죠. 사업은 계속 성공했지만, 그럴 때마다 계속 사업을 확장한답시고 일을 벌이니, 뒷바라지 하느라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그래도 불평 한마디 없이 늘 제 결정에 확신을 심어 주었습니다. 사업초기에는 변변한 공장이 없어 연지동 집 마당에 기계를 들여놓고 약을 만들었는데, 당시 큰딸이 여섯 살, 둘째가 갓난아이였어요. 그래도 싫은 내색 한번 없이 뒷바라지하느라 종업원 몇 사람 몫을 했습니다. 당시 기계 돌아가는 것을 구경하며 종업원 아저씨들과 어울리던 여섯 살배기 꼬마가 지금 부회장을 맡고 있으니, 부회장에게는 보령제약이 삶의 한 부분이었죠. ■김은선 보령제약그룹 부회장에게 어떤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까? 김은선 부회장은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 좀 더 새로운 생각을 많이 해요. 지금 그룹 전체적으로 혁신과 인재교육에 열정을 갖고 많은 일을 하고 있어요. 전사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여러 가지 혁신활동들, 이를테면 보령제약그룹의 중장기 혁신계획인 inno-BR이나 생산성의 질적 혁신을 위한 TPS, 낭비와 헛일 제거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Work Out 작업 등이 대표적입니다. 또한 미래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에도 과감한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팀장 리더십 스쿨, Executive MBA 과정 등 직급별·직무별로 다양한 교육의 혜택을 제공해 인적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실행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50년을 넘어 100년 기업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열정적으로 하는 모습을 보면 많은 기대가 됩니다.

■최근 회장님의 ‘1% 양보론’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만… 1% 양보론이라는 게 사실 별게 아니에요. 우리가 누굴 돕는다고 하면 대단히 어렵고 거창한 일로 생각을 하죠. 자신이 1%를 양보하면 99%가 남을 것 같은데, 내 양보한 그 1%가 오히려 100%를 차고 넘쳐 110%, 120%가 되어 결국 자기한테 다시 돌아오거든요. 일주일에 한 시간, 한 달에 만 원, 마음만 있다면 할 수 있는 1%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1%씩 양보한다면 모두가 건강하게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사회기여 활동에 적극적이신 것 같습니다. 복지재단을 설립한다고 하셨는데, 회장님의 사회복지 구상이 궁금합니다. 약국을 창업할 때, 제약업에 진출할 때에도 ‘좋은 약을 만들어 아픈 사람을 낫게 하겠다’는 어린 시절의 결심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약업에 종사하다 보니 아픈 사람들도 많이 보고, 어려운 사람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건강하게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데 미력이나마 힘이 된다면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 일을 좀 더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 복지재단을 설립하려고 합니다. 12월 말에 재단을 출범시키려 했는데, 여러 가지 준비로 일정이 조금 지체되는군요. 사회봉사를 목적으로 하는 재단을 설립할 예정이고, 우선 사재 50억여 원을 출연하려 합니다. 이 재단은 △건강 케어 △영유아 케어 △노인 케어 등 3개 분야를 핵심사업으로 운영할 예정인데, 그 중에서도 노인복지사업에 좀 더 힘을 쏟을 생각입니다. 고령화 사회로 변모함에 따라 극빈층 및 무의탁 독거노인들이 꾸준히 증가하는 사회적 변화에 맞춰, 이들에 대한 기본적인 생활지원뿐 아니라 건강관리 등의 사회적 지원 인프라 구축에 더욱 주력할 것입니다. 사회복지재단의 특성상 공익성을 살리면서도 향후 재단의 안정적인 재원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도 적극 검토하고 있는데, 2008년 7월부터 노인수발 비용을 지원해 주는 노인수발 보험제도가 시행되는 시점에 맞춰, 노인수발 사업을 펼치는 별도의 법인을 설립하는 등의 방법도 검토, 구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업으로 얻은 수익이 배당 등의 형태로 지분을 보유한 사회복지재단으로 흘러들어가 다시 사회공헌 활동에 쓰이도록 하겠다는 구상입니다. 한마디로 사회복지재단이 사회공헌 활동을 펼쳐나감에 있어 필요한 재원을 끊임없이 스스로 재창출해 냄으로써 계속해서 물이 샘솟는 우물과 같은 역할을 하도록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최근 <끝은 생각하지도 마>라는 자전적 경영 에세이를 내놓으셨는데요, 이에 대한 소개를 좀 해주시죠. 지금 누군가는 새로운 시작을 눈앞에 두고 있을 것입니다. 또한, 무엇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한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사람이라도 하루하루 새로운 출발을 꿈꾸고 있을 것입니다. 크게 내세울 것 없는 인생이었다 하더라도, 저는 그들에게 지난 경험과 꿈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50년이 흐르는 동안 제 인생은 늘 새로운 시작의 연속이었습니다. 저의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는 사람들이 더욱 큰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책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선배로서 그들에게 끝은 생각하지도 말고 시작만을 꿈꾸라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김원섭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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