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가는 길 차창 밖으로 사과밭이 지나 간다. 빨갛게 잘 익은 사과들이 덩그렁덩그렁 매달려 마치 종소리를 내는 것 같다. 올해는 사과도 벼처럼 풍년인가 보다. 내 가난한 유년에는 사과 향기로 잠 못 들기도 했다. 마루 시렁 위 석작(대나무로 만든 함) 속에 넣어둔 사과 몇 알의 향기가 그토록 유혹적으로 달콤했을까. 부모님 숨소리 들어가며 남동생 말 세워 등에 올라타 몰래 꺼낸 사과 두 알. 아뿔사 데구르르~~~ 한 알이 토방으로 구르면서 콩알 만 해진 내 심장도 같이 따라 굴렀다. 사과를 못 먹는 상심은 간데없고 도둑질 들킨 부끄러움 탓 이었다. "게 누구냐...” 아버지의 설 잠깬 나직한 목소리를 타고 사과는 토방에서 두어 바퀴 구르다가 어둠 속 어디선가 멎었다. “전데요....쥐새끼가... “ 난데없이 쥐새끼를 핑계 세웠다. “어여 자거라 낼은 읍네서 쥐 덫 좀 사와야 것다 ” “네 아버지 ” 남동생은 엉금엉금 토방 구석에서 사과 한 알을 찾는데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물론 또 한 알은 행여 놓칠세라 손에 땀이나게 꼬옥 쥐어져 있다. 소매 끝으로 윤기 반지르 하게 닦은 사과는 먹기 아깝게 고운 때깔이다. 또 그 향기는 어떤가. 나는 요즘 사과가 아무리 맛이 좋아지고 씨알이 굵어졌다고 하나 못 가진 하나를 알고 있다. 그것은 사과 고유의 향기라는 것이다. 그 시절 그 표현 할 수 없는 사과 향을 단 한 번도 다시 맡아 보지 못하였다. 작은 방 언니 오빠까지 나누어야 하는데 우리 둘만 먹을까? 동생은 그러자고 고개 끄덕 인다. 동생과 나는 혹여 누가 들어와 들킬세라 이불을 담 쑥 뒤집어쓰고 사과를 먹었다. 마치 큰 쥐 두 마리가 사과를 먹으면서 내는 소리 같이 씹히는 소리가 아삭아삭 거렸다. 다음날 아침 사과 두 알이 없어진 것을 아신 어머니는 어젯밤에 쥐란 놈이 사과 두 알을 통째로 먹고 갔다고 하시면서 넌지시 나와 동생을 바라보셨다. 내일이 할아버지 제사라서 씨알 좋은 몇 알을 사두었는데... 하셨다. 나와 남동생은 아침 밥맛이 없다고 서둘러 일찍 학교를 갔다. 사과만 보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흐르면서 떠오르는 그 시절 이야기이다. 지금은 가정마다 무 농약 사과를 박스로 사서 놓고도 제대로 먹지 않는 풍요로운 시절이다. 먹지 않은 사과가 오래 되어서 제 빛깔을 잃어 갈 때면 나는 그날의 추억을 떠올리며 사과 한 알을 코에 대어 냄새를 맡아 보기도 하고 소매 끝으로 문질러 윤기도 내어 본다. 힘껏 사과를 두 손으로 쪼개어 보기도 한다. 어쩐지 그래야 사과의 제 맛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글·이수인 (작가·시낭송가) <유년의 기억>이란 주제로 격주연재 수필을 담을 이수인 시인은 서울예대에서 극작을 전공하고, MBC·KBS 드라마 과정을 수료하였다. <시문학>을 통해 등단한 뒤, CBS TV에서 시낭송을 진행했다. 저서로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