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중국 고대의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하자마자 영원한 제국을 꿈꾸며 70여만 명을 동원해 진시황릉을 만들었다. 아직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진시황릉의 내부에는 수은으로 이루어진 강과 바다가 조성돼 있으며 천지를 형상화한 지하궁전이 있다고 알려졌다. 능의 외부에는 대규모의 병마용갱이 주변을 옹위해, 사후세계에서도 생전의 아방궁보다 화려한 권력을 누리려던 진시황의 권력욕이 엿보인다. 우리나라 전임 대통령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나라에서는 전임 대통령의 품위 유지와 기념사업 보장을 위해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 등의 법제적 장치를 확보해 놓고 있다. 퇴임 이후의 기념관 건립이나 사저확장 사업을 하는 데 국가에서 일부 지원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사치스럽게 증개축되는 전임 대통령들의 사저는 정권 말기마다 구설수에 오르고 있으며, 전임 대통령의 정치적 업적과 역정을 기록하고 보존한다는 명분으로 조성되는 기념관은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전임 대통령들의 ‘퇴임 후 청와대’ 우리나라 전임 대통령들이 퇴임 후 머무는 집을 보면, 열에서 여덟 아홉은 으리으리한 저택이다. ‘구중궁궐’에 살던 습관과 아쉬움을 버리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영화를 지속하려 함인지 대형 저택을 짓거나 살던 집을 으리으리하게 증개축해서 입주해 살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때 여권에서는 노 전 대통령이 “임대주택도 고려하고 있다”는 말이 흘러나올 정도로 퇴임 후 검소한 생활을 할 것으로 예상하기도 했으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 후의 귀향을 대비하여 김해 진영읍 봉하마을에 있는 자신의 생가 옆에 4,290㎡ 규모의 부지를 매입해 사저를 크게 지었다. 부지 규모는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크다. 봉하마을의 사저는 각각 방 세 개와 거실, 서재, 회의실, 통신실, 경호원 대기실, 접견실 등을 갖춘 지상 2층 건물 3채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은 외벽 두께가 일반 건물의 2배 가량 되는 50㎝의 외벽에다 두께 2㎝ 이상의 방탄 유리로 이루어져 있고, 경호원 숙소인 경호동도 사저에서 30m 떨어진 곳에 건축되는 등 호화 경호시설을 갖추고 있다. 주변에는 화재를 막기 위해 내화성 조경목을 심는 등 안전을 고려한 조경 숲도 조성해 놓았다. 봉하마을의 ‘노무현 타운’과 사저의 개·보수에는 행정자치부로부터 지원받은 특별교부세 40억 원과 국비 100억 원, 도비 20억 원, 시비 135억 원 등 255억 원의 국민 혈세가 투입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임기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자 퇴임 후 살게 될 집을 대대적으로 증축하면서 주위의 빈축을 샀다. 전 전 대통령은 법원 재판 과정에서 재산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는 판사의 질문에 전재산이 29만 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으나, 퇴임 후 서울 마포구 연희동에 위치한 자신의 집을 개축하는 데만 수 억 원을 들이기도 했다. 그의 집은 818.9㎡의 부지에 세워져, 역대 대통령의 사저 중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다음으로 큰 부지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임기가 끝나면 옛날 모습 그대로의 상도동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도 대대적인 사저 신축공사를 벌여 치열한 비난여론에 휩싸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문민정부가 끝나 가는 무렵에 살던 집을 허물고 377㎡ 규모의 부지에다 대규모 사저를 지었다. IMF의 국난을 맞아 전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상황에서, IMF 대통령으로 불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치스러운 사저 신축은 정치권 뿐만 아니라 온 국민의 비난을 샀다. 정권 말기를 뜨겁게 달구는 사저 신축은 김대중 전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2002년부터 사저 신축공사를 시작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도동 옛 집과 더불어 민주화 투쟁의 상징으로 각인된 동교동 옛 집터에 세워진 김 전 대통령의 사저는 연면적 654.55㎡의 단독주택이다. 당시 사저 신축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자 청와대는 “지은 지 너무 오래돼 붕괴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미미한 정치적 영향력으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지는 못했으나, 노태우 전 대통령도 정권 말기에 서울 연희동에 437.4㎡의 부지를 매입해 저택을 지었다. ■막후정치의 상징, DJ의 ‘아태재단’ 전임 대통령이 퇴임 이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거점으로 조성된다고 알려진 기념관은 민간단체에서 건립비용을 전액 부담하거나, 민간과 정부가 예산을 함께 부담하는 `’매칭펀드’형식으로 비용을 마련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 제5조 2항에서 ‘전직 대통령을 위한 기념사업을 민간단체 등이 추진하는 경우에는 관계법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필요한 지원을 할 수 있다’고 한 규정에 따라 일정 부분의 정부 지원을 용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기념관이라고 할 수 있는 ‘김대중 도서관’은 정부 예산이 처음으로 투입된 최초의 국립 대통령 기념관이다. 김대중 도서관의 역사는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재단)의 설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 전 대통령은 94년 한반도의 통일과 아시아의 민주화 및 세계 평화 이론을 연구하겠다는 취지에서 아태재단을 설립한다. 그러나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아태재단은 실상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사조직으로 유용됐다. 아태재단은 김 전 대통령이 세운 정당인 국민회의의 창당기반을 마련했으며, 이후에도 정치자금의 조달창구로 이용됐다. 이는 재단 설립 이후 꼬리를 물고 쏟아진 비리들이 증언하고 있다. 재단은 설립 이후 2001년까지 후원금만 233억 원을 긁어 모았는데, 이는 정치헌금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공천 지원자들과 정·재계 인사들이 김 전 대통령에게 ‘잘 보이기 위해’ 상납한 돈이다. 이 과정에서 재단 관계자들이 수뢰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측근 이수동 씨가 이용호 씨에게 5000만 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이른바 이용호 게이트 사건에 이어, 아들 김홍업 씨로 비리사실이 드러나 구속되기도 했다. 아태재단은 김 전 대통령의 자택 옆에 90억 원의 거액을 들여 건물을 짓고, 그 안에 김 전 대통령의 집무실을 마련했다. 청와대의 지시로 건축기간 동안 전의경을 동원해 공사장 주변을 겹겹이 둘러싸는 등, 아태재단 건물의 신축은 철통경비 속에 진행됐다. 워낙에 경비가 삼엄해서, 세간에는 신축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저 지하에 아태재단 건물로 이어지는 비밀통로가 있다는 둥, 수억의 비자금을 숨겨 놓은 비밀 금고가 있다는 둥 갖가지 소문이 무성하기도 했다.
■국민 시선 따가운 전임 대통령 기념관 김용호 게이트 등 비리가 연이어 불거지면서 아태재단이 여론의 뭇매를 맞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재단을 연세대에 기증하기로 결단한다. 2003년 1월 아태재단 건물이 연세대에 기증된 이후로, 1만6000여 종의 장서와 각종 사료들을 보유한 이 건물은 학교 내에서 대통령학 연구소 겸 사료관으로 이용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연세대 측은 이 건물을 기증한 김 전 대통령을 예우하는 차원에서 건물 이름을 ‘김대중 도서관’으로 개칭해 사용할 것을 제안했고, 사실상 김 전 대통령의 새 집무실로 사용돼 왔다. 김대중 도서관에는 산하에 김대중평화연구소와 통일연구소 등 각종 연구센터가 입주해 있어 일반 학술기관으로 비쳐질 수도 있지만, 김 전 대통령이 받은 노벨 평화상을 비롯해 그가 군사정권 당시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기록한 서신 등 김대중 전 대통령의 개인 소장품이 전시돼 있어 개인 기념관 성격이 강하다. 또한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인 광주광역시에는 김 전 대통령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세워진 김대중컨벤션센터가 위치해 있다. 2005년 9월 6일에 개관한 김대중컨벤션센터는 주로 국내외 주요 회의와 전시회를 여는 등의 기능을 겸하고 있으나, 내부에 김 전 대통령의 사진과 정치적 역정이 벽에 기록된 전시관도 있어, 사실상 김 전 대통령의 기념관 역할을 하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우에는 2006년이 저물 무렵 명지대에 금융실명제와 같은 그의 주요 업적과 군부정권의 종식, 문민정부 수립 등 김영삼의 정치 역정을 기념하는 ‘YS 기념관’을 지으려 시도 했으나 무산되기도 했다. 결국, 김영삼 전 대통령의 기념관은 그의 고향인 경남 거제시에 2009년 완공을 목표로 세워지기로 결정됐다. 거제시는 기념관 건립을 위해 2002년에 이미 부지를 사 놓고 2005년에 완공할 계획이었으나, 김 전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평가가 마무리되지 않은 시점에서 기념관 건립은 물의를 일으킬 수 있다는 판단 아래 건립을 보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이 된 전임 대통령 중에서는 제주도 서귀포의 파라다이스호텔이 2000년 11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별장이 있던 호텔 부지에 50평 규모의 `’이승만 기념관’을 개관, 그가 국무회의를 주재할 때 사용한 의사봉 등 유품 3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송덕비 같은 기념관이 아쉽다 ‘일해재단’(현 세종연구소)을 설립하여 퇴임 후 ‘상왕’을 꿈꾸다 수포로 돌아간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우에는 그의 고향인 경남 합천군에서 ‘새천년 생명의 숲’ 가꾸기 사업으로 합천읍에 조성한 공원의 명칭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호를 따 ‘일해공원’으로 정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합천군에서는 국내외적으로 대통령이나 수상 자리에 올라 고장을 빛낸 인물을 기념하는 사업이 성행하는 예를 들며, 군민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공원 홍보 효과를 높이는 차원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호인 ‘일해’를 공원 이름으로 사용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하고 그들이 말하는 소위 ‘5.18 광주 사태’를 일으켜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시민단체와 네티즌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쳤다. 일해공원 명칭을 반대하는 지역 주민들은 심의조 합천 군수가 출마 당시 전두환 기념관을 설립하겠다고 공약한 일을 상기하며 기념관 설립까지 추진할 것으로 보고 반대운동을 준비하는 분위기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 기념사업회가 매칭펀드 형식으로 국고보조금 208억 원을 지급받아 기념관이 설립되는가 했지만, 사업회 측에서 약속한 비용의 모금이 부진하자 2005년부터 보조금 회수에 나서 정부와 사업회 간에 마찰을 빚었다. 그 후 기념사업회가 제기한 소송에서 재판부가 기념사업회의 주장을 수용함으로써, 박정희 기념관 건립사업의 꺼져가던 불씨를 살리기는 했으나, 현재까지도 지지부진한 상태다. ‘노무현 기념관’의 건립도 시도된 적이 있으나,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2007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인제대 관계자들이 청와대에서 회동하여 노무현 기념관의 건립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인제대가 김해에 노무현 기념관을 건립하고 싶다는 의사를 청와대에 전달하면서 노 대통령과 인제대 백낙환 이사장, 이경호 총장 등의 만남이 성사됐다는 것이 당시 청와대의 설명이다. 그러나 현직 대통령의 재임 중 기념관 건립은 부적절하다는 국민여론에 부딪치면서 자연히 무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