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급등·주식하락 등 글로벌 금융위기로 시작된 경제불황이 한국경제를 뒤덮고 있다. 수십여 년 동안 모아놓은 자금을 증시와 펀드애 투자하여 5~6개월 사이에 원금이 대부분 반토막 났고, 펀드는 최대 70~80%까지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증시 사정은 더 심각하다. 코스피지수가 지난주(10월 27~31일)에 1000선 아래로 추락해 껌값보다 못한 주식까지 등장했다. 여기에 원·달러 환율은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어, 수입업체들의 마음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고 있다. 이 때문에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이후 가장(家長)들이 또다시 기로에 서 있다. 경제불황에 언제 구조조정에서 밀려날지 모르고, 그나마 모아놓은 자금은 허공에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금융위기가 아직까지 실물경제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어려움을 체감하고 있는 가장들은 안팍으로 겪는 고통을 호소한다. 그들의 애환과 목소리를 들어봤다.
30여 년째 경기도 화성에서 플라스틱 제조업체를 운영해온 A 사장. 아내, 유학 간 아들, 그리고 대학생 딸 한 명을 두고 있는 그는 132m²(40평)의 공장에서 직원들 3명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그의 공장에서는 생명줄과 다름없는 5대의 사출기가 언제나처럼 쿵쿵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A 사장의 속내는 그리 편하지 않다.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면서 수입대금이 30% 이상 올랐고, 양도성예금증서(CD)의 금리가 급등해 은행에서 빌린 대출이자가 치솟아 이자를 갚고 나면 설비투자는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특히, 그 동안 기름밥 먹어 가며 벌어 놓은 자금이 대부분 증시하락으로 반토막이 났고,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여 유학 간 자식들에게 변변한 용돈도 제대로 넣어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97년 IMF 때도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았는데, 요즘 집에 들어가면 아내와 자식들 볼 면목이 없다”고 A 사장은 토로한다. 그는 “그간 연 매출이 평균 5억 원대였는데, 올해는 물가 상승에다 납품이 줄어 40% 가까이 줄어들 것 같다”며 “더구나 은행 이자가 오르고 개인자금이 반토막 나면서 추가 투자는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집안에서 크고 작은 싸움도 잦아지고 있다. 그는 “내 새끼 공부만큼은 편안하게 해주고 싶은 게 부모들 마음인데, 용돈이 턱없이 모자라 아들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며 “20대 장성한 아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게 뭐가 어떠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30년 넘게 기름밥 먹어 가며 고생해 온 일들이 자식 공부도 제대로 못 가르치는 현실인 거 같아서 가슴이 아프다”고 호소했다. ■ 대출금리 상승, 주식 반토막… 먹고살기도 빠듯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제부터다. 경기불황에 납품 축소, 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매출이 준데다, 그 동안 모아놓은 자금이 절반 이상 손해가 나면서, 생계를 걱정해야 할 절박한 상황에 놓였기 때문. 중소기업은 대기업과 달리 개인자금이 사업자금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이 자금이 직원들의 월급과 사업비용 그리고 자녀들 학자금·생활비 등으로 사용되는 셈이다. 그러나 자금이 부족하면 융통할 방법은 대출뿐이다. 즉, 개인자금 부족분은 은행에서 끌어 써야 하는 구조다. 하지만, 제1금융권에서 대출받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고, 제2금융권은 이자율이 연 30%를 넘는 게 기본이다. 결국, 매출이 줄면서 대출을 받아 이자 갚기도 힘겨운 마당에, 그간 모은 자금이 줄면서, 직원들 월급은커녕 생계비조차 어려운 처지에 내몰린다. A 사장은 “대부분의 중소 제조업체 사장의 처지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면서 “회사에서는 사장, 가정에서는 가장 노릇이 요즘처럼 힘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허탈해하며 한동안 끊었던 담배를 다시 물었다. 가장들, “아내·자식들에게 면목없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다른 푸념도 들린다. “A 사장의 하소연은 차라리 배부른 소리로 들려요!” 주변에서 제법 안전한 회사에 다닌다는 소리를 듣는 B 과장은 요즘 들어 집에 들어가는 게 무서울 정도다. 한때 주식 투자로 쏠쏠한 재미를 본 B 과장은 그 쏠쏠했던 재미가 이토록 큰 아픔으로 번지게 될줄 꿈도 꾸지 못했다. 5000여만 원의 연봉을 받는 그는 직장 동료가 주식으로 돈 좀 벌었다며 어깨를 펴는 모습을 보고 호기심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외환위기와 카드 대란을 겪고 난 후 국내 주식시장은 한동안 급격한 증가세를 보였기 때문. B 과장은 “직장인들은 너도 나도 여유자금으로 주식에 손을 대며 비자금을 만들었고, 일부는 계까지 만들어 저녁마다 술자리를 마련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B 과장도 동료의 말을 조언 삼아 여유자금을 투자하기 시작했는데, 한 번에 주가가 3~4배까지 껑충 뛰면서 본격적인 투자를 시작했다고 전했다. 사실상, 2~3년 간은 크게 벌지도 잃지도 않은 상황이 지속됐는데, 지난 2007년 코스피지수가 사상 처음으로 2000을 돌파하면서 혼란에 빠졌다. 당시, 각종 언론매체와 정보지들은 ‘2007년 말까지 코스피지수가 3000을 돌파한다’ ‘2000 미만으로는 떨어질 확률이 거의 없다’는 일명 ‘카더라’ 정보가 봇물을 이뤘다. 이러한 정보를 알아본 B 과장은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적금을 해약하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금을 끌여들어 주식과 펀드에 집중 투자했다. B 과장은 “정말 기억하기 싫지만, 그때 투자한 금액이 3억 원은 웃돈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현재 남은 금액은 2000만 원도 채 안 된다”고 토로했다. 그는 “아이는 점점 크고, 생활비는 점점 늘어나는데, 한순간에 수억 원을 공중에 날려버려 도저히 아내와 아이들 볼 면목이 없다”며 “당시 아내 말만 들었어도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호소했다. 그는 또 “그 동안 아내와 맞벌이해서 힘들게 모아 왔는데, 다시 또 모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고 울먹였다. 아울러, 사업을 하고 있는 A 사장에 대해서는 “물론 (A 사장도) 형편이 많이 안 좋겠지만, 그래도 자식을 유학 보낼 수 있는 여건에다, 팔 수 있는 땅과 기계가 있어 차라리 부러운 심정”이라며 “현실에 맞든 그렇지 않든 내 입장에서는 그 분의 말은 그저 배부른 소리로 들린다”고 덧붙였다. ■올라갈 건 아래로, 내려갈 건 위로… 얄미운 경제구조 우울한 가장들이 늘어나고 있다. 올라가야 할 건 떨어지고, 내려가야 할 것은 올라가는 얄미운 경제구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곳은 단연 서민들과 중소기업이다. 정부 고위층은 “지금의 위기는 외환위기 때와는 분명 다르다. 기업구조가 튼튼하고 외환보유고도 넉넉히 비치돼 있기 때문이다. 특히, 대기업들은 현재 안정적인 수익구조로 나아가고 있고, 일부 대기업은 기대 이상의 수익률을 나타내고 있다”며 경제위기론에 반론을 제기한다. 그러나, 서민과 수출입업체들은 사정이 정반대다. 외환위기 이후 수출업체들은 밤잠을 안 자며 수출해 외환보유고를 채웠고, 금 팔기 운동에 나섰던 서민들은 허리띠를 졸라매며 경제위기를 꿋꿋하게 버텨 왔다. 그렇지만, 갈팡지팡하는 정부 정책을 믿지 못하는 투자자들이 늘어나면서, 경제는 또다시 위기에 놓이고, 이 때문에 그들은 버티기 힘든 처지에 놓여 있는 셈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결국 어깨가 처지는 사람은 가장들이다. 고물가 시대에 한 집안을 책임지며 더 많은 돈을 벌어 와도 모자랄 판에, 그나마 가지고 있는 자금마저 허공에 날려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경제전문가들은 “세계적인 금융불안 속에서 동반하락세는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고환율 정책을 암시한 일련의 정책으로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 증시를 자산 현금화에 가장 편리한 곳으로 인식하게 만들어 낙폭을 더욱 키웠기 때문”이라며 “정부는 연기금을 동원한 주가 부양을 ‘대증요법’처럼 사용했으나, 결국 주가 대폭락을 막지도 못했고 시장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도 잃는 큰 손실을 사실상 방치했다”고 지적했다. ■국민들, 고물가, 저성장 불가피 이런 상황에서 10월 27일 단행된 정부의 고강도 금융 대책은 고무적으로 보인다. 경상수지 확대, 정부 지출 확대, 금리인하를 통한 자본 유동성 확보 등으로 현재 금융경색이 주를 이루고 있는 위기 국면을 일부 해소할 수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리인하로 인한 물가와 환율 상승 압박이 필연적으로 따라붙을 것이라는 우려가 높다. 금리인하로 유동성이 풍부해질 경우의 반작용이다. 정부는 유가 인하로 경상수지가 개선되면서 경제가 나아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지만, 전세계적으로 실물경제 위기가 확산되는 경우 이 전망은 전면 백지가 될 수 있다. 여기에 이미 많은 민간 경제연구소가 3%대로 내년 경제성장률을 전망, 정부 예상과는 다른 침체를 예상하는데다, “한국경제의 내년 성장률은 2.2%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27일 오석태 한국씨티은행 이코노미스트 등)까지 나오고 있다. 결국 기본 자산은 줄고, 가계 소득은 불경기로 위축되거나 심한 경우 실직 등으로 0으로 수렴하는 상황에서 정부 정책의 역효과로 고물가에 직면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봄부터 본격화된 금융위기와 이에 대응한 정책 실패로 인해 국민들은 스태그플레이션의 위기 앞에 직면하고 있다. 경기가 위축될수록 가장들의 어깨도 위축되기 마련. 정부는 최대한 피해를 줄이기 위한 다강도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좀 더 현실적이고 믿을 수 있는 대책이 나와야 한다는 게 그들의 강한 하소연이다.