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발 부시 대통령의 “북한 테러지원국 해제” 결정과 평양발 김정일 위원장의 “남북관계 전면차단 중대결단” 성명이 이명박 정부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쇠고기 협상”에서부터 “한미 FTA”에 이르기까지 모든 한미 현안에 대해 한미동맹을 강조해 온 이명박 정부의 입장에서는, 사전에 충분한 협의와 통보 없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북한 테러지원국 해제조치”에 대해 일본의 아소 총리와 함께 애써 의미를 부여하려 부심하고 있다. ■ ‘북한 테러지원국 해제’와 ‘남북관계 전면중단 위협’의 상충된 성격 북한은 6자회담을 통해 이루어진 북핵불능화 조치의 이행을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왔으며, 최근에는 영변의 핵냉각탑을 국제사회가 보는 가운데 폭파시키는 국제 이벤트까지 감행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은 미국의 테러지원국 해제결정이 미루어지자, 북핵불능화 중단조치를 결행하고 원상복귀를 위한 강도 높은 조치를 결행하였다. 이 와중에서 부시 대통령의 전격적인 해제결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북한이 받고 있는 경제제재 중에서 한국전쟁 이후 적용되어 온 무기수출통제법·수출관리법·국제금융기관법·대외원조법 등 다수의 법이 여전히 존재하고, 북한의 인권침해와 관련한 각종 제재도 유효한 상황이어서, 테러지원국 해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북한은 부시 행정부의 대북 적대시정책의 유지 여부를 판단하는 결정적 준거로 테러지원국 해제결정을 언급해 왔다는 점에서, 임기 말에 이루어진 이 조치에 대한 북한의 의미부여는 특별하다. 뿐만 아니라, 대북 강경정책을 고수했던 부시 행정부조차 테러지원국 해제를 중심으로 북핵불능화를 위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적극 참여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차기 대선에서 오바마의 집권이 유력한 최근의 흐름이 이러한 추세를 더욱 강화시킬 것이라는 점에서, 전반적인 대북정책의 조정이 불가피한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런 와중에 발표된 노동신문 논평원의 성명은 그 어떤 성명보다 강도 높게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면서 “개성공단의 중단을 포함해 대남 강경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이명박 정부의 딜레마를 가중시키고 있다. 특히, 이 성명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김정일 정권의 분명한 입장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어 그 파장이 주목된다. 이 성명은 우선, 10월 2일 남북 군사실무회담에서 북측이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과 북한체제와 관련된 남측의 삐라 살포가 계속될 경우 개성공단사업의 중단을 포함한 중대한 사태발생 가능성을 경고했던 사례”를 재론하면서, “남북관계의 전면 차단을 포함한 중대결단의 가능성”을 언급하였다. 이 논평은 추가적으로,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이상설이 본격 제기된 이후 남쪽에서 거론되고 있는 “북한 급변사태 대비계획” “작전계획 5029” “각종 한미 합동군사연습” 등을 거론하면서 “우리의 최고존엄을 감히 건드리는 것은 우리 체제에 대한 정면도전이고 선전포고”라며 “대결에는 대결로, 전쟁에는 전쟁으로 단호히 맞받아 나갈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문제의 심각성은, 북한 노동신문 논평원의 글이 의례적인 대남비방이 아니라, 최근 북한 군당국이 주도한 일련의 “강도 높은 군사적 보복위협”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최근 북한은 군당국을 통해 지속적으로 대남 군사보복 가능성을 언급해 왔다. 지난 3월 28일에는 북한 해군사령부 대변인이 “서해 북방한계선 수역의 남북간 군사적 충돌 가능성을 경고”하였고, 5월 8일에는 조선중앙통신 군사논평원의 글을 통해 “군사적 긴장이 격화되면 충돌은 일어나게 되고, 그것은 다시 제3의 서해교전, 제2의 6.25전쟁으로 번지게 될 것” 이라는 초강경 협박에 이르게 되었다. ■ 이명박 정부의 이중적 잣대 특히 이번 사태의 중대성은, 김정일 건강악화설을 계기로 이명박 정부의 고위관계자들조차 경쟁적으로 김정일 유고 가능성과 북한 급변사태 대책 등의 자극적 발언을 반복하는 상황에서, 남쪽의 보수단체가 북한을 향해 대규모 풍선 삐라를 보내는 행동에 대한 북측의 강력한 경고라는 점이다. 아직도 정부는 민간단체의 대북 삐라 발송에 대해 자제를 요청하지만, 법적으로 강제할 방법이 없다며 이를 방관하는 입장을 보이면서, 금강산사건 해결 등을 포함한 남북대화를 주장하고 있으나, 이러한 이명박 정부의 입장을 북한이 수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오히려 북한은 가까운 장래에 금강산 관광사업 중단에 이어 개성관광 및 개성공단사업 전반에 대한 일시중단 조처를 포함해 북한 해군의 엄포처럼 제2의 서해교전과 같은 군사적 충돌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서해상의 군사적 충돌은 남북한과 북미간에 군사적 쟁점으로 부각된 북방한계선(NLL) 문제와 남북정상간에 합의했으나 이명박 정부에 들어서는 휴지조각이 된 서해평화협력지대의 필요성을 이슈화하는데 중요한 수단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가뜩이나 미국발 금융위기로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남북간의 군사적 긴장고조까지 겹쳐 국제신인도 하락 등 걷잡을 수 없는 경제적 부담으로 작용될 위험이 높다. 또, 이러한 이명박 정부의 딜레마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북한의 입장에서는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이명박 정부에 주기 위한 다양한 정치군사적 압박 카드를 단계적으로 고심하고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중차대한 상황을 이명박 대통령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해묵은 북한정권의 단순 협박으로 치부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적당히 남북대화를 제기하면 특별한 군사행동은 취하지 않을 것으로 낙관하는 것은 아닌지, 냉정히 판단해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만약 이명박 대통령이, 북한의 김정일 체제는 문제가 있고, 습관적인 협박을 쉽게 수용하면 버릇이 나빠져 애써 무시하거나, 아니면 “이에는 이, 칼에는 칼” 식으로 강경 맞대응하는 방향으로 정책적 선택을 한다면 한반도는 걷잡을 수 없는 위기상태로 치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을 ‘악의 축’ 국가라며 정권교체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초강경 압박을 취했던 초강대국 미국의 부시 대통령조차 집권 2기에 걸치는 10년 동안 그 어떤 항복도 받지 못하고 결국 북미 직접대화를 통한 정치외교적 해법모색에 앞장서고 있는 현실 아니던가? 이러한 다양한 경험과 현실을 감안해서 이명박 정부의 정책적 선택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아소 일본 총리 “납북 일본인 송환에 전력 다하겠다” 최근 부시 행정부의 전격적인 대북 테러지원국 해제조치에 가장 당황하며 혼란스러워하는 인물은 일본의 아소 총리일 것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보수주의자로서 “납북 일본인 송환문제를 6자회담은 물론 북일관계 개선의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으로 설정하고, 한반도의 평화 프로세스에 가장 소극적 인물”이었던 아소 총리 입장에서는, 그리고 일본정부와 최소한의 협의도 없이 미국이 일방적으로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한 조치가 미일동맹을 최고의 외교적 가치로 삼아온 일본정부 입장에서는, 향후 대북정책 및 대동북아정책에 큰 혼란을 가져다주고 있다. 물론, 테러지원국 해제조치 이후에도 아소 총리는 납치된 일본인들이 모두 본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전력을 다하겠다는 입장을 강하게 피력했다.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 가운데 5명이 본국으로 송환된 지 6년째를 맞이하던 날 아소 총리는 “납북문제 미해결 상태에서 북일관계 정상화는 없다”고 강조하고, “이미 30년이 흘렀지만 이는 시간과의 전쟁이다”면서 납치문제 해결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내 납북자 가족들은 미국의 테러지원국 해제조치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추가적인 대북 수입금지 조치를 비롯하여 독자적인 대북 제재조치 연장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 국내 반발여론에 대해 아소 총리는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국내 보수세력의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어 새로운 정책의 선택에서도 한계를 지니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아소 총리의 일본이 처한 곤혹스러운 사정은 일본내 보수언론이 제기한 “북한 중대발표설”과 관련된 확인되지 않는 설의 유포이다. 10월 18일 일본의 요미우리 신문은 “북한이 해외주재 외교관들에게 중대발표를 앞두고 대기명령을 내렸다”면서 “중대발표는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도한 바 있다. 이처럼 김정일과 관련한 미확인 첩보수준의 설을 충분한 사실확인 없이 심각한 의혹으로 증폭시키는 것도 현재 일본의 보수진영이 처한 복잡한 심리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국내도 마찬가지여서, 국내의 한 인터넷 보수언론은 최근 김정일 사망과 관련한 보도를 내고 사과성명을 내는 해프닝이 발생하였다. 이런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아소 총리의 선택 역시 이명박 대통령과 매우 흡사한 상황에 놓여 있다. 일본 내의 보수정서를 감안할 때는 지속적으로 대북 강경책을 전개하면서 한국과 독도 영유권 논란을 제기하는 것이 바람직스럽지만, 향후 미국의 새 정부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통해 국제사회와의 협력 시스템을 강화해 나갈 때는 미국의 협력을 마냥 무시하거나 거부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미국의 새 정부와 미일동맹을 강화시켜 동북아정책에서 협력적 태도를 유지할 때는 북일관계 정상화는 물론이고 일본의 납북자 문제나 독도 영유권 논란 등에서 강경한 대외정책을 추진하기 어렵고, 이렇게 될 경우 일본 내 보수세력의 반발이 예상되어 사면초가에 빠질 위험이 높다. ■ 이명박 정부의 딜레마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은 어떠해야 하는가? 더 이상 부시 행정부가 집권 초·중반에 허비한 6년의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말고, 또 자신의 집권을 절대적으로 지지한 남한 내 수구냉전세력의 반북대결논리에 입각한 유혹에 빠지지 말고, 북한의 김정일 정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 경제와 한반도의 평화정착을 위한 대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핵심에 비현실적인 ‘비핵개방 3000’ 구상을 공식적으로 폐기하고, 남북정상이 온 겨레 앞에 합의하고 국제사회가 만장일치로 지지한 6.15 공동선언과 10.4 남북정상선언의 실천을 위한 대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 길이 이명박 정부를 위해서, 그리고 대한민국의 국민과 국익을 위해서도 의미있는 유일한 선택이 될 것이다. 글·최 성(한반도평화경제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